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음모론과 조중동의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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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8-12-12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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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섬 이상국의 '편집의눈']IMF와 관련한 다양한 시각들, 영화와 정치와 경제의 함수 총정리




# 한 기자를 격분케 한 '영화의 사실왜곡'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기자가 불을 붙였습니다. 2018년 12월4일에 올린 'IMF탓 망했다?...국가부도의 날은 팩트 파산의 날'이란 공격적인 제목으로 나간 칼럼은 영화가 시종일관 사실왜곡으로 이어져 감상에 몰입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을 관객들이 '웰메이드 팩폭'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면서, 그는 사실을 바로잡아주겠다고 나섰죠.

그의 주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고의(故意) IMF행은 없었다. 당시 재경원 관료들은 어떻게든 IMF로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관료의 사익을 추구하려고 어느날 갑자기 IMF행을 결정한 게 아니다. 오히려 강경식 전 부총리와 김인호 전 수석은 IMF행을 지연시킨데 따른 책임을 추궁받았고, 환란주범으로 감옥에 가기까지 했다.

IMF 때문에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가 주는 교훈을 비켜가는 일이다.  불난 집에 달려온 소방차한테 '소방차 위기'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IMF위기란 말 자체가 잘못됐다. 불끄러 온 소방관이 귀중품을 물에 적셨다해도 소방관 도움으로 불을 끈 것은 여전한 사실이다
.(이 말은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특별대책반이었던 허경욱 전 기획재정부 차관의 말을 빌린 것입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 문대통령의 IMF 관련 국회연설 직후에 영화촬영이 시작됐다?

안기자는 채권자 IMF의 가혹한 요구 속에 미국의 음모가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반론을 내놓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묘한 시점 하나를 들이댑니다. 2017년 11월 국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연설을 합니다.

"1997년 11월21일 IMF구제금융 신청으로 국민은 피눈물 나는 세월을 견디고 버텨 위기를 극복해냈고 국가경제는 더 크게 성장했지만 국민의 삶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영화가 촬영된 것이 대통령의 연설이 있은 직후라고 합니다. 

안혜리기자는 이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이렇게 정리해놓고 있습니다.

"고용불안과 빈부격차 같은 작금의 모든 경제문제는 IMF구제금융 탓이다. 재벌과 결탁한 경제관료가 노동자를 정리해 기업을 살리겠다는 의도로 일부러 IMF를 끌어들여 서민의 고통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문재인 정부에까지)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이 됐다."

영화의 메시지가 거의 정확하게 대통령의 발언과 맥을 같이 하면서, 현재의 경제적 난국은 그 뿌리가 IMF의 잘못된 해법에서 기인한다는 논리를 전파하려는 '영화적 음모'라는 주장입니다.

# 영화사 대표까지 찾아가 따진, 기자의 열성 팩트체크 

안기자는 영화의 제작을 결정한 영화사의 대표(이유진)를 찾아가 해명을 듣는, 맹렬한 팩트체킹까지 했군요. 이대표는 "난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고 영화도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보였다면 영화를 못만든 것일 뿐"이라고 겸손과 방어를 겸한 답변을 내놓았죠. 

안기자는, 실존인물을 떠오르게 하는 특정인을 지나치게 악인으로 묘사하고 IMF행을 선동적으로 해석한 이유에 대해선 이대표가 답을 내놓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런 직격탄 질문에는 누구라도 답을 하기가 곤란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한편 이런 안기자의 칼럼이 나가자, 일부 욕설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발뉴스의 하성태기자 같은 분은 아예 이 칼럼을 해부하면서 역공을 시도하기도 했죠. 안기자의 주장이 '딴죽걸기'라고 비판하지만, 명쾌한 논거를 대지는 못하는 듯 합니다. 21년전 사건에 대한 주장을 반박하는 일은, 의욕에 걸맞는 상당한 내공과 확신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는 듯 합니다.

