"비용 최소화 중심의 공급망 관리를 '자원·경로·계약'의 '주권 리스크'를 변수로 내재화한 체계로 바꿔야 할 시점이다. 지금까지의 공급망 관리가 '어디에서 싸게 사 올까'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지(자원), 어느 바닷길로 오는지(경로), 그 계약이 정말 지켜질지(계약) 등의 세 가지를 모두 국가 주권 변수로 놓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물리적 충돌로 촉발된 중동발 글로벌 경제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조속한 정전 협상을 추진 중이나,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국지전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구조적 전환점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외국변호사(미국 뉴욕주)이자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국제투자법), 산업통상부 통상분쟁대응과장 등을 지낸 굵직한 이력을 바탕으로 국내 최고 수준의 통상·국제법 전문성을 보유한 법무법인(유) 세종의 김세진 통상산업정책센터장과 만나 이번 사태의 본질과 우리 기업의 대응 전략을 물었다.
-최근 미국·이란 간 전쟁으로 중동발 글로벌 경제 리스크가 확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를 의식해서인지 이란과 정전 협상을 빠르게 추진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정전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여파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듯 보인다. 최근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지켜봤는가.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기전 오판이다. 이스라엘 프레임에 끌려 국지전이 지역 전쟁으로 번졌고, 개전 전 중동 전문가들이 경고했던 호르무즈 봉쇄, 미군 시설 타격, 이스라엘 에너지 인프라 공격이 그대로 현실화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간선거를 앞두고 정전을 서두르는 것은 분명하다. 에너지 가격은 집권 여당에 치명적이고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층조차 등을 돌리고 있다. 다만 정전이 곧 리스크 종료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쟁은 지난 30년간 탈정치화돼 있던 물리적 자원과 지리적 자산이 다시 주권 갈등의 수단으로 전면화된 구조적 전환점이다. 호르무즈는 '공공재'가 아니라 '주권 행사의 지렛대'가 됐고, 중동 자원 지리는 미사일 표적이 됐으며, LNG·헬륨 같은 부산물 공정은 주권 통제 수단이 됐다. 정전 이후에도 여파는 길게 갈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 입장에서 뼈아픈 것은 호르무즈(원유·나프타), 이스라엘(반도체용 브롬 97.5%), 카타르(헬륨·LNG), 걸프(암모니아·알루미늄) 등 이번 전쟁이 건드린 거의 모든 경로에 우리 주력 산업이 동시 노출된 극소수의 국가 중 하나라는 점이다. 비용 최소화 중심의 공급망 관리를 이제 '자원·경로·계약'의 '주권 리스크'를 변수로 내재화한 체계로 바꿔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예컨대 지금까지의 공급망 관리가 '어디서 싸게 사 올까'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어느 나라에서 나오는지(자원), 어느 바닷길로 오는지(경로), 그 계약이 정말 지켜질지(계약)의 세 가지를 모두 국가 주권 변수로 놓고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현재 많은 우리 기업이 운송 지연에 따른 계약 위반 위기에 처해 있다. 이번 사태를 국제 상거래법상 '불가항력(Force Majeure)'으로 인정받아 면책될 가능성이 어느 정도라고 보는가.
일률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결국 계약서 문언이 결론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사태를 법률적으로 보면 몇 가지 갈림길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가', '경제적으로 불합리한가'의 구분이다. 호르무즈 봉쇄나 카타르 라스라판 시설 파손처럼 공급 자체가 물리적으로 끊긴 경우는 불가항력 인정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항로는 열려 있지만, 보험료가 급등해 수지가 안 맞는다'는 유형은 대부분 인정받기 어렵다. 보험 계약에 준거법으로 많이 적용되는 영미법은 전통적으로 단순한 비용 증가를 불가항력 사유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이 지금 해야 할 일을 정리해 보면 기존 계약서의 불가항력 조항과 통지 요건을 전수 점검하고, 불가항력 기간 중 대체 조달 비용을 구상 청구에 대비해 기록·보전해야 한다. 신규 계약에는 호르무즈 시나리오별 조건부 조항과 전쟁리스크(War Risk)보험 부담 구조, 이란 통항세 귀책 구조, 불가항력 소멸 기준을 명시해 둬야 한다. 이번 사태의 면책 가능성은 사안별 편차가 매우 크다. 호르무즈 봉쇄처럼 물리적 불가능성이 명백한 영역은 인정 가능성이 높지만, 운송 지연·비용 급등 유형은 계약서 문언에 크게 좌우된다. 어느 경우든 지금은 다투기보다 계약 구조 전반을 재설계하는 쪽이 실익이 크다.
-전쟁 보험료 급등과 입항 거부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로펌 차원에서 우리 선사나 화주에게 권고하는 가장 시급한 법적 조치는 무엇인가.
