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17)] 모나코, 한 여자의 빛과 한 사내의 욕망이 빚은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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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논설고문
입력 2020-03-2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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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숭호의 '북클럽 지중해 오디세이'(17)]모나코, 그레이스 켈리의 빛과 오나시스의 욕망이 빚은 낙원

[지중해 오디세이 17] 그레이스 켈리가 되살린 모나코
헤라클레스가 지나간 후 ‘모나코’란 이름 붙어
‘세기의 결혼식’으로 시작된 오나시스의 ‘빅 픽처’
 

[모나코 풍경. [출처 = Tobi 87 - Own work, CC BY-SA 3.0]]


"부자라는 동물의 습성은, 진귀한 걸 모으는 것"

“진짜 부자라면, 클로드 모네 같은 화가가 당신만을 위해 그린 그림 한 점은 있어야지요. 당신 초상화건, 당신 집 풍경화건 말이오.”

세계의 부자들을 만나 그들의 ‘습성’을 살펴 본 후 <부자>라는 책을 낸 미국 논픽션 작가 리처드 코니프(1951~ )가 내린 부자에 대한 정의입니다. 동물 행태와 인간 행태를 비교하는 글을 주로 쓴 그는 모나코 군주 레이니에 3세(1923~2005)를 인터뷰하고 나오다가 접견실 문 위에 걸린 그림에 눈길이 끌립니다. 처음 보는 것인 데도 스타일이 익숙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지중해를 굽어보는 돌산 꼭대기의 그리말디 궁(모나코 왕실의 옛 거처)과 그 주변의 항구를 흐릿하게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림 속에 정박해 있는 요트는 레이니에 3세의 할아버지인 레이니에 1세의 것이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인상파의 개척자인 클로드 모네(1840~1926)임을 알게 된 그는 “어쩐지 눈에 익었다 싶더니, 역시 …”라고 찬탄하면서 ‘부자라는 이상한 동물’의 습성 하나는 “남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모으는 것, 세상에서 단 하나만 있는 것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한 점에 1,300억 원짜리 그림(1890년 작, ‘건초더미’)을 그린 모네에게 자기네 집을 그리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또 있겠습니까. 그것도 지중해를 굽어보는 돌산 꼭대기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성을 말입니다.

그레이스 켈리를 아내로 맞은 사내

세상에서 단 하나인 모네의 풍경화를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레이니에 3세는 스스로도 세상의 단 하나를 ‘갖게’ 됩니다. 그 ‘단 하나’를 선택한 덕분에 쇠락하고 있던 모나코는 부자 나라가 되고, 그도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됩니다. 그 단 하나는 그가 1956년에 왕비로 맞아들인 그레이스 켈리(1929~1982)입니다.

1953년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모감보’에 조연으로 데뷔한 그레이스 켈리는 이듬해에는 ‘회상 속의 여인’에 주연으로 출연,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나 불과 2년 뒤에 은막의 여왕 대신 모나코의 여왕이 됨으로써 세계의 숱한 남자들을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비슷한 연배로 비슷한 시기에 그와 함께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마릴린 몬로(1926~1962)가 섹시함, 오드리 헵번(1929~1993)이 청순함으로 영화 팬을 사로잡았다면, 그는 지성미와 우아미가 돋보였던 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다이얼 M을 돌려라’ 등 자기 영화에 세 번이나 주연을 시킨 명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그레이스는 눈 덮인 활화산”이라고 평했습니다. “지성미와 우아미 아래에는 몬로 못지않은 뜨거운 관능미가 흘렀다”라는 비유입니다.

1956년 4월 18, 19 이틀간 열린 레이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은 700년을 이어온 유서 깊은 왕실에서 할리우드 최고의 미녀를 맞아들인 세기적 이벤트였습니다. (모나코 왕실 법규는 이틀에 걸쳐 왕궁과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나코 세인트 니컬러스 성당에서 진행된 결혼식은 세계에서 3000만 명이 TV 중계로 지켜봤습니다. 전날 왕궁 결혼식 피로연에는 모나코 시민 3,000명이 초대받아 왕실의 만찬을 즐겼습니다. 그보다 며칠 전 그레이스 켈리가 혼수품이 들어 있는 80개의 트렁크와 함께 모나코 항구에 도착해 배에서 내릴 때는 1,000여 명의 사진기자가 일제히 셔터를 눌렀습니다. 레이니에의 화려한 요트로 무려 7주 동안의 신혼여행을 떠나던 장면도 기자들의 카메라에 모두 잡혔습니다.

