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 곳곳의 지정학적 갈등과 경제 불확실성이 이어지면서 미술시장에서 큰손들이 자취를 감췄다. 고액 자산가들은 작품 구매에 신중해졌고, 주요 컬렉터들도 기대에 못 미치는 가격에 작품을 내놓기를 꺼리는 분위기다. 시장 분위기를 끌어올릴 만한 '똘똘한 한 점' 역시 귀하다.
2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술시장의 거래 부진 원인으로는 구매 심리 위축과 우량 작품 공급 부족이 동시에 꼽힌다. 시장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컬렉터들이 선뜻 구매에 나서지 않으면서 소장자들도 매각을 주저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가 작품의 경우 소수의 구매자가 거래를 좌우하는 만큼, 이들의 관망세는 시장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당하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는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좋은 작품이 시장에 나오지 않고, 이는 다시 거래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김환기의 점화처럼 시장의 관심을 끌 만한 작품이 출품된다면 충분히 팔릴 수 있지만, 문제는 그런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을 이끌만한 이른바 '똘똘한 한 점'의 부재가 거래 침체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유명 컬렉터가 오랫동안 소장해 온 명작들이 경매에 나오면서 대형 거래가 성사되고 있다. 이달 영국 런던 크리스티에서는 영국 패션 브랜드 몬순의 창업자 피터 사이먼이 약 40년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이 대거 출품되면서 전 세계 컬렉터들의 관심을 끌었다.
지난 14일 열린 '피터 사이먼 컬렉션 이브닝 경매'에서는 출품작 41점 가운데 40점이 팔리며, 98%의 낙찰률을 기록했다. 낙찰총액은 약 1억750만파운드(수수료 포함, 약 1912억원)로, 크리스티 런던에서 거래된 단일 소장자 컬렉션 가운데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Figure in Movement'가 약 1719만파운드(약 306억원)에 팔리는 등 주요 작품들이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글로벌 미술시장 역시 침체를 겪고 있지만, 희소성 높은 작품에는 여전히 수요가 몰리고 있는 것.
국내 역시 구매 수요가 완전히 사라지진 것은 아니다. 다만,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컬렉터들이 작품을 더욱 까다롭게 고르고 있다. 정태희 서울옥션 수석 경매사는 "경기 불확실성으로 구매 판단은 신중해졌으나, 수요가 사라졌다기보다 희소성·미술사적 가치·가격 적정성을 면밀히 따지는 선별적 구매 경향이 강화됐다"며 "주요 작가의 경쟁력 있는 작품에는 여전히 관심과 응찰이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관망세는 미술 시장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글로벌 고가 소비재 시장 역시 올해 회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최대 명품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3분기 패션·가죽제품 부문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 감소했고, 구찌를 보유한 케어링도 같은 기간 매출이 1% 가량 줄었다. 특히 구찌 매출은 6% 감소했다. 중국의 소비 둔화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등이 겹치면서 명품 구매 심리가 위축됐다.
더구나 미술품은 구매 결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곧바로 현금화하기 어려운 만큼 경제 전망이 불투명할수록 구매를 미루려는 심리가 강하다. 정준모 대표는 "미술시장 침체의 가장 큰 원인은 전 세계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향후 시장 상황을 예측하기 어려워진 데 있다"며 "자산가들이 현금을 쥔 채 작품 구매를 미루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급격한 오름세를 보인 국내 부동산 시장의 자금이 미술 시장으로 흘러들어 올 가능성도 희박하다. 본격적인 회복 시점을 가늠하기는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정태희 수석 경매사는 "미술시장은 증시·금리 변화에 즉각 연동되기보다 경기 흐름과 소비 심리에 영향을 받는다"라며 "AI·반도체 중심의 성장과 달리 고물가 및 더딘 경기 회복을 고려하면 본격적인 회복 시점을 단정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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