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40주년을 맞는 2026년, 세계는 역설적으로 다시 원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중동의 지정학적 불안은 에너지 시장을 끊임없이 흔들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 에너지 안보의 민낯을 드러냈다. 여기에 인공지능(AI) 혁명이 촉발한 전력 수요의 폭증과 기후 위기라는 시급한 과제가 맞물리며, 원자력은 '공포의 상징'에서 핵심적인 '전략 자산'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체르노빌은 기이한 사건"... 공학계가 진단하는 '그때와 지금'
자코포 부온조르노 MIT 원자력공학 교수는 체르노빌 참사를 "격납 구조가 없는 결함 있는 RBMK 설계와 무모한 행동에서 비롯된 기이한 사건(outlier)"이라고 규정했다.
사라 A. 포지 미시간대 교수(IEEE 원자력·플라즈마 과학회 회장) 역시 "서방의 규제 체계 아래 승인된 현대 원자로 중 당시의 결함들을 모두 갖춘 설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특히 원자로의 물리적 특성 자체가 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티븐 라이먼 미시간대 교수는 체르노빌의 핵심 원인으로 소련 특유의 '흑연 감속 RBMK 원자로' 설계를 꼽았다. 그는 "현대의 물 감속 원자로는 체르노빌 방식의 멜트다운이 불가능하다"며, 과열 시 냉각재인 물이 증발하면서 핵반응이 자연스럽게 둔화되는 물리적 안전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다만 라이먼 교수는 "후쿠시마 사고가 보여줬듯 이 원리가 위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의 심각성을 줄이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원전이 '확장 가능한 청정 기저 전원'으로서 중요하지만, 높은 초기 비용이 최대 걸림돌이라며 "SMR(소형모듈원전)이 초기 비용을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낮춘다면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재 원자력은 전 세계 전력의 약 10%, 저탄소 전력의 약 25%를 책임지고 있다. 31개국에서 400기 이상의 원자로가 가동 중이며, 약 70기가 새로 건설되고 있다.
미국은 94기의 원자로를 운영하는 세계 최대 원전국으로, 2050년까지 용량을 4배로 늘릴 계획이다.
토머스 디난노 미국 국무부 차관은 최근 "세계는 원자력 없이는 산업 전력을 공급할 수도, AI 수요를 충족할 수도, 에너지 미래를 확보할 수도 없다"고 강조하며 원전의 실용적 가치를 역설했다.
중국은 40기에 달하는 원자로를 건설하며 미국 추월을 예고하고 있다.
반원전의 상징이었던 독일마저 흔들리는 가운데,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높인 과거를 언급하며 원전에서 등을 돌린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시인했다.
물론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R. 스콧 켐프 MIT 원자력안보정책연구소장은 공학계의 낙관론에 경계심을 표했다. 그는 원전의 안전성이 상당 부분 시뮬레이션 모델에 기반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원자로처럼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모든 상호작용을 완전히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켐프 소장은 과거의 중대 사고마다 인간의 오판이 개입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늘날에도 체르노빌 유형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현대 원전이 설령 더 안전해졌을지라도, 시스템을 다루는 인간의 이해가 완벽하지 않다면 예기치 못한 사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새로운 전선, SMR과 한국의 과제
원전 시장의 다음 격전지는 SMR(소형모듈원전)이다. 공장에서 제작해 현장에서 설치하는 ‘플러그 앤 플레이’ 방식은 낮은 비용과 빠른 배치를 약속한다. 하지만 BBC 등 외신은 SMR의 상업적 실현 가능성이 아직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신중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역할이 주목받는다. 한국은 APR-1400 같은 표준 원전을 정해진 예산과 기한 내에 건설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국내 상황은 복잡하다. 후쿠시마의 잔상과 '님비(NIMBY)' 정서, 정책적 가변성이 여전히 발목을 잡는다.
이정익 KAIST 교수 등 전문가들은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원전 산업의 완전한 부활을 이끌기엔 여전히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체르노빌 이후 40년, 원전을 둘러싼 국제 질서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원전은 이제 무조건적인 공포의 대상이 아닌, 생존을 위한 현실적 선택지로 부상했다.
기후 위기와 에너지 안보, 그리고 AI 전력 수요가 겹친 2026년의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 과거와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가 원자력과 함께 살 여유가 있느냐가 아니라, 과연 원자력 없이 살 여유가 있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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