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의 우.다.세] 사랑에도 나이가 필요한가요? -영화 '빈집의 연인들'

  • 그 언제든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빈집의 연인들 스틸컷
[사진=영화 '빈집의 연인들' 스틸컷]


사랑을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가 있을까. 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낯선 삶에 도전하는 일을 망설인다. 젊은 시절의 설렘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이제는 익숙한 일상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 '빈집의 연인들'은 인생의 후반부에 우연히 만난 두 노인의 동행을 통해 사랑과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은자(정애화)는 거칠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언행은 물론 행동까지 거칠어 작은 농촌 마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마을 잔치가 열려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대신 소주병을 들고 남편의 영정사진을 본다. 결혼한 아들은 도시에 살며 제 가정을 꾸렸고 은자의 곁에는 속마음을 나누거나 술잔을 기울일 사람이 없다. 집도 있고 가족도 있지만 그의 일상은 어딘가 비어 있다. 무료하고 지루한 삶이 익숙한 듯 은자는 그 빈자리를 남편의 영정사진과 남편이 남긴 반지로 채우며 살아간다.

그런 은자의 일상에 팔복(기주봉)이 불쑥 끼어든다. 낡은 봉고차를 타고 시골 마을을 떠돌며 빈집을 터는 팔복은 어느 날 은자의 집에 침입한다. 한밤중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깬 은자는 도둑을 붙잡고, 그가 낮에 자신의 차량으로 논길을 막고 있던 팔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은자는 남편의 반지가 사라진 것을 떠올리며 팔복이 훔쳐 갔을 것이라 의심하고 그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팔복의 도둑질에는 나름의 철칙이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만 털고, 눈에 띄는 귀중품보다는 소소한 물건을 챙긴다. 5만 원짜리가 있어도 만 원짜리 몇 장이나 동전통을 가져오는 식이다. 그런데 그의 행동에서 눈여겨볼 점은 빈집에 놓인 가족사진을 항상 훔친다는 것이다. 홀로 유랑하는 팔복에게 누군가의 가족사진은 자신이 갖지 못한 삶의 풍경처럼 느껴지는 듯 하다.

이런 은자와 팔복의 신세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은자는 집과 가족이 있지만 외롭게 살아가고 팔복은 가진 것 없지만 떠돌며 살고 있다. 이같은 공통점은 다른 듯 보이는 이들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은자를 팔복을 도둑으로 의심하면서도 “동행하지 않겠느냐”는 팔복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의 차에 올라탄다. 은자와 팔복은 동행하는 동안 사사건건 부딪치기 일쑤다. 그러나 어느새 서로에게 스며든다. 팔복 역시 자신에게 무심한 듯하면서도 신경을 써주는 은자에게 스르르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의 관계가 특별한 이유는 거창한 사랑의 고백이나 극적인 사건에 있지 않다.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챙기고, 낯선 곳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시간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는 데 있다. 
 
사진영화 빈집의 연인들 스틸컷
[사진=영화 '빈집의 연인들' 스틸컷]

은자에게 팔복은 고립된 일상에 균열을 내는 사람이다. 남편을 잃은 뒤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살아가던 은자는 그와 함께하면서 다시 설렘을 느끼고, 세상 밖으로 나갈 이유를 찾는다. 팔복에게도 은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곁을 내어준 사람이다. 빈집을 떠돌며 남의 가족사진을 모으던 그가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고 생활을 나누게 된 것은 어쩌면 사진 속에서만 바라보던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에겐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었다. 함께한 설렘도 잠시, 이들은 이별을 맞이한다. 팔복은 은자에게 자신의 가방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며 이들의 행복한 동행은 끝을 맺는다. 은자는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다. 그리움에만 자신을 매어두지 않는다. 잃어버린 남편의 반지 대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영정사진 앞에서 술을 마시기보다 눈앞의 일상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팔복과의 사랑은 끝났지만 은자의 삶은 어쩌면 이제 시작이다.

우리 사회는 노년을 흔히 삶의 정리 단계로 여긴다. 자녀를 키우고 가정을 꾸리는 역할을 마친 뒤 조용히 남은 시간. 특히 노년 여성에게는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 할머니라는 역할이 먼저 부여된다. 그러나 은자는 그런 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다. 거칠고 고집스러우며 때로는 충동적이지만, 그에게도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설렘과 일탈, 새로운 관계를 꿈꿀 권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팔복도 그러하다. 자신만의 낭만을 쫓아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그는 그 나름의 방식대로 행복해 보인다.

'빈집의 연인들'은 단순한 노년의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는 일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그 관계가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보는 사람들, 몇십 년 동안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서로의 곁에 머무는 시간, 시간이 갈수록 물드는 마음. 그 만남이 공허라는 오래된 상처를 다 채워주진 못해도 다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사랑에도 나이가 필요할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지금과 다른 삶을 꿈꾸는 데 정해진 시기는 없다. 어쩌면 청춘은 지나간 시간의 이름이 아니라 아직 무언가를 기대하고 새로운 내일을 선택하려는 마음에 가까운지 모른다. 

나이를 이유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마저 제한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편견일지 모른다.
 
사진영화 빈집의 연인들 스틸컷
[사진=영화 '빈집의 연인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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