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완의 월드비전] 종전을 설계하는 제3의 손 …파키스탄의 계산된 중재

 
아심 무니르 육군참모총장 사진AP연합뉴스
아심 무니르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 [사진=AP연합뉴스]
 

'최후통첩 시한'을 약 90분 앞두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일 트루스소셜을 통해 이란에 대한 폭격과 공격을 2주간 유예한다고 밝혔다. 제3국인 파키스탄의 중재를 수용한 것이다. 아바스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도 이날 파키스탄 총리와 육군참모총장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에 감사한다"고 화답했다. 며칠 후 미국과 이란의 고위급 대표단은 이슬라마바드에서 종전 협상에 나섰지만, 이란의 농축 우라늄 비축 처리 문제와 호르무즈 해협 통제 문제 등에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이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다시 높이던 트럼프 대통령은 22일 휴전을 사실상 무기한 연장했다. 이때도 미국 측은 휴전 연장이 파키스탄의 요청에 따른 것임을 공개했다. 미국과 이란 간 공식 협상의 재개 여부가 아직 안개 속이지만, 양국 간 막후 채널을 연결하는 파키스탄의 중재로 전쟁은 종전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한때 9·11 테러를 주모한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준 나라로 외면받았던 파키스탄이, 미국과 이란 사이에서 핵심적인 평화 중재자(peace broker) 역할을 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파키스탄이 중재에 적극 나서는 복합적인 이유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핵보유국 파키스탄은 국경을 맞댄 이란과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란은 1947년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을 가장 먼저 승인한 나라다. 이후 양국은 오랫동안 경제·외교적 유대를 이어오고 있다. 파키스탄은 1979년 미국과 이란의 단교 이후 워싱턴 내 이란 이익대표부를 맡아오기도 했다.  

트럼프는 자신의 임기 1기 때 파키스탄을 "거짓과 기만" 외에는 미국에 아무것도 준 것이 없는 불성실한 나라라고 일축한 바 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트럼프 대통령 측근들과의 관계 구축에 적극적으로 공을 들인 결과, 단기간에 미국 정부의 신뢰를 받는 우방으로 부상했다. 

파키스탄이 중재에 적극적인 이유의 하나로 이번 전쟁 장기화가 자국 경제와 안보에 미칠 우려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파키스탄은 석유와 가스 대부분을 중동 국가들에 의존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파키스탄은 연료 수입에 직격탄을 맞았고, 걸프 지역에 거주하는 수백만 파키스탄 노동자들의 송금도 위협받았다. 전쟁이 확산될수록 파키스탄의 경제적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지는 구조였다. 파키스탄의 중재는 생존과 국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국내 정치적 압박도 컸다. 국내 인구의 15~20%를 차지하는 시아파 무슬림들은 이란의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사망 직후 격렬한 반미 시위를 벌였다. 카라치에서는 시위대가 미국 영사관을 습격하려 하면서 최소 10명이 사망했다. 이슬라마바드는 종파 갈등이 국내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켜야 했다.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도 파키스탄을 옥죄었다. 2025년 9월 이슬라마바드는 리야드와 나토식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이는 사우디가 이란의 걸프 인프라 공격에 대한 보복을 원할 경우, 파키스탄이 자동으로 군사적 개입 압력을 받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중재자 역할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가장 우아한 출구였다.

아심 무니르 — 트럼프와 직접 채널을 연 군부 실세

이번 중재의 실질적 설계자는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인 아심 무니르였다. 그의 등장은 파키스탄 외교의 구조적 특성, 즉 군이 외교를 주도한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무니르와 트럼프의 관계는 2025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파키스탄이 2021년 카불 아비게이트 폭탄 테러의 용의자를 체포해 미국에 넘겼고, 이것이 양측의 첫 신뢰 기반이 됐다. 그러나 관계가 본격적으로 돈독해진 것은 2025년 5월의 인도-파키스탄 4일 전쟁이었다. 트럼프는 자신이 이 전쟁을 중재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파키스탄은 이를 인정했다. 인도가 반발하는 가운데서도 이 사건은 트럼프와 무니르 사이에 직접적인 소통 채널을 열었다.

이후 무니르는 워싱턴을 두 차례 방문했고, 트럼프는 그를 공개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파키스탄 육군 원수"라고 칭찬했다. 2025년 6월 트럼프는 전례 없는 오찬에 무니르를 초대하며 "파키스탄인들은 이란을 매우 잘 안다"고 언급했다. 이는 파키스탄의 중재 역할에 대한 비공개 승인이나 다름없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는 경제였다. 무니르는 트럼프 행정부의 중동 특사 스티브 윗코프 가문이 관여한 암호화폐 협약을 파키스탄 정부와 체결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워싱턴포스트 등의 보도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윗코프뿐 아니라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와도 비즈니스 관계를 구축했다. 이는 단순한 국가 대 국가의 외교를 넘어, 트럼프 내부 서클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촘촘히 짠 전략이었다.

지난 3월 하순 트럼프가 이란 에너지 인프라 공격을 5일간 유예한다고 발표한 직후, 무니르는 트럼프와 직접 전화 통화를 나눴다. 이 채널은 이후 휴전 협상의 핵심 라인이 됐다. 최후통첩 시한이 다가오던 4월 8일 밤에도 무니르는 밴스 미국 부통령, 스티브 윗코프 중동 특사, 아라그치 이란 외무장관과 동시에 접촉하며 마지막까지 협상을 이어갔다.

