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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의 재테크루 20년이면 수백만원 차이…'무료 IRP' 고를 때 따져볼 것들
삼성생명이 다음 달부터 개인형퇴직연금(IRP) 수수료를 전면 면제한다. 증권사를 중심으로 확산하던 'IRP 수수료 0원' 경쟁이 보험업계로 번지는 모습이다. 은퇴까지 10년, 20년씩 운용하는 IRP에서는 연 0.1~0.3%의 작은 수수료도 무시하기 어렵다. 다만 ‘무료’라는 문구만 보고 계좌를 옮기기보다는 투자 상품과 서비스까지 함께 따져봐야 한다.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삼성생명은
이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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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아의 산업예보 7분기만에 흑자전환 한 K-배터리 3사...반등 이유는?
인공지능으로 생성한 이미지 오늘의 배터리업계 맑음 K배터리 3사가 올해 2분기 나란히 흑자를 내며 7개 분기 만에 동반 흑자를 기록했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이 이어지는 가운데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용 배터리 수요 확대 △북미 생산세액공제 △원가 절감이 실적 반등을 이끌었다. 다만 회사별 흑자 원인에는 차이가 조금씩 나타났다. 삼성SDI는 생산세액공제를 제외하고도 영업이
신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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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윤서의 ‘주‘경야독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조이기 본격화…'ELW 전철' 밟나
정부가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로의 자금 쏠림과 시장 변동성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규제 강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금융당국은 기본예탁금 상향과 최소 매매단위 확대 등 투자요건을 잇달아 강화하는 모습입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규제 기조가 과거 주식워런트증권(ELW) 시장에 적용됐던 규제 과정과 닮았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규제 전 하루 2406억원 유입…상승 베팅 집중 31일 코스
송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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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자는 왜 손흥민을 욕했을까?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 파문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훈련을 지켜보던 두 기자가 손흥민에게 여과 없는 말을 뱉었고, 그 음성이 카메라에 고스라히 담긴 것. 해당 영상이 확산되며 논란이 커지자 JTBC 측은 영상을 비공개 처리한 뒤 발언이 삭제된 편집본을 재게시했다. 이번 논란을 들여다보기 전 분명히 해둘 점은, 우리가 두 남성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손흥민에게 열등감을 느꼈는지, 병역 특례에 반발심을 풀었는지, 현장에서 어떤 불만을 겪었는지 단정할 수 없다. 업계 밖에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기자라는 직업을 재판하기 위해 두 사람의 내면을 살펴보려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그들의 감정을 추측해볼 뿐이다. 취재 대상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생각, 현장을 안다는 자부심, 팬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모든 게 어느 순간 냉소로 흐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가까이서 보고 평가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마음을, 본인을 포함해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말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이 무심코 던진 말에는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 자존심을 지키는 습관이 묻어난다. 대화 속 그들은 손흥민의 슈팅이나 경기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이 꺼낸 말은 '군대'였다. 손흥민을 향한 취재진의 욕설이 담긴 영상 "주장이라고 소대장 뛰듯이 뛰는 건가." "군대도 안 갔다 온 XX들이."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 XX들." 짧은 대화지만 꽤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축구장의 주장을 병영의 소대장으로 바꾸는 시선, 군필 경험을 도덕적 우위처럼 사용하는 태도, 압도적인 스타를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좁은 기준 안으로 끌어들이는 심리, 남성들끼리 서로 으스대며 조롱을 주고받는 문화까지. 단순한 설명을 할 수도 있다. 현장은 덥고, 대기는 길었을 수 있다. 월드컵 현장 취재는 피곤할 수 있다. 낯선 도시, 빡빡한 동선, 제한된 접근, 취재 경쟁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더위와 피로는 말의 문턱을 낮춘다. 