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환율이 1986년 12월 이후 처음으로 달러당 163엔을 넘어선 가운데 엔화 가치가 40년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중동 정세 악화로 안전자산인 달러에 매수세가 몰린 데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진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적극재정과 일본은행(BOJ)의 더딘 금리 인상에 더해, 통화당국도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장의 인식이 엔화 약세를 더욱 부추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21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화 환율은 한때 달러당 163.24엔까지 오르며 1986년 12월 이후 약 39년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근 2주간 달러당 161엔대 초반에서 162엔대 중반 사이에서 움직이던 엔·달러 환율은 이날 지난 1일 기록한 162.84엔을 넘어선 뒤, 손절매성 엔화 매도가 잇따르면서 단숨에 163엔대로 상승했다. 22일 도쿄시장에서도 엔화 약세가 이어지면서 오전 한때 달러당 163.21엔까지 오르기도 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중동 정세 악화였다. 아사히신문은 미국과 이란이 공격을 주고받으면서 중동 정세가 한층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 달러 매수가 가속됐다고 전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친이란 예멘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선박을 겨냥해 해상봉쇄를 선언하면서 유가 상승과 엔화 매도세를 부추겼다고 분석했다.
유가 상승은 일본의 에너지 수입 부담을 키워 엔화 약세를 부추기기도 했다. 사카모토 아쓰히데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뉴욕 시니어 이코노미스트는 에너지 수입액 증가로 무역적자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중장기적으로 엔화 약세 압력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엔화 약세는 중동 불안에 따른 달러 강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지수는 전날보다 0.2포인트 오른 101대에 머물렀지만, 엔화는 39년 7개월 만의 최저치를 경신했다. 엔·유로 환율도 유로당 186엔대 초반까지 상승해 엔화 가치가 약 한 달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재개된 지난 2주간 엔화는 달러 대비 0.6% 떨어져 거래량이 많은 10개 주요 통화(G10) 가운데 가장 약세를 보였다. 금리 인상을 이어가는 뉴질랜드달러 등이 달러 강세 국면에서도 매수세를 탄 것과 대조적이다. 중동 불안이 엔화 하락의 방아쇠였다면, 낙폭을 키운 것은 일본 내부 요인이었다는 분석이다.
실제 엔·달러 환율은 지난해 10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 출범 당시 달러당 147엔 안팎이었지만, 적극재정에 대한 경계 속에 엔화 매도가 쌓이며 9개월 새 16엔 넘게 뛰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일본 정부가 21일 각의(국무회의)에서 확정한 ‘경제재정 운영과 개혁의 기본방침’(호네부토 방침)이 공개된 뒤, 정부가 엔화 약세를 사실상 용인한다는 인식이 시장에서 확산됐다고 전했다.
이번 방침에서는 지난해까지 담겼던 ‘재정 건전화’라는 표현이 ‘재정의 지속가능성’으로 바뀌었다. 정부는 6월 원안에 없던 일본은행의 독립성 존중 문구를 추가했지만, 시장에서는 엔저를 되돌릴 재료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오 고스케 발타리서치 대표는 “정부의 경제정책이 결과적으로 엔화 약세를 용인하는 방향인 데다, 통화당국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것으로 시장이 판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감세에 따른 재정 불안도 엔화 약세 요인으로 지목됐다. 마루야마 전략가는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압력을 뒤쫓는 데 그치는 '비하인드 더 커브' 우려가 엔화 약세를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 하락을 고려하면 식료품 소비세율을 1%로 낮추는 감세안이 추진될 가능성이 크지만, 호네부토 방침에서는 재원 마련 논의가 미뤄져 재정 악화 우려까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엔화가 39년 7개월 만의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시장 개입에 대한 경계도 커졌다. 가타야마 사쓰키 재무상은 22일 "필요하다면 언제든 적절하고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며 시장 개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만 구체적인 환율 수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면서 "정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타야마 재무상의 발언에도 외환시장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닛케이는 시장에서 개입만으로는 엔화 약세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냉소적인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일본 정부가 곧바로 시장 개입에 나설 명분도 마땅치 않다. 환율 수준은 높아졌지만 엔화 하락 속도는 비교적 완만하기 때문이다. 엔화의 향후 1개월 예상 변동률은 연 6%대 초반으로, 환율이 급등했던 이달 1일의 8%대보다 낮다. 닛케이는 현재와 같은 움직임만으로는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의 명분으로 내세워 온 '과도한 변동'을 주장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가와카미 아키히로 미쓰비시UFJ은행 애널리스트는 22일 도쿄시장에서 엔화 가치가 달러당 163.50엔 안팎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봤다. 시장에서는 달러당 165엔이 다음 고비로 거론된다. 닛케이는 일본 정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이어갈 경우 기업의 달러 매수와 저금리 엔화를 빌려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맞물려 엔화 가치가 달러당 165엔 안팎까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고 전했다. 이와시타 마리 노무라증권 수석 금리전략가는 일본은행이 물가 흐름을 확인하기에는 9월 금융정책결정회의 전까지 데이터가 부족하다며, 그 전에 엔화 가치가 165엔까지 떨어지면 정부가 시간을 벌기 위해 환율 개입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