공개 외교의 얼굴 샤리프 총리

총리 셰바즈 샤리프는 무니르의 물밑 작업을 공개 외교로 전환하는 역할을 맡았다. 파키스탄 특유의 민군 이중 외교 구조에서 샤리프는 국제 사회를 향한 '공식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샤리프는 이슬라마바드를 협상 테이블로 제공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3월 23일에는 트럼프, 아라그치, 윗코프를 모두 태그하며 X(구 트위터)에 중재 의사를 밝혔다. 이란 대통령 마수드 페제시키안과는 3월 29일까지 닷새 동안 두 차례 장시간 전화 통화를 나눴다.

결정적 순간은 4월 8일 최후통첩 시한 약 5시간 전이었다. 샤리프가 공개적으로 미국과 이란 양측에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럼프의 휴전 발표가 나왔다. 샤리프는 즉각 이를 "파키스탄의 가장 중요한 외교적 성과"로 선언하며 양측 대표단을 4월 11일 이슬라마바드로 초청했다.

이샤크 다르 — 외교 채널의 실무 설계자

부총리 겸 외무장관 이샤크 다르는 중재의 실무 설계자였다. 전쟁이 시작되던 2월 28일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슬람협력기구(OIC) 회의에 참석 중이었고, 공격 발생 몇 시간 만에 아라그치에게 연락해 연대 의사를 전했다.

다르는 이후 리야드, 베이징, 이슬라마바드를 오가며 다자 외교의 골격을 세웠다. 특히 3월 18일 사우디 주도로 열린 12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튀르키예와 함께 이란을 더 강하게 압박하는 문구 채택을 막아냄으로써 이슬라마바드의 중립성을 지켰다. 이 회의에서 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튀르키예·이집트로 구성된 4자 협의체가 출범했다.

3월 26일에는 미국이 제시한 15개 항목의 협상 제안을 파키스탄이 이란에 전달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파키스탄은 단순한 '조언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메시지 전달자이자 협상 구도의 설계자임을 공식화했다.

베이징 방문에서 다르는 왕이 중국 외교부장과 함께 휴전, 민간인 보호, 호르무즈 해협 회복, 유엔 역할 강화 등을 담은 5개 항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중국을 무대 위로 끌어들임으로써 협상의 다자적 정당성을 높인 것이다.

역사의 데자뷔

파키스탄의 중재 노력이 실질적인 평화 협상으로 이어지든 그렇지 않든, 파키스탄은 이미 자국에 유리한 외교적 쾌거를 이뤄냈다. 2026년 이란 전쟁 발발 후 파키스탄의 외교적 행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세기 전 파키스탄이 세계사의 흐름을 조용히 바꾼 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1년, 세계는 냉전의 절정기를 지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의 공포 속에 대립했고, 중국은 1949년 공산화 이후 국제 사회로부터 사실상 고립된 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조차 타이완에 내준 상태였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의 화해가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미·중 사이에는 공식 외교 채널이 전무했고, 어느 쪽이 먼저 손을 내밀더라도 국내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했다.

이 '불가능한 접촉'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바로 파키스탄이었다.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 야히야 칸은 냉전 구도 속에서 독특한 이중 외교를 구사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는 서방 진영의 일원이면서도, 중국과는 1963년 국경 협정 이후 꾸준히 우호 관계를 발전시켜 온 몇 안 되는 나라였다. 인도와의 구조적 대립 속에서 파키스탄은 인도와 긴밀한 소련, 그리고 인도의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동시에 관리해야 했고, 그 결과 이념을 초월한 실용 외교의 전통을 쌓아왔다.

키신저는 이 채널을 활용하기로 했다. 1971년 7월, 그는 파키스탄을 방문하는 공식 일정 도중 복통을 이유로 언론 앞에서 사라졌다. 실제로는 이슬라마바드가 제공한 파키스탄 항공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극비 이동했다. 파키스탄 측은 이 비밀 여정의 모든 물류를 책임졌다. 항공편 제공, 신원 위장, 중국 측과의 사전 조율, 그리고 철저한 보안 유지까지. 베이징에서 키신저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이틀간 마라톤 회담을 가졌다. 그로부터 약 7개월 뒤인 1972년 2월, 닉슨은 베이징을 직접 방문해 마오쩌둥과 역사적인 악수를 나눴다. 20여 년간의 미·중 적대 관계가 종식되는 순간이었고, 냉전의 지형 자체가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서 파키스탄의 역할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야히야 칸 정부는 어떠한 공식 발표도 하지 않았고, 키신저 역시 초기 회고록에서 파키스탄의 기여를 최소화했다. 파키스탄이 역사의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국제 사회에 알려진 것은 수년이 지난 뒤, 키신저 자신이 1979년 출간한 회고록 <백악관 시절>에서 이를 인정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야히야 칸 정부가 공을 숨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71년은 파키스탄에게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해이기도 했다.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이 인도의 군사 개입 속에 분리 독립했고, 야히야 칸은 정권을 잃었다. 미·중 화해의 숨은 설계자였지만 국내에서는 패전의 책임자였던 셈이다.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혼란 속에서 외교적 공을 주장할 여유가 없었고, 미국 역시 파키스탄을 전면에 내세울 이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55년이 흐른 2026년, 역사는 묘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다시 한번 파키스탄은 두 강대국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자처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성공이 아니다. 핵보유국으로서의 전략적 위상, 이슬람 세계의 중재자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트럼프 시대 미국과의 재연결이라는 세 가지 축이 만나는 지점에서 파키스탄이 스스로의 역할을 재정의한 사건이다. 1971년 키신저의 베이징 행을 몰래 도운 나라는 그 공을 수십년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2026년, 이슬라마바드는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피스 보로커(peace broker)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진정한 시험대는 향후 미국과 이란의 협상 과정에서 파키스탄이 얼마나 실질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슬라마바드는 세계 외교의 지도 위에 굵직한 점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도 그 점을 지우지 못할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