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연연(戀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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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입력 2018-11-0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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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가수트라 I.37b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욕심
욕심은 자신을 응시(凝視)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병이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자신의 주위를 ‘욕심’이라는 왜곡된 시선으로 본다. 욕심은 마치 색안경과 같아서, 훈련받지 않은 얕은 생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왜소하고 편견으로 무장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시각이 자신과 다르다는 점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옳으며, 남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간주한다.

응시는 자신이 관찰하려는 대상을 가만히 오랫동안 보려는 용기다. 가만히 본다는 의미는 그 대상에 온전히 몰입하여, 그 대상의 시선으로 그것을 관찰하는 나를 보려는 반전(反轉)이다. 응시는 나를 무아(無我)로 진입시킨다. 이 노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조건들이 있다. 자신이 그 대상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 환경이란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시간과 장소다. 이 진공(眞空)의 장소는 심중산속이나 사막일 수도 있지만, 출근길 지하철이나 음식을 장만하는 부엌일 수도 있다. 진공의 장소는 온전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외부의 귀나 눈이 아니라, 진아(眞我)를 온전히 바라보고 그런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상의 구별된 시간이자 공간이다.

연연
나를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바로 ‘연연(戀戀)'이다. 연연이란 나에게 다가온 지금 이 순간과 내가 서있는 이 장소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헛된 바람이다. 총알과 같이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지금 눈앞에 엄연히 다가온 현재를 해석하려는 어리석음이다. 어제는 지나갔고 오늘은 지금 여기 내 눈앞에 서 있다. 지금 이순간은 나의 시선과 행동을 기다리는 운명(運命)이다. 이 순간은 나의 심연에 숨어있는 온전하고 정직한 나를 발굴(發掘)하기 위한 삽과 곡괭이다.

연연은 그 보물이 묻힌 장소를 위장하고 나를 정도에서 이탈하도록 부추기는 유혹이다. 우리는 새롭고, 이상하고, 놀랍고, 충격적인 지금을 구태의연하고 습관적이고 예상가능하며 진부한 어제의 경험으로 반기려 한다. 오늘이 어제의 지루한 연속인 이유는 과거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그 연연은 인생에서 한번만 주어지는 지금을 유기하는 어리석음이다. 우주가 빅뱅으로 창조된 138억년 전이나,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한 30분 전이나,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모두 순간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50억년 후에는 이 지구도 힘이 없어 공전과 자전을 멈춘다고 한다. 만일 그 시점에 어떤 생명체가 지구에 남아 있다면, 그 생명체도 지구의 시간, 즉 188억년을 회상하며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요가수련자가 삼매경으로 들어가는 데 방해하는 괴물이 바로 이 연연이다. 이 연연은 마당에 초연하게 자리 잡은 소나무를 옆에 있는 구상나무와 비교하려는 억지이며 작년의 소나무를 기억하여 기준으로 삼고 호불호를 가리려는 어리석음이다. 마당의 소나무가 의연하고 멋있는 이유는 옆에 있는 나무와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고, 작년 자신의 모습을 연연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나무는 지금도 자신의 솔잎을 하염없이 떨어뜨리며, 매순간 자신을 변신하고 혁신한다.
 

'발레 검은 초원에 출현한 에릭 호킨스와 마사 그레이엄' (1946년, 뉴욕 필리머스 극장, 마사 그레이엄·1894-1991년)은 미국 현대무용가로 '회화의 피카소'처럼 '무용의 그레이엄'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다. 무용은 감정의 표현예술이 아니라 움직임의 표현예술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대 위에서나 일상에서 완벽한 몸의 움직임을 수련한 무용의 구루였다.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요가수트라' I.37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삼매경에 들어가기 위한 실질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을 소개한다. ‘구루’를 만나는 것이다. ‘구루’는 언행이 일치된 고양된 인간으로 항상 자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수련하는 사람이다. 문하생은 구루의 구도자적인 자기변신의 수련을 바라보며, 배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37에서 그런 구루의 조건과 구루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비타라가 비샤얌 바 치탐.” (vītarāga viṣayam vā cittam)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생각을 욕심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구루)에 온전히 향해있을 때 (삼매경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구루’라는 단어는 없지만, 구루를 상징하는 산스크리트어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비타라가(vītarāga)'다.

