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한국당을 위한 ‘협치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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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7-10-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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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동신대교수(정치학)]



한국당을 위한 ‘협치 입문서’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다음달 6∼7일로 예정된 국회 운영위의 청와대 국정감사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7∼8일)과 겹치니 청와대가 여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이다. 야당이, 그것도 ‘적폐 전쟁’의 와중에 이런 제의를 한 게 신선하다. 민주당의 반응도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하니 성사됐으면 한다. 손님을 불러놓고 주인이 다른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면 예의도 아닐 터. 더욱이 25년 만에 국빈으로 오는 손님 아닌가. 일각에선 ‘야당의 저의’ 운운하나 이런 게 작지만 의미 있는 협치의 시작이다.

이 정권 출범 이래 협치보다는 대치(對峙)가 일상화된 건 사실이다. 인사(人事)를 비롯해 곳곳에서 코드의 편린을 드러낸 집권세력에 1차적 책임이 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 그렇더라도 협치의 문을 완전히 닫아선 안 된다. 여야가 어떻게든 그 끈을 쥐고 있는 게 우리사회의 분열 심화를 막는 길이다. 협치를 하려면 협치가 작동할 수 있는 영역을 우선 찾아야 한다. 협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라는 얘기다. 그래야 다른 영역(현안)으로 번져나가는 파급효과(spillover effects)를 기대할 수 있다.

한·미 FTA가 바로 그런 대상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다들 피해가기를 바랐지만 FTA 개정협상은 받아놓은 밥상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때 협정의 폐기를 지시할 만큼 미 정부의 입장은 완강하다. 내년 초 시작될 협상에서 거칠고 집요한 공세가 예상된다. 일각에선 “우리도 국익을 우선한 당당한 대응을 하라”고 주문한다. 최악의 경우 한·미 FTA가 폐기돼도 손해가 큰 쪽은 미국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협상전략으로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한·미관계 전반을 아우르는 총체적이고 현실적인 처방은 못 된다.

교역만 보더라도 우리 측의 손실은 막대하다. 현대경제연구원은 FTA 재협상으로 관세율이 조정되면 향후 5년간 자동차, 기계, 철강에서만 최대 170억 달러의 수출 손실을 예상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20년까지 4년간 수출이 130억1000만 달러 감소하고 12만7000여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무역수지보다 더 걱정되는 건 한·미동맹이다. 한·미 FTA는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한미동맹을 떠받치는 두 축(軸)이다. FTA 체결로 정치·군사동맹에 경제동맹이 더해짐으로써 한·미동맹은 비로소 완성된 가치동맹(價値同盟)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런 FTA가 훼손된다면 우리는 교역 이상의 것을 잃을 수 있다.

사정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의 징고이즘(jingoism·호전적 국수주의) 앞에서 다들 전전긍긍하지만 우린 다르다. 한국은 전후(戰後), 미국 주도 하의 세계질서(팍스 아메리카나) 구축과정에서 미국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추구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성공사례임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나라다. 100여 신생 독립국가들 중 한 세대 만에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는 우리뿐이다. 미국도 늘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미국이 자국(自國) 백인노동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70년 혈맹(血盟)을 버린다면 소탐대실이 따로 없다. 반세기가 넘도록 주한미군이란 저렴한 비용으로 동북아의 한 패자(霸者) 역할을 해온 미국이 정녕 이를 포기할 생각이 있는지도 우리는 차제에 물어야 한다.

FTA 개정협상에서 우리가 기대야 할 ‘언덕’은 여기다. 협상에선 고도의 전문성으로 승부하고, 용의주도한 대응으로 디테일에서 밀리지 않아야겠지만 큰 틀에선 이런 역사 인식과 논리로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980년대, 미국이 불공정 무역관행을 바로잡겠다며 슈퍼 301조로 우리를 압박했을 때도,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속에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이 설복(說伏) 작업을 누가 가장 잘할까? 단연 자유한국당이다.

한·미 FTA의 정신과 취지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해온 한국당의 이념이나 정책과 궤를 같이한다. 체결은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이뤄졌지만 일관되게 이를 지켜온 건 한국당이다. 지금의 여권은 오히려 부정적이었다. 체결 당시에도 상당수가 단식농성을 할 정도로 거세게 반대했다. 물론 그동안 많이 바뀌긴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정권 안팎엔 지금도 ‘미국’ 하면 공연히 적의(敵意)를 느끼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들에 비해 한국당은 미국에 관한 한 상대적으로 편안하고 익숙하다. 전통적으로 미국 조야에 우군(友軍)도 많다. 공화당 쪽엔 더 많다. 이런 이점을 살려 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한국당의 이름으로 ‘FTA 지원 방미단’을 워싱턴에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홍준표 대표는 지난 5일 “반미를 외치면서 우리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 한·미 FTA를 극렬하게 반대한 민주당과 문재인 대통령이 거꾸로 국익 시험대에 올랐다”면서 “좌파 광신도들이 이번에도 FTA 폐기를 광화문 촛불로 주장하는지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는 2011년 11월 한나라당 대표로 FTA비준안 국회 통과를 주도했을 때 자신을 “매국노”라고 했던 사람들에 대해 아직도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고소해할 건 아니다. 큰 정치인의 풍모도 아닐뿐더러 적폐와 별 관련 없는 분야에서 또 다른 적폐논쟁만 부추길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한·미 FTA는 전략핵무기 배치문제와는 다르다. 후자는 찬반이 명확하게 갈려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우나 전자는 여야 모두 “지켜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개정협상을 기회로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와 같은 독소조항들을 손봐야 한다는 데도 한목소리다. 그렇다면 협력해야 한다. 그게 협치다. 협치를 실천하기에 이보다 좋은 영역이 없고 현안이 없다. 이번 협상이 개정협상이냐, 재협상이냐 따위의 지엽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다.

사족이지만, 이렇게 해서 한·미동맹이 튼튼해지고,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보수가 다시 살아난다면 한국당이 간절히 원하는 실지(失地) 회복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한·미 FTA는 다른 누구의 일도 아닌, 정통보수를 자임하는 한국당의 일이다. 주도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당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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