평소라면 속으로 삼켰을 짜증이 입 밖으로 새어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날씨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불쾌감이 있었다면 그건 왜 하필 군대의 언어로 나왔을까. 피곤했다면 왜 그 피곤함은 국가대표 주장에게, 그것도 병역 경험을 조롱하는 말로 이어졌을까. ▲ 냉소를 전문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 기자는 직업적으로 대상을 가까이서 본다. 훈련장을 보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표정을 읽고, 몸짓을 관찰한다. 반복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직업이다. 그런데 평가는 때때로 이상한 착각을 만든다. '나는 팬이 아니다.' '나는 저 사람을 안다.' '나는 저 사람의 민낯을 본다.' 건강한 거리감일 수 있다. 기자는 팬처럼 감탄만 해서는 안 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보고,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감탄하지 않는 태도를 전문성으로 착각하고, 냉소를 통찰처럼 여기게 된다. 팬은 감탄하고 기자는 판단한다고 믿는 것이다. 가까이서 본다는 게 더 깊이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복적인 관찰은 사람을 대상화하기 쉽다. 선수는 사람이 아닌 기사 재료가 되고, 인터뷰이는 코멘트 공급원이 되고, 스타는 취재 동선 안의 자원이 된다. 손흥민 같은 선수는 더 그렇다. 그는 한국 축구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기사와 조회수의 원천이다. 기자는 그에게 기대어 기사를 쓴다. 손흥민이 뛰어야 기사가 나오고, 손흥민이 말해야 멘트가 생기고, 손흥민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독자의 눈길이 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존하는 존재 아래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취재 대상에게 기대면서도 말로는 그를 낮춘다. 그를 작게 말함으로써 자신이 작지 않다고 느끼려 할 수 있다. 전문가 의식의 그림자다. 취재권은 권력이 아니고, 접근권은 우월감의 근거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이 자주 보는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익숙함은 존경을 무디게 만든다. 선수와 같은 공간에 있고, 훈련을 보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경기 전후를 평가하는 위치에 있으면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라는 착각을 가진다. 손흥민을 향한 조롱 역시 취재 대상에게 의존하면서도 그 위에 서고 싶은 직업적 이중감정이 드러난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 허세의 본질: 타인을 낮춰야 겨우 서는 자존감 손흥민은 한국 축구에서 너무도 큰 이름이다. 대표팀 주장이자 한국 축구의 얼굴이고, 세계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해온 선수다. 그런 사람을 정면으로 깎아내리기는 쉽지 않다. 축구 실력으로 공격하기도 어렵고, 커리어로 무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다른 기준을 찾는다.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기준, 적어도 자기 안에서는 "그래도 이건 내가 더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기준. 두 기자에겐 그 기준이 군대였을 가능성이 있다. 자신감은 남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서지만, 허세는 누군가를 낮춰야 선다. "나는 군대 갔다 왔다"는 말이 건강한 자부심이라면 타인을 욕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 자부심이 불안정하면 과시가 된다. 더 세게, 거칠게, 낮잡아 말해야 자신의 위치가 확인된다. 손흥민이 별것 아니어서 조롱한 게 아니라, 너무 큰 사람이라서 조롱해야 했을 수 있다. 누군가를 인정하면 내가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상대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대신 흠집을 찾고, 그 흠집을 확대한다. 그리곤 말한다. "그래도 저 사람은 이걸 모르잖아." 그들은 손흥민을 낮춰서 자신을 높이려 했던 게 아니라, 어쩌면 이미 작아진 자신을 견디기 위해 손흥민을 낮춰야 했을지도 모른다. ▲ 경험 독점 심리 "주장이라고 소대장 뛰듯이 뛰는 건가"라는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 말은 손흥민을 축구대표팀 주장으로 보지 않는다. 발화자는 손흥민을 자신에게 익숙한 병영 세계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축구장의 주장은 그의 입에서 소대장이 되고, 월드클래스 선수의 몸짓은 군대식 조롱 코드가 된다. 이어진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은 손흥민의 자격을 빼앗는 말이다. "너는 우리가 겪은 세계를 모른다", "너는 그 고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완전히 인정받을 수 없다"는 식의 서열 의식이 깔려 있다. 손흥민이 축구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뤘든, 이 말 안에서 그는 '군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축소된다. 경험 독점 심리는 내가 겪은 것이 진짜 고생이고, 내가 아는 것이 진짜 세계이며,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것을 모르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태도로 나온다. "군대의 '군' 자도 모르는"이라는 표현은 상대의 무지를 선언한다. 