# 한은과 재경원의 입장이 뒤바뀐 건, 모피아 공격용?

같은 날 새벽에 이 영화에 대한 기사를 올린 신문은 조선일보의 조선비즈였습니다. 이종현, 연선옥 기자가 무려 10가지 항목으로 팩트체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중앙일보 안기자의 주장을 꼼꼼히 뒷받침해주는 듯 합니다. IMF행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 쪽은 한은이었고, 최대한 미루려고 한 쪽은 재경원이었다고, 영화 속의 전도된 입장을 비판합니다. 

이경식 당시 한은총재는 김영삼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IMF로 서둘러 가야한다고 재촉했고 IMF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식의 말도 했다고 하네요. 한편 김석동 당시 재경원 외화자금과장은 IMF직후 인터뷰에서 "끝까지 IMF구제금융을 신청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밝힙니다.

조선일보는 영화가 이렇게 실제의 입장을 뒤바꾼 것은 모피아로 불렸던 경제관료에 대한 불신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우석훈이 쓴 소설 '모피아'에는 한국은행이 모피아와 재벌의 결탁을 막는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는데, 영화도 그런 분위기를 낸 것 같다고 진단하네요.

# 미국이 IMF에 입김을 넣었다는, 주인공의 폭로 장면에 피씩 웃었다는 관료들

그다음 IMF와 미국 음모론. 영화속에서 한시현은 미 재무차관이 IMF협상이 진행중인 호텔을 방문한 사실을 찾아내고 IMF총재를 압박하는 장면이 나오죠. 이 대목에서 기재부나 한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전합니다. IMF는 전세계의 모두를 위한 국제기구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G7국가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합니다. 미국의 지분율이 17.4%로 가장 많고요. 이들 회원국이 구제금융 제공국가의 채권국이 됩니다. 당연히 최대 지분을 지닌 미국이 협상장에 왔던 거죠. 영화에서처럼 재무차관이 아니라 차관보인 티모시 가이트너가 참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동아일보는 좀 다른 얘기를 합니다. 당시 재경원 제2차관으로 협상팀 수석을 맡았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외환위기 징비록'이란 책에서 "당시 미국 재무부의 데이비드 립턴 차관이 IMF협상팀과 같은 힐튼호텔에 묵으며 협상팀을 만나는 장면이 한국 협상단에 목격됐다. 이후 그와의 대화를 통해 자본시장 개방 등 IMF의 조건이 실은 미국의 주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미국 음모론은 정덕구의 책을 참고한 내용

영화 속 미국음모론은 이 책을 참고했을 겁니다. 조선일보가 말한 포인트가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정덕구이사장이 느끼기엔 미국 재무부 차관이 자본시장 개방 등의 입김을 넣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팩트일 것입니다. 하지만 IMF 당시 총재가 미국인인 스탠리 피셔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배후에 숨은 게 아니라 공공연히 '미국측의 의도'를 드러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조선일보는 영화 속에서 '대우가 위험하다'고 한 대목도 사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IMF 당시 대우그룹은 위기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구제금융 신청 이후에 쌍용차를 인수하는 등 몸집을 불렸다고 합니다. 당시 위기에 처한 기아차를 대우가 인수하는 방안이 논의될 정도였다는 겁니다. 대우그룹이 진짜 위기에 빠진 건 1999년이라고 말합니다. 이 밖에도 한시현 한은 통화정책팀장이 IMF협상장에 등장하여 재경원 차관과 각을 세우며 논쟁하는 일은 허구이며 한은총재 밖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밝힙니다.