지금 선사와 화주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계약서와 보험 약관을 전수 점검하는 일이라고 본다. 보험료 급등과 입항 거부는 이미 발생한 손실이지만,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고, 누가 계약 해지를 주장할 수 있는지는 계약서 문언 하나로 결론이 뒤집히기 때문이다. 특히 용선 계약의 전쟁 위험 조항을 먼저 봐야 한다. 이 조항은 선주가 위험 항로 통항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같은 상황이라도 정기 용선이냐, 항해 용선이냐에 따라 책임 귀속이 정반대로 갈린다. 추가 보험료 부담도 마찬가지다. 용선 계약상 대체로 원칙은 용선자 부담이지만, 매매 계약이 CIF냐 FOB냐에 따라 수출자와 수입자 중 누가 최종적으로 떠안는지가 달라진다.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쟁·소송으로 간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이란 통항세 문제다. 이란이 유료 통항 체제로 전환하면 통항세를 내는 것이 미국의 대이란 제재 위반이 될 수 있다. 제재를 어길 것이냐, 계약을 어길 것이냐의 갈림길이 생기는 것이다. OFAC(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 라이선스가 필요한지 미리 확인해 둬야 한다.
-만약 우리 국적 선박이 이란 당국에 의해 나포되거나 통행료 미납으로 억류될 경우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즉각적인 국제 중재나 법적 구제 수단은 무엇인가.
법적 구제 수단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실효성에서는 편차가 크다.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구제 수단은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조기 석방 절차다. UNCLOS 292조는 연안국이 외국 선박을 억류한 경우 선박 기국(旗國)이 ITLOS에 제소해 '합리적 보석금 예치를 조건으로 한 조기 석방'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절차가 빠르고(원칙적으로 1개월 내 판결) 한국은 UNCLOS 당사국이라 제소 자격이 있다. 문제는 이란이 UNCLOS를 비준하지 않은 비당사국이라는 점이다. 이란이 ITLOS 관할권을 거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법적 근거가 있어도 실제 집행력은 제한된다. 가장 현실성을 가지는 수단은 외교 협상이 아닐까 싶다. 2021년 1월 이란혁명수비대가 한국 화학운반선 '한국케미호'를 나포했을 때도 선원 19명은 약 한 달 만에 석방됐지만, 선박과 선장은 95일이 걸렸다. 석방 배경에는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 이란핵합의(JCPOA) 협상 진전, 동결 자금 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 측 조치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ITLOS나 ICJ 같은 국제 법적 절차가 가동되기 전에 외교 채널로 마무리된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사태로 '에너지 안보'가 기업 경영의 최우선 순위가 됐다. 중동 의존도를 낮추려는 기업에 추천할 만한 대체 루트나 유망한 지역은 어디라고 보는가.
개인적인 생각으로 완전한 탈중동은 불가능할 것 같다. 한국 정유 설비가 중동산 중질·고황 원유에 최적화돼 있고, 원유의 70% 내외를 중동에 의존하는 구조가 수십 년간 고착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체'보다 '분산과 비축'이 현실적 답이 아닌가 싶다. 대체 공급원을 애써 찾아보자면, 원유는 미국·호주·캐나다가 유력한 대체 공급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LNG는 카타르 단일 의존의 위험성이 드러났다.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프로젝트는 알래스카 LNG를 비롯한 미국산 LNG가 한미 무역 합의 대미 투자 자금의 주요 사용처로도 부상하고 있어 한국 에너지 안보와 한미 통상 관계가 동시에 엮여 있는 지점이다.
-법무법인 세종은 국제 통상·공공 국제법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보유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 사태처럼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겪는 기업들을 위해 현재 로펌에서 어떤 구체적인 조력을 제공하고 있는지.
세종은 올해 초 통상산업정책센터를 공식 출범시켜 이번 사태와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고 있다. 단순한 법률 검토를 넘어 기업의 해외 진출 전략·투자 구조·공급망 재편을 통합 설계하는 것이 센터의 핵심 역할이다. 방산·에너지·조선·배터리·반도체·AI(인공지능) 등 전략 산업을 중심으로 미국·유럽연합(EU)·중국을 비롯한 주요 경제 권역의 규제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한다. 세종은 공급망 규제 리스크 진단, 장기 계약 재협상과 불가항력 대응, 정책 금융·전략 투자 연계 설계, 딜 아키텍쳐(Deal Architect·회사와 고객 모두에게 유리한 결과를 도출하는 작업) 역할 등을 자문한다. 미국 조선 투자나 방산 진출처럼 CFIUS, 수출 통제, 조달 규정, 세무, 금융이 동시에 얽히는 복합 거래에서 미국 로펌과 공동 자문 체계를 구축해 양국 규제를 동시에 반영한 최적의 딜 구조를 설계한다. 규제는 어디에나 있지만, 규제의 구조를 먼저 읽는 기업이 결국 경쟁우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번 이란 사태 역시 한국 기업에는 중동 재건, LNG선, 방산, 원전 같은 거대한 기회의 문을 여는 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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