손흥민의 축구 인생, 훈련, 책임감, 압박감, 국가대표로서의 희생은 지워진다. 남는 건 하나다. "너는 우리가 겪은 군대를 모른다." 두 기자는 손흥민의 커리어를 부정하기 어려웠을 테다. 대신 자신들이 독점한 경험을 꺼냈다. 병역 문제는 손흥민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소재였을지 모른다. 축구장에서는 손흥민이 주장이지만, 군대 이야기에서는 자신들이 선임이 된다. ▲ 고생의 권력화 군대는 어떤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통과의례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말할 만한 고생담이 되고, 자기 정체성을 지탱하는 자부심이 된다. 단 그 자부심이 타인을 내려치는 도구가 될 때, 고생은 기억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군대는 억울함이면서 자랑이고, 고생이면서 훈장이고, 상처이면서 자격증이다. '내가 그걸 견뎠다'는 생각은 어느 순간 '그러니 나는 말할 수 있다'는 권한이 된다. 군 경험이 자기 내부에서 충분히 보상받지 못했다고 느낄수록, 그 경험을 더 세게 붙든다. 내가 겪은 고생이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면 너무 허무하니, 그 고생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군대를 도덕적 자산으로 만든다. 그런 사람에게 병역 특례를 받은 스타는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군대에 오래 가지 않았는데도 사랑받는다. 내가 겪은 시간을 겪지 않았는데도 박수받는다. 그는 국민적 영웅이고, 나는 평범한 군필자다. 이 비교는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한다. 이런 감정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정의감의 얼굴로 누군가를 응징하려 한다.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은 그렇게 박탈감을 도덕적 비난으로 포장한다. 손흥민은 한국 축구를 위해 뛰었고, 국제대회 성과로 병역 특례를 받았다. 법과 제도 안에서 주어진 혜택이다. 제도적으로 정당한 일이라고 해서 모두가 납득하는 건 아니지만. 특히 군대처럼 개인의 청춘, 시간, 자존심, 억울함이 뒤엉킨 경험에서는 더 그렇다. 누군가의 특례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생이 무가치해지는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손흥민의 성취를 인정하는 대신, 그를 "군대를 모르는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나온다. ▲ 남성들끼리 주고받는 공모의 말 이번 대화가 혼잣말이 아니라 두 기자의 주고받기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소대장 뛰듯이"라는 군대 농담의 문을 열자, 다른 사람은 "군대도 안 갔다 온"이라는 말로 수위를 올린다. 누군가를 같이 비웃는 동안, 두 사람은 같은 편이 된다. "너도 알지?" "우리끼리는 통하지?" "우리는 저 세계를 알잖아" 이들의 말은 서로를 향해 있었다. 이때 손흥민은 두 남성이 자기들끼리 유대를 확인하는 재료가 된다. 군대 농담은 이런 방식으로 자주 쓰인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 사이에서는 몇 마디만으로도 공통의 기억이 열린다. 소대장, 간부, 뜀걸음, 얼차려, 점호 같은 말들…설명이 필요 없다. 남성들 사이의 빠른 접속 코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농담에서 그치는 편이 낫다. 사적인 유대 언어가 공적 현장에서, 선수 개인을 향한 조롱으로 튀어나올 때 그건 더이상 농담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런 식의 공모는 수위를 키운다. 혼자였다면 지나쳤을 말이 옆 사람의 반응을 만나 더 거칠어진다. 첫 발언은 장난처럼 시작됐을 수 있다. 두 번째 발언은 그 장난에 욕설을 얹었다. 농담이 조롱이 되고, 조롱이 모욕이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 무대 뒤의 언어 이 사건이 더 씁쓸한 이유는 발언자들이 그 말을 사담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옆 사람과 툭 던지는 말, 현장 주변에서 흘러가는 농담…하지만 사적인 말이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무대 뒤라고 믿었던 말이 무대 앞으로 흘러나온 이번의 사건에는 손흥민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국가대표 주장이 아니라 병영 농담의 소재, 세계적 선수가 아니라 군대를 모르는 사람. 영상에 담긴 건 그 시선이었다. 손흥민은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너무 큰 사람이었을 것이다. 너무 멀리 있고, 너무 많은 박수를 받고,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그래서 자신들이 이길 수 있는 세계로 끌고 들어왔다. 그 세계의 이름은 군대였고, 어쩌면 현장이었고, 어쩌면 기자라는 역할이었을지 모른다. 두 남성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남긴 말은 들을 수 있다. 그 말에는 피로와 불만, 허세가 뒤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평범한 훈련 장면에서조차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의 자리에 놓고 싶은 욕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그 감정은 손흥민을 깎아내리는 말로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손흥민보다, 그 말을 뱉은 사람들의 세계를 더 많이 드러냈다.
