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도 칼럼] 다시 돌아온 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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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입력 2021-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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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사진=본인 제공]

“다 끝났다. 세계가 탈레반에게 졌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도주와 함께 탈레반의 카불 진입 소식이 전해지자 한 이란인이 트위터에 남긴 평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말 그대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집권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때문에 사라진 ‘우리에게 익숙했던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국제사회가 그토록 진절머리내던 잔혹한 탈레반도 보란 듯이 되돌아왔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반가울 리 없다.

탈레반은 ‘학생들’이라는 뜻의 파슈툰족 말이다. 동부페르시아어인 파슈툰어는 파슈토라고 하는데, 탈레반은 학생을 뜻하는 아랍어 ‘탈립’에 파슈툰어 복수형 어미 ‘안’이 붙었다. 이들 학생은 이슬람을 가르치는 기숙학교 마드라사에서 공부하는 신학생을 가리킨다. 그런데 학생들이 총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예전 우리나라의 학도호국단과 같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79년 12월 소련은 친소 정권의 붕괴를 막고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을 불러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됐다. 베트남전 패배의 아픔을 느끼고 있던 미국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미국 카터 행정부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소련판 베트남 전쟁을 선사할 기회”라고 했다. 미국은 반소련 항쟁을 돕고자 파키스탄에서 소련에 대항하는 무자헤딘(전사)을 훈련시키고 지원했다.

무자헤딘은 보통 성전으로 번역하는 ‘지하드’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무슬림 학자들은 지하드를 크고 작은 지하드로 나눠 본다. 작은 지하드는 이슬람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대항하는 것이고, 큰 지하드는 유혹에 맞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론적으로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역사 속에서 무슬림들은 선제공격도 지하드라고 했다.

1985년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던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공산당 서기장은 사실 철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때 미국은 무자헤딘에게 스팅어 미사일을 비롯해 무기를 지급하고 대소 항전을 독려했다. 결국 소련은 1989년 철수했다. 10년에 걸친 무모한 전쟁의 여파로 소련이 붕괴해 50년 냉전의 막이 내렸다. ‘소련판 베트남전’을 ‘악의 제국’에 선사한 미국은 즐거운 마음으로 손을 털고 나오면서 웃었다.

그러나 미국이 공들여 키운 무자헤딘에서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나왔다. 2012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은 미국이 싸우고 있는 적이 바로 미국 스스로 키운 자들이라고 고백했다.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말미인 1988년에 결성됐다. 탈레반은 이보다 늦은 1994년에 아프가니스탄 남부 중심지 칸다하르에서 조직됐다. 칸다하르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가 아프가니스탄 정복 전쟁 당시 성채를 건축한 곳이다.

1989년 2월 소련 철군 후 아프가니스탄 정정(政情)은 계속 불안한 상태였다. 1992년부터는 내전에 돌입했다. 지역별로 군벌이 발호하고 횡포가 만연하면서 정국은 혼란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이때 칸다하르에서 무자헤딘으로 대소 항쟁에 참가했던 마드라사 학생들이 도시 질서를 잡고자 자경단을 조직했다. 반소 항쟁 무자헤딘으로 활약하다 오른쪽 눈을 잃은 모하마드 오마르다와 현재 탈레반 정권을 이끄는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탈레반 건설의 주역이다.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통행료를 부과하는 무뢰한들을 소탕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 자경단이 탈레반의 시작이다.

탈레반은 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려던 파키스탄의 눈에 띄었다. 수도 카불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탈레반이 장악한 칸다하르는 파키스탄이 중앙아시아로 안전하게 교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탈레반을 적극 후원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내 마드라사와 연계해 세력을 넓혔고, 결국 1996년 북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역을 통제 하에 두면서 정권을 창출했다.

탈레반 이해의 핵심 요소는 파슈툰족과 데오반디다.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42%를 차지하는 파슈툰은 1500만~1600만명에 달한다. 게다가 1893년 영국이 그어놓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선(Durand Line)의 파키스탄 쪽에는 무려 4000만명이 거주한다.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은 지금까지 영국이 정한 국경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이는 파키스탄의 고민거리다. 미군의 탈레반 공세가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수세에 몰린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파슈툰 지역으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면 미군은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파키스탄 내 파슈툰은 탈레반 조직에 끊임없이 새로운 인력을 제공하는 샘물과 같다.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에도 탈레반 지도부는 파키스탄 쪽으로 도주해 본부를 꾸렸다. 빈라덴도 파키스탄에 몸을 숨겼다.

데오반디는 수니파 중 특히 하나피 법학파와 연관된 이슬람법과 사상 해석 학파다. 무굴제국 시기 인도는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하는 정치구조였다. 그런데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면서 무슬림은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다.