‘비타라가’는 흔히 ‘욕심이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혹은 극복한 자’란 의미다. 이 단어는 ‘-을 제거한, -을 정복한’의미를 지닌 ‘비타’와 ‘욕심, 집착’을 의미하는 ‘라가’의 합성어다. 라가는 ‘물들다, 색이 들다’란 의미로 인도-유럽어 어근 ‘렉(*reg-)'에서 유래했다. ‘라가’는 힌두교와 불교 안으로 들어와 부정적인 의미로 ‘욕심, 색욕, 욕망’과 같은 마음의 독(毒)으로 물든 상태다. 이 상태의 특징은 순간적이며 육체적인 자극을 일으킨다. 라가의 동사형인 ‘라즈(raj)'는 ‘흥분하다’란 의미다. 육체의 흥분을 자극하는 것들은 그것을 경험한 인간을 중독시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라가는 요가수련자의 생각을 혼란시키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중독을 일으키는 욕심이다. 이 욕심은 곧 고통으로 변한다.

구루는 그런 욕심을 극복하여 자유로운 자다. ‘비타라가’의 첫 부분인 ‘비타’는 ‘길’을 의미하는 명사 ‘이다(ita)'와 그 길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의미하는 접두어 ‘비(vi-)'의 합성어로, 자신이 과거에 습관적으로 가던 길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상태를 뜻한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먼 자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길로 착각한다. 요가수련자는 욕망의 노예가 된 자신을 응시하고, 그런 자신을 유기하고 새로운 자신을 창작하기를 수련한다. ‘비타라가’는 철학자 니체의 생각을 빌리자면, 그런 욕심에 찬 자신의 존재를 부인(否認)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신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더 나은 자신으로 극복(克服)한 자다. 스승이 스승인 이유는, 그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수련자이기 때문이다. 구루는 오랜 응시를 통해 깨달은 생각을, 입으로 발설하고, 그 발설한 내용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수련하는 자다. 카리스마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온전히 실천할 때 서서히 등장하는 아우라다.

지향
요가수련자는 욕심을 극복한 구루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구루는 요가수련자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구루는 욕심에 목을 매고, 욕심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과거의 인간을 극복한 자이기 때문에, 요가수련자에게 삶의 모델이며 표본이 된다. 구루는 요가수련자가 훈련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자신의 삶에 그대로 품고 있다. 구루가 구루인 이유는 요가수련자가 밟고 가야할 길과 단계를 자신의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자가 구루에게 향하는 마음을 ‘비샤야(viṣay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비샤야는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오감이 일어나는 장소들이다. ‘소리’를 감지하는 귀, 물건의 질량을 감지하는 피부, 색과 형태를 감지하는 눈, 맛을 감지하는 혀 그리고 냄새를 감지하는 코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다름을 감지하는 경계의 장소에서 희로애락을 느낀다. 요가수련자는 자신의 오감을 온전히 구루에게 집중하여, 새로운 자신을 만들기 위해 누력해야 한다. 그는 구루의 말과 행동을 오감을 통해 감지하고, 구루의 모습을 지향한다. 구루의 모습은 태권도를 배우는 입문자에게 교본(敎本)이다. 요가수련자는 구루의 마음가짐, 말 가짐 그리고 행동 가짐을 통해 배운다. 요가수련자는 아직 수련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에 집중할 수 없다. 그는 구루의 모습을 통해, 요가수련의 효과를 확인한다. 무엇을 지향하는 이 장소가 바로 목표점이다.

학생
인간은 짧은 인생에서 자신에게 유일무이한 임무를 배우기 위해 태어난 학생이다. 그는 언젠가 구루가 지향하는 그 목표와 자신이 하나가 될 것이다. 인생에 있어 무엇이나 ‘스승’이다. 내가 음식을 대하는 방식, 내가 앉아 있는 모습, 내가 걸어가는 모습, 내가 호흡하는 방식, 내가 몸과 마음, 에너지와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 이 모든 것이 ‘구루’다. 보통 학생들에 스승은 학교에 있지만, 탁월한 학생들에게 스승은 자신의 일상에 있다. 나는 아직도 과거라는 욕심에 안주하는가? 나는 구루를 책 안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글에서 찾는가? 혹은,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극복하기 위한 스스로의 ‘구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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