이동건 기자 -
'호프'에 4점 준 이동진은 왜 욕먹었을까?이동진 평론가는 또 해명했다. 그는 자신의 평가가 대중의 감상과 엇갈릴 때마다 감독과의 친분, 정치적 성향, 영화계의 이해관계가 평론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평론의 논리보다 평론가의 숨은 동기를 먼저 추궁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영화 '호프'였다. 이동진은 '호프'에 별점 4점을 주고 "기괴한 난장판 속에서 대담하게 질주하는, 영화 전체가 거대한 크레센도"라고 평했다. 이후 '호프'에 대한 관객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이동진이 왜 이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줬는지 의심하는 반응이 이어졌다. 나홍진 감독과 친분이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부터 감독의 명성에 눌렸다는 추측, 침체된 한국 영화계를 의식해 점수를 후하게 줬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결국 이동진은 나홍진 감독과 사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고, 전화번호조차 모른다고 밝혔다. 한국 영화계의 사정이나 경제적 이해관계가 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에게 '호프'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강하게 다가온 영화였다는 설명이다. 평론가의 평가에 반론을 제기할 순 있다. 별점의 근거가 설득력 있는지, 장면에 대한 해석이 타당한지 물을 수 있다. 평론 역시 비평의 대상이다. 이상한 건 사람들이 이동진의 분석을 반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의 배경까지 의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영화가 별로였다'는 감상이 '그 영화를 좋게 평가한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쉽게 넘어간다. '호프'를 둘러싼 논쟁은 영화의 완성도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그 밑에는 누가 영화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인지 가려내려는 경쟁이 흐른다. 취향이 의견에 머물지 않고 안목과 지능, 교양의 등급표로 바뀌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 취향은 자아다 조나 버거와 칩 히스는 사람들이 음악이나 헤어스타일처럼 정체성과 밀접한 영역에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려는 경향을 확인했다. 특히 실용적인 물건보다 문화적 취향에서 차별화 욕구가 강하게 나타났다. 취향이 선호를 넘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메시지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영화는 정체성을 담기 쉬운 대상이다. 내가 어떤 서사를 가치 있게 여기고, 얼마나 복잡한 표현을 즐기며, 어떤 감독과 장르에 관심을 두는지 보여준다. '호프'처럼 해석이 여러 방향으로 갈리고 감독의 전작까지 소환되는 작품에서는 이 기능이 더욱 강해진다. 누군가에게 '호프'는 대담하고 독창적인 장르영화고, 누군가에게는 과잉과 허술함을 거대한 규모로 가린 영화다. 갈등은 감상을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작품의 객관적 실체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리 로스와 앤드루 워드는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경향을 '소박한 실재론'으로 설명했다. 나와 다른 판단을 내린 사람을 보면 그가 다른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편향됐다고 추정하기 쉽다. 이러한 경향은 의견 차이를 불신과 상대 진영에 대한 악마화로 키울 수 있다. '호프'가 재미없었다는 사람에게 영화의 산만함은 취향이 아니라 눈앞에 놓인 결함처럼 느껴진다. 자신에겐 너무나 명백한 단점을 유명 평론가가 지적하지 않으면 이유가 필요하다. '나와 중요하게 보는 기준이 다르구나'보다 '감독 눈치를 봤나'라는 설명이 더 쉽게 떠오른다. 반대편도 다르지 않다.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은 작품의 의미와 장점을 알아본 자신을 통찰력 있는 관객으로 여길 수 있다. 혹평한 사람에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상징을 읽지 못했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감상 역시 객관적 진실이 된다. 한쪽은 상대가 영화에 속았다고 믿고, 다른 한쪽은 상대가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는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서로 다른 요소에 무게를 둔 것이다. 하지만 감상이 자아와 결합하면 차이는 곧 위협이 된다. ▲ 재미없게 본 사람은 왜 호평을 공격할까 '호프'를 호평하는 관객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두고, 타인의 취향을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이 호평에 더 날카롭게 반응할 수 있는 상황은 생각해볼 수 있다. 이동진의 평론을 예로 들면 그의 해설은 복잡한 상징과 신화, 장르의 역사, 감독의 세계관을 동반한다. 이런 설명은 작품을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기도 하지만, 혹평한 관객에게는 다른 메시지로 다가올 수 있다. '당신이 재미없었던 건 이 의미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해석의 언어가 감상 능력의 서열처럼 유통된다면, 영화를 싫어한 사람은 자신의 취향뿐 아니라 이해력까지 평가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 공격은 선제적인 지위 방어가 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너희가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붙이고 있다.' '내가 영화의 가치를 놓친 게 아니라, 너희가 유명 감독과 평론가의 권위에 속고 있다.' '내가 교양이 부족한 게 아니라, 너희가 문화적 허영에 빠져 있다.' 