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11시 32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신시아는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같은 시각 코스피는 2.76% 홍콩 항셍지수는 1.12% 하락하는 등 세계 주식 시장이 파랗게 질렸다. 금리 인상 우려, 인공지능(AI) 거품론, 미-이란 군사적 긴장이 세계 증시를 짓눌렀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린 허쉬만 리슨: 나의 [나]들'에 나온 작품 '신시아 주가 표시기'는 미국 다우지수, 코스피, 항셍, 영국 FTSE 등 세계 주가 지수의 실시간 움직임에 따라서 영상 속 여성 신시아의 상태가 달라진다. 주가가 오르면 쇼핑을 가고, 떨어지면 술을 마시거나 잠잔다.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금융 데이터가 신시아의 순간 순간을 좌우한다.
이번 전시는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인 린 허쉬만 리슨(85)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이다. 작가는 지난 60여 년간 기술, 정체성, 신체, 페미니즘의 관계를 탐구 해온 미디어 아트 선구자다. 대학 시절 생물학을 공부했던 그는 예술로 눈을 돌려 기존 미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실험을 이어왔다. 비디오, 레이저디스크, 인터넷, AI, 유전공학 등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예술적 매체로 실험해왔다.
전시를 관통하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다. 전시 제목 '나의 [나]들(First Person Plural)'처럼 작가는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닌, 기술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정체성에 주목한다.
'신시아 주가 표시기'는 이를 보여준다. 신시아가 등장하는 작은 영상 화면은 투명한 유리 구조물 안에 들어 있다. 신시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터넷으로 전달되는 주가 데이터다. 정보와 미디어 등 보이지 않는 외부 힘이 우리의 감정과 일상, 나아가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실제 삶에서도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냈다. 1973년 창조한 가상의 인물 '로베르타 브라이트모어'다. 금발 가발을 쓰고 화장과 옷차림, 말투, 몸짓을 바꿔 로베르타가 된 작가는 은행 계좌와 운전면허를 만들고 신문에 룸메이트 모집 광고까지 냈다. 가상의 인물이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실험한 것이다. 오늘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활동하는 모습과도 닮았다. 작가는 1978년까지 이 작업을 이어갔으나 정체성의 혼란과 신변의 위협 등을 겪은 뒤 이탈리아에서 엑소시즘 의식을 치르며 프로젝트를 끝냈다.
전시장에서는 작가가 로베르타로 변신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 '로베르타 만들기: 엘레노어 코폴라가 촬영한 영상'(1975)을 비롯해 '로베르타의 일기장에서 발췌한 손글씨 샘플'(1975), '로베르타와 방', '로베르타 구성 차트' 등을 만날 수 있다.
관람객이 직접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작품도 있다. '로나'(1979~1984)는 광장공포증을 앓는 여성 로나의 삶을 관람객이 리모컨으로 선택하도록 만든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이다. 관람객의 선택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작가는 화면을 단순히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치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바꾸는 매개체로 바라봤다.
이밖에도 '세 명의 가상 비평가', '히어로 샌드위치', '팬텀 림', '틸리', '사이버로베르타', '사이보그', '딥 컨택트','전자일기', '8번 방'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번 개인전에서는 영어에 기반한 작가의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 '로나', '딥 컨택트', '에이전트 루비'에 처음으로 한글 자막 및 서비스를 제공한다.
전시는 2027년 2월 21일까지 열린다.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며 작품 해설은 매일 오후 3시에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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