새로운 사회 환경에서 인도 무슬림들은 델리에서 북쪽으로 약 150㎞ 떨어진 데오반드에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 이슬람 교육을 시작했다. 이슬람을 가르친 데오반드의 마드라사를 데오반디라고 부른다. 서구 지배 시기 무슬림 지역에서는 반서구·반세속 경향의 이슬람원리주의 사상을 발흥했는데, 데오반디도 그중 하나다.

인도의 데오반디는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면서 파키스탄에 자리잡은 데오반디는 인도의 데오반디와는 사뭇 다르게 정치적인 영향을 받았다. 파키스탄 데오반디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문자적 해석에 더 기울었을 뿐 아니라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정치적 상황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인도의 데오반디 무슬림은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고, 무슬림만의 나라를 꿈꾸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나뉠 때 인도의 데오반디는 분리를 반대했다. 그러나 비정치적인 인도의 데오반디와 달리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데오반디는 자국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고 또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면서 정치운동 조직으로 변모했다.

특히 파키스탄 정보국은 과격한 이들 데오반디 무슬림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인도와 영유권을 다투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반인도 항쟁을 주도하는 이들이 바로 파키스탄의 데오반디다. 아프가니스탄 역시 파키스탄 데오반디의 영향을 받았고, 탈레반은 바로 이런 데오반디로 구성됐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데오반디가 인도와 달리 과격하고 급진적이며 극보수적인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이슬람 사상 때문이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자 크게 자극을 받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의 혁명이 자국과 무슬림 세계에 퍼지지 않도록 자국의 종교이념인 와하비주의를 전 무슬림 세계로 수출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데오반디는 바로 이런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고 이슬람 사상을 받아들였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나 부유한 집안의 똑똑한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드라사 입학을 선호하지 않았다. 탈레반 대다수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무료 기숙학교 마드라사에 진학했고 일반학교 학생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지 않다. 더욱이 문자주의적 신앙 해석 때문에 엄격한 원리주의 이슬람 사상에 함몰됐다. 그러다 보니 다종교 상황이나 종교 간 대화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탈레반은 2007년 10월 인류문화유산인 7m 높이의 7세기 바미얀 마애석불을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파괴했다. 이런 과격함 때문에 오늘날 인도의 데오반디는 자신들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데오반디와 전혀 다르다고 강조한다.

탈레반이 1996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할 때 최대의 희생양은 여성과 시아파 주민이었다. 여성은 교육을 받거나 직업을 구할 자유를 빼앗겼다. 부르카를 둘러쓰고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외출해야 했고, 모든 공적인 자리에서 배제됐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남성에 복종하고 가사에 전념해야만 했다. 2세 생산 도구이자 남성의 성욕을 만족시키는 존재에 불과했다.

시아파 무슬림은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이단이 아니라 불신자로 간주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대다수가 시아파인 하자라족은 탈레반 학정에 시달렸고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탈레반에게 시아파 주민을 건드리지 말라고 최근 이란이 경고한 것도 바로 탈레반의 잔인한 시아파 주민 학살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거칠고 야만적이었던 탈레반은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어서 국제사회와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다. 20년 후인 지금 카불을 장악하고 종전을 선언한 탈레반 2기는 유창한 영어로 20년 전과 달리 포용적인 이슬람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이슬람법(샤리아)의 틀 안에서 여성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미국과 다국적군에 봉사한 사람들도 용서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그러나 20년 전은 그냥 두고라도 지난 15일 카불에 진입할 때까지 최근 탈레반이 여성과 언론인, 시아파 주민들,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수니파 주민들을 다룬 행태를 보면 탈레반의 선언은 공개적이고 과감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다 세련된 탈레반 2.0으로 업그레이드된 것 같지만 말만 번지르르할 뿐 예전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지난달 8일 바이든 대통령은 탈레반이 쉽게 아프가니스탄을 넘볼 수 없는 이유로 20년 동안 무려 880억 달러(약 102조원)를 들여 양성한 30만 군대를 들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만에 무너졌다. 30만은 미국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수를 부풀린 서류상 군인이었을 뿐이다. 부패 때문에 카불 정부의 행정력은 카불 밖에서는 작동하지 않았고, 미국의 지원금은 탈레반의 주머니에 안착했다.

월급을 받지 못한 군인들은 미국이 철수를 선언하자 안전과 급여를 보장하겠다는 탈레반의 유혹에 무기를 건네줬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마음먹은 군경도 있었지만, 이미 상관이나 지역 행정 고위층이 탈레반에 항복한 상황에서 항전하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탈레반은 이렇게 다시 돌아왔다. 종교 문맹의 흉악한 확신범을 이제 국제사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몹시도 답답하다.
 

박현도 서강대 유로메나연구소 연구교수. [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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