상대를 허영에 빠진 사람으로 규정하면 자신이 아래에 놓일 가능성을 피할 수 있다. 호평자의 감상을 무효화함으로써 자신의 안목을 지키는 것이다. 호평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반격할 수 있다. '싫어하는 건 자유지만, 이해도 못하고 욕한다.' 이 말은 작품에 대한 반론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능력을 심판한다. 한쪽은 허세를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무지를 공격한다. 영화에 대한 말은 사라지고 사람에 대한 평가만 남는다. 둘 다 상대가 말한 감상을 믿지 않는다. 상대의 마음속에 더 비열하거나 부족한 동기가 있을 거라고 추측한다. ▲ 이동진의 무게 이동진의 별점은 개인의 감상이면서도 개인의 감상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언론은 그의 별점을 기사로 만들고, 팬들은 한 줄 평을 공유하고, 영화 커뮤니티는 그의 평가를 작품의 위치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동진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평가는 사회적으로 큰 무게를 가진다. 권위가 생기면 편리함과 불편함이 함께 생긴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서 전문가의 판단을 참고하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우리는 모든 정보를 직접 검토할 시간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위신 편향은 이를 잘 설명한다. 사람들이 특정 정보, 제품, 의견 등을 평가할 때 객관적인 내용보다 정보를 제공한 사람이나 출처의 사회적 지위, 평판, 인지도에 더 큰 영향을 받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인지적 편향이다. 이는 시행착오의 비용을 줄이는 효율적 전략이다. 이동진의 평을 참고하는 것도 내가 놓친 장면을 발견하고, 흐릿했던 감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이동진의 해석을 읽고 내 생각이 넓어졌다'와 '이동진이 4점을 줬으니 좋은 영화다'는 다르다. 해석을 빌리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까지 빌린다. 모호한 작품은 판단하기 어렵다. 재미는 있었지만 결말이 납득되지 않을 수 있고, 장점은 분명하지만 좋은 영화라고 말해도 되는지 망설여질 수 있다. 이때 유명 평론가의 높은 별점은 불확실성을 빠르게 없애준다. '역시 좋은 영화였어.' 별점은 판단을 돕는 참고 자료가 아니라 판단을 보증하는 인증서가 된다. 이런 추종이 늘어날수록 반대쪽의 반발도 강해진다.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에게 이동진의 별점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감상을 수정하라고 요구하는 문화적 압력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때 심리적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의 선택과 판단의 자유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저항하려는 동기다. 물론 이동진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평가를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별점 4점은 명령이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평론가의 평가가 기사와 커뮤니티, 팬들의 언어를 거치며 사실상의 정답처럼 자리할 경우 일부 관객은 감상의 자유를 침해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영화가 재미없었다는 자신의 경험보다 전문가의 분석이 우위에 놓인다고 느끼는 것이다. 가장 쉬운 자유 회복 방법은 평론가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저 사람도 객관적이지 않다.' '친분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저런 평가를 했다.' '감독의 이름값에 눌렸다.' 평론가의 동기를 의심하면 그의 판단을 검토할 필요가 사라진다. 자신의 감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권위의 압력만 제거할 수 있다. 출처 폄하의 장점이다. 반대 의견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하지 않아도 된다. 말한 사람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면 메시지 전체를 기각할 수 있다. 이동진이 나홍진 감독과 커피를 마신 적이 있는지, 전화번호를 아는지까지 해명해야 했던 이유다. 논쟁의 중심이 영화의 장단점에서 평가자의 순수성으로 옮겨갔다. ▲ 이동진을 공격하는 사람과 추앙하는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한쪽은 이동진의 권위를 부정하고, 다른 한쪽은 이동진의 권위에 기댄다. 행동만 보면 정반대지만, 둘은 같은 불편함에서 출발할 수 있다. 내 감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렵다는 점이다. 공격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신뢰성을 떨어뜨려 자신의 판단을 지킨다. 추앙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판단을 확정한다. 한쪽은 '이동진이 틀렸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이동진과 같으니 내가 맞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든 영화와 자신의 관계보다 이동진과 자신의 거리가 판단의 근거가 된다. ▲ 시네필의 허영과 시네필을 조롱하는 허영 영화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는 문화적 구별 짓기도 숨어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취향이 개인의 순수한 선호만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회적 지위와 집단의 경계를 구분하는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내면화된 문화적 취향(아비투스)와 교육이 문화 자본으로 작용해 기득권을 세습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어려운 영화를 즐기고 복잡한 상징을 해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허영이 아니다. 