'켈리의 결혼스토리' 두번째 버전 아는가

두 사람의 결혼 스토리에는 ‘정전(正傳)’과 ‘외전(外傳)’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정전은 짧습니다. 오스카 여우주연상 배우가 된 그레이스는 1955년 4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 참석합니다. 칸은 모나코에서 55㎞ 정도 거리입니다. 거기서 그레이스는 레이니에를 만나게 됩니다. 두 사람은 패션잡지 보그의 요청으로 함께 화보용 사진 촬영을 합니다. 이때 레이니에가 그레이스에게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면서 “나의 왕비가 되어주겠소?”라고 청혼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외전은 이보다 좀 길고 복잡합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오나시스(1909~1975)의 사업적 계략의 산물이라는 것, 그레이스도 그 계략을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레이니에의 청혼에 응했다는 게 외전의 골격입니다. 외전을 이야기하려면 모나코 왕국의 역사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프랑스 남쪽에 붙어 있는 모나코는 지중해 연안의 여느 도시처럼 그 기원이 그리스 신화에 닿습니다. 모나코(Monaco)의 어원에는 ‘집 한 채’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원주민들이 숭배하던 이신(異神)들의 신전을 때려 부수면서 이곳을 지나간 후 헤라클레스를 모시는 신전(집)만 남았기 때문에 모나코가 됐다는 겁니다.

모나코는 1297년 이탈리아의 작은 귀족 프란체스코 그리말디에게 통치권이 넘어간 후 700년 이상 그의 후손들이 다스려왔습니다. 그가 모나코 땅을 장악할 때의 이야기도 드라마틱합니다. 모나코를 침공했으나 적들이 돌산 꼭대기의 성채에서 완강히 버티자 그와 부하들은 수도승 복장을 하고 성문을 두드렸습니다. 수도승들이 먹을 것을 얻으러 온 줄 알고 문을 열어준 성채 안 사람들은 옷 밑에 감췄던 무기를 꺼내 휘두른 그리말디와 그의 부하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됐습니다. 그 성채가 ‘그리말디 궁’이 되었습니다. 모네가 그림에 담았던 그 궁전은 지금 박물관이 됐습니다.

여의도 면적보다 작은 모나코, 조세천국으로 대박

모나코는 사실 왕이 아니라 공작이 다스리는 공국(公國)입니다. 그리말디 가문이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공작 지위를 얻었으며, 모나코를 봉토로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나코는 면적이 불과 2.0㎢에 불과합니다. 가로 2㎞, 세로 1㎞인 땅덩어리를 상상하면 얼마나 작은 나라인지 아실 겁니다. 인구는 4만 명이 채 안 되고 국경 길이는 5.47㎞입니다. 워낙 작고 자원이라고는 지중해에서 조금씩 잡히는 생선뿐이었으니 유럽의 다른 나라가 굳이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간혹 강대 세력이 침탈했지만 1419년 이후에는 그리말디 가문의 통치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모나코는 북부 유럽 사람들의 지중해 여행이 막 늘어나던 무렵인 1858년 도박장을 개설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와 모나코를 있는 철도는 도박장에 활황을 가져왔습니다. 거기다가 개인소득세를 없앴습니다. 법인소득세는 최소한으로 낮췄습니다. 유럽 부자들을 위한 조세천국이 된 겁니다. 부자들이 몰려들어 도박장과 다른 고급 오락시설에서 돈을 펑펑 뿌려대니 나라가 부유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차 대전으로 관광객 유입이 사실상 끊기자 모나코의 번영은 위협을 받습니다.