# 2018년 현재의 경제를 연결시킨 영화 뒷부분

이 영화는 화면이 블랙아웃하면서 끝나는 듯 하다가 IMF 21년 뒤인 현재를 비춥니다. 1500조원으로 늘어나 있는 가계부채가 또다른 국가 위기의 도화선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영화가 과거 보수정권의 실정(失政)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로 이어진 경제 위기의 실태를 환기함으로써 메시지를 확장합니다. 영화의 '국가부도 위기'가 현실 너머의 영화만이 아니라는 경고를 보태는 거죠. 여기엔 현 경제상황에 대한 정책들의 우왕좌왕과 그 심각성에 대한 안일한 인식을 찌르는 맛이 살짝 들어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어퍼커트 경고'를 담았다고나 할까요? 

이건 그런데, 일리가 있는 주장일까요?

여기에 대해 중앙일보 안혜리 기자는 이런 비판을 담아놨군요.

# 부실채권 통계를 감춘 김영삼, 고용 통계를 문제삼은 문재인

"위기를 감추기에 급급한 모습도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개발연구원 최범수 전문위원은 은행대출의 15%가 6개월 이상 연체된 부실채권이라는 통계를 내고 사전에 경고했다. 하지만 정부는 이 자료가 언론에 흘러나가자 이후 부실채권 관련 통계를 아예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사실을 전하면서 바로 문재인 정부의 얘기를 합니다.

"문정부는 원하는 경제통계가 나오지 않자 아예 통계청장을 갈아버렸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장성민 전의원은 영화를 보고 페북에 이런 글을 써놨다고 하네요.

"위정자들의 오도된 경제현장 읽기는 잘못된 경제정책의 시작이자 국가부도의 날 예비초청장이다. 문대통령에게 잘못된 경제정책이 얼마나 국가와 국민에게 큰 재앙인가를 직접 목격해보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

# 현재 가계부채는 규모가 크긴 하지만, 담보와 신용평가가 이뤄진 '건전 대출'


동아일보는 현재의 경제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를 우려해야할 정도냐는 물음에 "실제 가계부채는 경제의 가장 큰 위험요소 중 하나이지만 현재의 가계부채가 1997년과 같은 위기로 직접 이어질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의 말을 전하고 있네요.

조선일보 또한 금리인상기에 본격적으로 접어들면 가계가 감당해야할 이자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크고 급증한 가계빚이 소비여력을 축소시키면 경제활력이 떨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문제의식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1997년 같은 위기를 촉발할 것이라는 우려는 과도하다고 합니다. 당시 위기는 만기가 돌아온 단기외채를 못갚아 생겨난 사태였고 지금의 가계부채는 외화 부족과는 큰 관련이 없다는 거죠. 

당시 금융사들은 채무자에 대한 적정한 평가 없이 기업에 마구 돈을 빌려줘 자금경색이 일어났으나, 지금의 경우 가계부채가 늘어나긴 했지만 담보와 신용평가가 예전과 달리 비교적 깐깐하게 이뤄진 대출인지라 부실 위험이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 한번은 짚고가야할 IMF의 기억을 대중에게 소환한 영화의 미덕


IMF를 다룬 영화는, 많은 기자들에게 20년 전의 수첩과 기억을 꺼내게 했을 겁니다. 당시 긴박한 상황을 취재했던 기록들을 뒤져, 영화의 구석구석과 맞추며 팩트를 따져봤을 겁니다. 저 기사들은, 엄연했던 우리의 아픈 과거를 끄집어낸 영화에게 기자의 본능으로 그때의 사실과 다른 점을 지적해주고 싶었을 그 마음의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21년전 IMF가 우리 경제의 생태계를 나쁜 방식으로 바꿔놨다는 충격적 메시지는, 굳이 정권의 유불리를 따진 것이라기 보다는, 영화가 지녀야할 긴장감의 고압선 같은 것들을 만들고 싶었던 욕망으로 읽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영화 덕분에, 옛 취재수첩들이 쏟아져 나와 이면의 다양한 진실과 복잡한 당시 상황들을 새로운 세대들까지 제대로 알게 하는 효과가 있었으니, 지금쯤은 꼭 있어야 할 '시간적·사회적 여과지'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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