영화에서 발견한 의미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해석이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봤다'는 자기 증명으로 바뀌면 문제가 달라진다. 상징과 신화, 영화사의 맥락을 설명하는 언어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관객을 나누는 자격증이 된다. '호프'를 좋아했다는 말보다 '호프'를 이해했다는 말이 앞에 놓인다. 영화에 대한 애정은 점차 자신이 평범한 관객과 다르다는 증거로 쓰인다. 거들먹거리는 시네필의 모습을 과장한 조롱 밈이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이유도 이 이미지 때문이다. 영화를 즐기는 사람보다 어려운 용어와 감독의 이름을 이용해 우월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네필을 조롱하는 쪽에 허영이 없는 건 아니다. '재미없는 건 그냥 재미없는 것이다.' '나는 어려운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유명 감독이 찍었다고 무조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 말에는 문화 엘리트의 권위에 속지 않는 현실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자기상이 담길 수 있다. 복잡한 해석을 허세로 규정하면서 자신은 본질을 꿰뚫어 보는 사람의 자리를 차지한다. 한쪽은 '나는 이 영화를 이해했다'며 우월감을 얻고, 다른 한쪽은 '나는 이 영화의 허세를 간파했다'며 우월감을 얻는다. 하나는 문화적 속물주의고 다른 하나는 반속물주의처럼 보이지만, 상대를 발판 삼아 자신의 안목을 증명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이속에서 '호프' 논쟁은 '호프를 좋아하는 사람'과 '호프에 속지 않은 사람'이라는 집단정체성으로 번졌다. 영화를 평가하는 일이 어느 순간 자신이 속할 집단을 고르는 일이 된 것이다. ▲ 영화는 해석해도 타인의 마음까지 해석할 수는 없다 "나는 재미있었다"는 말은 반박하기 어렵다. 그 관객이 실제로 느낀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미없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논쟁거리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장면이 왜 효과적이었는지, 서사의 빈틈이 의도된 모호함인지 설명 부족인지, 상징이 작품 안에서 충분히 뒷받침되는지 등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작품에 대한 논쟁을 건너뛰고 상대의 마음부터 해석한다. '호프'를 둘러싼 논쟁에서 사람들이 지키려 한 건 영화에 대한 의견만이 아닐 수 있다. 자신이 영화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믿음, 유명한 권위에 속지 않는 사람이라는 믿음, 남들이 놓친 의미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평론도 정답을 배급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이 영화를 본 방식과 근거를 전해 다른 관객의 감상을 넓히는 일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되고, 반박해도 된다. 다만 별점에 반대하기 위해 평론가의 인격과 동기까지 발명할 필요는 없다.
이동건 기자 -
'디스클로저 데이'는 왜 "Listen"으로 끝날까?외계 생명체의 존재, 비밀 조직의 은폐, 내부 고발, 추격전, 전 세계 생중계, 인류의 운명을 바꿀 폭로. 재료만 놓고 보면 당연히 거대한 SF 스릴러여야 한다. 관객은 숨겨진 파일이 열리고, 정부와 민간 권력이 무너지고, 외계인의 진짜 목적이 드러나고, 폭로 이후 세계가 어떻게 재편되는지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스필버그는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거대한 폭로를 준비하는 척하다가,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세계의 격변을 보여주지 않는다. 외계인의 정체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폭로 이후 사회가 어떤 혼란에 빠졌는지도 다루지 않는다. 단지 인물들을 뉴스 스튜디오 앞으로 데려간 뒤, 한마디를 남긴다. "Listen." 관객의 입장에서는 허탈할 수 있다. 여기까지 끌고 와놓고 고작 그 말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럴 만하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미스터리를 걸어놓고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영화가 아니다. 음모론 구조를 빌려왔지만, 음모론의 쾌감을 주는 영화도 아니다. 폭로를 소재로 삼았지만, 폭로 전후의 세계를 정교하게 그려내는 정치 스릴러도 아니다. '디스클로저 데이'의 진짜 관심은 외계인도, 진실도 아니다. 진실이 드러났을 때 인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가다. 외계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침입자가 아니라, 인간이 오래 외면해온 진실의 형상이다. 그 진실이 문을 두드릴 때 인간은 환영하지 않는다. 먼저 숨긴다. 부정한다. 통제한다.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 역할을 맡는 게 비밀 조직 워덱스다. 워덱스는 인간의 방어기제가 조직의 형태를 얻은 모습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깊숙한 곳에 가두고, 그 진실이 밖으로 새어나오려 할 때마다 폭력적으로 봉합한다. 노아 스캔런(콜린 퍼스)은 그 방어기제의 관리자다. 그는 진실을 숨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류를 보호한다고 믿는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무의식적 전략을 뜻한다. 