레이니에와 그레이스 켈리를 결혼시키려는 오나시스의 계획은 이때 싹이 텄습니다. 불멸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애인이자 나중에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유혹될 만큼 큰 부자였던 오나시스는 그 무렵 모나코에 막대한 투자를 한 상태였습니다. 모나코 최초이자 최대 카지노인 몬테 칼로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모나코 부동산의 3분의 1을 소유한 회사의 최대 주주였습니다.
모나코를 찾는 관광객이 줄어들면 자신의 재산도 뭉텅 날아갈 상황이 되자 오나시스는 레이니에 3세에게 미국 여배우와 결혼하면 그 자체가 관광 상품이 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 부자들을 모나코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나시스의 계획은 돈에 쫓기던 레이니에를 솔깃하게 합니다. 돈도 벌 수 있고, 세계의 미녀도 품에 안을 수 있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레이니에의 신부 감으로는 마릴린 몬로와 오드리 헵번도 거론됐는데, 몬로는 지나치게 육감적이며, 헵번은 미국인이 아니어서 그레이스 켈리가 선택됐다는 겁니다.
 
 

모나코에 투자한 오나시스가 기획한, 이벤트성 결혼

그레이스가 여배우로서 창창한 앞날을 미련 없이 던지고 조그마한 나라의 왕비가 되기로 한 것은 자신의 ‘방정하지 못한 품행’을 이제는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짧은 할리우드 생활 동안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들과 영화를 찍었는데 그들 대부분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거지요. 클라크 게이블,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든, 프랭크 시나트라, 캐리 그랜트, 게리 쿠퍼 등등 자기보다 20~30세 많은 남자들이 그 상대로 거론됩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품행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나돌고 부모들의 걱정까지 사게 되자 레이니에가 왕비 감을 은밀히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할리우드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패션 잡지 보그의 화보 촬영을 핑계로 레이니에를 칸 영화제에서 만난 것은 이 ‘빅 픽처’의 첫 단계라는 거지요. 할리우드 영화인들과 연예 기자들은 이 외전을 정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책도 많이 나왔습니다.

레이니에와 그레이스의 결혼은 모나코를 세계적 관광지로 만듭니다. 개인소득세도 없으니 미국 부자들이 잔뜩 몰려옵니다. 모나코의 카지노와 모나코 앞 지중해를 배경으로 여러 편 제작된 ‘007 시리즈’도 모나코의 성가를 높였습니다. 오나시스의 계획대로 된 겁니다. 하지만 오나시스는 모나코를 자신의 사교장처럼 꾸미려다가 레이니에와 척지게 됩니다.

레이니에는 더 많은 관광객을 모나코로 불러들여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자 했으나 오나시스는 모나코를 세계의 부자들만 올 수 있는 초고급 휴양지로 만들 욕심이었습니다. 레이니에는 오나시스가 자기 사업 파트너들만 모나코로 데려오려 한다고, 모나코를 오나시스 자신의 비즈니스 클럽으로 만들려 한다고 믿게 됐습니다. 레이니에는 오나시스에게 더 많은 호텔을 짓도록 투자를 하라고 했지만 오나시스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맞섭니다. 오나시스는 소송까지 벌였으나 레이니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나코 대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 돈보다 권력이 더 강함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입니다. 그 권력의 뿌리가 수도승 차림으로 성문을 열게 하고 들어가 그 성을 차지한 모략의 대가(大家)였음을 오나시스는 몰랐던 모양입니다.
 

[영화 '회상 속의 연인'에서 열연하는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두 남자의 싸움과 켈리의 죽음

그레이스 켈리는 1982년에 자동차를 직접 몰고 가다가 지중해변 도로에서 자동차가 절벽 아래로 구르는 바람에 숨졌습니다. 심장발작이 원인이라고 발표됐지만 옆자리에 앉았던 그레이스의 둘째딸 스테파니 공주는 무사히 생존했다는 이유로 사인이 석연치 않다는 말이 오랫동안 나돌았습니다. 레이니에는 2005년 아들 알버트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는 곧 사망했습니다. 오나시스는 결혼할 것처럼 대했던 칼라스를 버리고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하는 등 계속 관심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1975년, 재산이 과거보다는 많이 줄어든 상태에서 병으로 죽었습니다.

                                          정숭호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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