부정, 억압, 합리화, 투사 같은 방식이 대표적이다. 방어기제가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너무 큰 충격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음에도 완충 장치가 필요하고, 모든 진실을 즉시 정면으로 마주하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방어가 오래 지속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처음에는 자아를 보호하던 장치가 어느 순간 현실을 왜곡하는 감옥이 된다. 노아가 그렇다. 그는 외계인의 존재를 숨기고, 통제하고, 가두고, 폭력으로 막는다. 그의 언어는 언제나 보호와 책임이다. 그는 자기 확신에 갇혀 있다. "당신은 당신이 믿고 있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스필버그는 이 질문을 너무 순진하게 밀어붙인다. 그래서 영화는 아름답고도 헐겁다. 좋게 말하면 동화고, 나쁘게 말하면 아이들 이야기다. 늑대 배를 가르면 아이들이 멀쩡히 튀어나오고, 마녀의 과자집을 탈출하면 숲이 끝나는 세계. 현실의 폭력과 권력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데, 스필버그는 끝내 해피엔딩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어쩌면 그게 노년의 스필버그가 붙들고 있는 마지막 신앙일지 모르겠다. 세상은 엉망이지만, 인간은 아직 서로를 들을 수 있다는 믿음. 마거릿(에밀리 블런트)과 다니엘(조쉬 오코너)은 진실이 공개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구도만 보면 영화는 '더 포스트'의 SF 버전처럼 보인다.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사람들, 그 진실이 불러올 혼란을 걱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알 권리와 질서 사이의 충돌. 영화는 이 어른스러운 딜레마를 끝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 폭로가 왜 인류에게 그렇게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지, 공개 이후 어떤 파장을 낳는지,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충격이 어떤 방식으로 번져가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폭로를 걱정하던 다니엘 연인의 시선은 중반 이후 힘을 잃는다. 처음에는 중요한 균열처럼 제시되지만, 어느 순간 영화는 그 질문을 접어두고 마거릿과 다니엘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스필버그는 세계의 붕괴보다 개인의 붕괴에 관심이 있다. 사회 시스템이 어떻게 재편되는가보다, 한 인간이 방어를 어떻게 내려놓는가에 눈길을 보낸다. 그래서 영화의 중심은 외계인 엑스파일이 아니라 마거릿과 다니엘의 마음속이다. 그들이 무엇을 밝히는지보다, 그들이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 선택이 호불호를 가른다. SF 스릴러를 기대한 관객에게 이 영화는 배신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지와의 조우', 'E.T.', '우주전쟁'을 만든 스필버그가 다시 외계인을 들고 왔다면 경이와 공포, 스케일과 미스터리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데 '디스클로저 데이'의 외계인은 장르적 쾌감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외계인은 '거울'이다. 인간이 외면해온 것을 비추고, 인물들이 눌러온 감정을 흔들고, 방어기제 뒤에 숨은 상처를 바라보게 만든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시선이다. 다니엘은 사슴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말한다. 눈을 돌리지 않는다고. 그러나 사진을 찍으려 하면 도망간다. 이 이미지는 영화 안에서 반복된다. 동물이 사람을 바라본다. 외계인이 동물의 형상을 빌려 나타난다. 그들은 공격하지 않는다.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본다. 이 시선은 심리적으로 중요한 메타포다. 누군가를 진짜로 바라보는 일은 그 사람의 방어를 건드린다. 인간은 타인의 시선 앞에서 자신을 꾸미고, 숨기고,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하지만 말없이 오래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는 설명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그때 남는 건 자아가 애써 밀어냈던 감정이다.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상실감, 외로움 같은 것들…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외계 존재는 인류를 정복하러 온 침략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회피하지 못하게 만드는 응시의 존재다. 말하자면 우주에서 온 상담자다. 마거릿과 다니엘은 세상의 비밀을 폭로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자기 안의 봉인을 풀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외부의 음모를 파헤치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접근한다. 반복되는 두 사람의 호흡곤란은 그 반작용이다. 불안은 호흡으로 돌아오고, 억압은 떨림으로 새고, 상처는 어느 날 아무 상관없는 장면에서 불쑥 올라온다. 스필버그는 이 과정을 지나치게 친절하게 보여준다. 방어기제, 상처, 회피, 각성, 연대. 심리 상담의 단계처럼 인물들을 배치한다. 그래서 어떤 관객에게는 감동적이고, 어떤 관객에게는 설명 과잉처럼 느껴질 것이다. 영화가 다소 산만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제 문제, 종교, 음모론, 내부 고발, 외계 생명체, 핵전쟁의 위기, 개인의 트라우마, 공감과 연대. 말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스필버그는 여전히 질문을 던진다. "공감 능력은 어디로 갔는가." 이 물음은 '디스클로저 데이'의 심장이다. 스필버그가 외계인을 다시 부른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같은 종끼리도 서로를 듣지 못한다. 종교, 인종, 국가, 계급, 이념, 두려움, 자기 확신. 자신과 다른 존재를 만나면 이해하기보다 분류한다. 분류한 뒤에는 방어한다. 방어한 뒤에는 공격한다. 이 영화의 워덱스가 외계인을 가둔 방식은 현실의 권력이 낯선 존재를 다루는 방식과 닮아 있다. 먼저 이름 붙이고,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격리하고, 통제한다. 그 모든 폭력은 언제나 '인류를 위해'라는 말로 시작된다. 스필버그는 그 반대편에 경청을 놓는다. 경청은 착한 태도의 문제는 아니다. 심리적 용기의 문제다. 듣는다는 건 내가 가진 세계관이 흔들릴 수 있음을 허락하는 일이다. 내가 옳다고 믿어온 질서가 무너질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 그래서 사람은 잘 듣지 못한다. 듣는 척은 쉽다. 반박하기 위해 듣고, 공격하기 위해 듣고, 내가 이미 정한 결론에 맞추기 위해 듣는다. 진짜로 듣는 순간, 자아는 안전하지 않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Listen"은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면서, 인물들의 마음을 통과한 결론이다. 마거릿은 누군가의 종교가 되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진실의 주인이 아니라 전달자라는 것을 안다. 현대사회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둘 다 타인을 제대로 듣지 않는 방식이다. 위험하다. 숭배는 상대를 인간 이상으로 만들고, 혐오는 상대를 인간 이하로 만든다. 둘 다 인간을 지운다. 마거릿은 그 투사의 자리를 거부한다. 그는 구원자가 아니라 통로다. 모세와 아론을 떠올리게 하는 두 주인공, 파라오처럼 진실을 독점하는 노아, 12명의 내부 고발자, 성흔을 연상시키는 상처, 방언과 오순절을 떠올리게 하는 클라이맥스까지. '디스클로저 데이'는 기독교적 상징을 노골적으로 흩뿌리지만, 그 모든 상징이 도달하는 말은 하나다. "Listen." 이 종교성은 영화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기독교적 전통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영화가 꽤 풍성한 알레고리로 보일 수 있다. 외계인은 신의 대체물이 아니라 계시의 매개체처럼 다가온다.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드러내고, 인간은 그 계시를 감당해야 한다. 심리적 각성의 측면에서 봤을 땐 무의식에 가둬둔 진실이 의식의 문턱까지 올라와 말을 거는 이야기다. 계시든 자각이든, 내가 만든 세계 바깥에서 무언가가 말을 걸어오는 순간을 '디스클로저 데이'는 그려낸다. 이 코드에 익숙하지 않거나, 보다 세속적인 SF를 기대한 관객에게는 영화가 지나치게 설교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잘 들으세요"라는 한마디는 어떤 이에게 영화를 관통하는 아름다운 초대지만, 어떤 이에게는 거장이 칠판 앞에 서서 생활지도를 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수 있다. "스필버그 선생님, 외계인이 뭐라고 했는지는 알려주셔야죠" 하며 따지고 싶을 수도 있다. 영화는 궁금증을 남겨둔다. 외계인이 어디서 왔는지, 왜 인류 앞에 나타났는지,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 공개 이후 세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관객의 욕망은 다르다. 문이 열리면 방 안을 보고 싶다. 스필버그는 문을 열어놓고 말한다. 이제 네가 들어라. 관객은 대답한다. 그 전에 방 안 조명부터 좀 켜주세요. 젊은 시절의 스필버그는 외계인을 통해 경이를, 가족을, 공포를 말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를 통해 경청을 말한다. 그의 외계인은 이제 하늘에서 내려오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인간의 닫힌 마음 앞에 놓인 질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우주보다도 타인의 목소리를 두려워한다. 타인의 목소리를 들은 뒤 이전의 나로 남을 수 없다는 사실도. "너희는 아직 서로 들을 수 있는가." 노년의 슬픔이 묻어나는 질문이다. 세상을 오래 본 사람이 가지는 피로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집이 있다. 스필버그는 인간을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순진하고, 장황하고, 설교적이다. 세상이 냉소를 보일 때 동화적인 언어로 인간에게 말을 건다. 늑대의 배를 가르면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노인. 촌스럽다. 하지만 그 촌스러움이야말로 갖기 어려운 태도다. 그래서 영화는 심리적 여정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외계인의 존재는 억압된 진실, 워덱스는 방어기제, 노아는 자기 정당화다. 마거릿과 다니엘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려는 내면의 목소리다. 사슴의 시선은 회피할 수 없는 자기 응시다. 추격전은 진실이 드러나기 전 자아가 벌이는 마지막 저항이다. 마지막 생중계는 고백이다. 타인에게 던지는 말이기 전에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다. 들어라. 네 안에서 오래 도망치던 목소리를, 네가 통제라는 이름으로 가둬둔 두려움을, 네가 신념이라고 불러온 방어를, 네가 안전을 위해 지워버린 타자를… '디스클로저 데이'의 폭로는 세계를 향한 폭로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폭로는 자기 자신을 향한다. 진실은 세상에 공개되기 전에 먼저 개인의 내부에서 들린다.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파일이 열려도 달라지지 않는다. 외계인이 눈앞에 서 있어도 그는 새 증거를 찾고, 새 통제 장치를 만들고, 새 감옥을 설계할 테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스필버그는 외계인의 말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오래 외면해온 인간의 말을 다시 들려줬을 뿐이다. "Listen."
이동건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