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서울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역사와 사람, 권력과 돈, 신화와 풍수가 켜켜이 쌓인 거대한 인문지리의 현장이다. 조한규 미국 캐롤라인대 철학과 교수(전 세계일보 사장)가 2030세대가 알아두면 좋을 서울의 숨은 이야기를 아주경제신문에 풀어낸다. 인수봉과 여성봉·남성봉, 인왕산 마애불과 선바위에서부터 왕의 기운이 서린 바위, 돈의 기운이 모인 명당, 합격과 출세의 공간까지. 풍수지리와 사서삼경, 야사를 넘나들며 일반적 '문화답사’를 넘어 AI 시대에 새롭게 읽는 서울의 신인문지리학을 선보인다
(3) 한양 천도와 왕궁 주산의 '풍수 논쟁'
조선의 한양 천도는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천도 후보지가 2년 동안 ‘한양-계룡산-모악-한양’으로 네 차례나 바뀌는 등 혼선을 빚었던 것. 무학대사, 하륜, 권중화, 정도전 등이 왕궁 주산의 입지 선정을 놓고 약 2년 동안 뜨거운 ‘풍수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한양 천도는 그냥 쉽게 이뤄진 게 아니다. 백악산을 주산으로 한 조선 왕궁 건립도 엄청난 산고를 치렀다.
이성계는 즉위 1개월도 되지 않은 1392년(태조 1년) 8월 13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령을 내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했다<태조실록 1권>. 최초의 천도 후보지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이는 도봉산 남성봉 석굴의 ‘상제 친견 꿈’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394년(태조 3년) 12월 3일 왕도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황천(皇天) 후토(后土)와 산천의 신(神)에게 고한 고유문(告由文)을 보면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하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사람을 안정시킴)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있다<태조실록 6권>. 이는 꿈에서 ‘황천 상제에게 조선 건국의 명을 받았음’을 밝힌 내용이다. 그래서 일설에는 이성계가 마음에 둔 최초 천도 후보지는 경복궁이 아니라 남성봉 아래 지금의 도봉구 방학동과 창동 일대라고 한다.
최근 창동역 일대에서 서울시립사진미술관과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이 문을 열었다. 2027년 3월에는 약 3만명 수용 가능한 K-팝 전용 서울아레나 공연장이 개관한다. 음악 전문 공연장, 중형 공연장, 영화관 등을 갖춘 복합문화시설이다. 인근 창동차량기지와 도봉면허시험장 부지에는 노원서울대병원이 2028년 12월 완공될 예정이다. 지기가 일어나는 시기가 조선 초기가 아니라 지금인 셈이다. 창동 일대가 개벽하고 있다.
두 번째 천도 후보지는 계룡산. 당대 풍수전문가인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權仲和)가 1393년 1월 2일 이성계에게 태실 길지와 신도 후보지 지도를 제출한 결과다. 태조실록 3권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충남 금산)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찾았습니다’하면서 이에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치고 겸하여 양광도(楊廣道) 계룡산(鷄龍山)의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이성계는 2월 8일 왕사 무학(無學)을 동반하고 계룡산 일대를 답사한 뒤 그곳으로 천도하기로 결심했다. 곧바로 토목공사가 시작돼 10개월간 추진됐다.
그러다 1393년 12월 11일 돌연 공사가 중단됐다. 경기도 도관찰사(都觀察使) 하륜(河崙)이 풍수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륜의 주장은 이렇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臣)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風水) 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지금 듣건대 계룡산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패(衰敗)가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못합니다.”<태조실록 4권>
결국 이성계는 하륜에게 권중화, 정도전, 남재 등과 함께 호순신의 풍수 논리에 따라 고려 왕조의 여러 산릉(山陵)의 길흉을 검증하도록 했다. 그런데 길흉이 모두 맞아 이성계는 하륜에게 고려 왕조 서운관의 비록문서(秘錄文書)를 주고 새 후보지를 선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하륜이 건의한 세 번째 후보지가 지금의 연세대를 중심으로 한 신촌 일대인 모악산(母岳山·지금의 안산) 남쪽이다. 하지만 1394년 2월 권중화, 조준 등을 현지에 보내 풍수 답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 ‘땅이 협착해 불가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서운관 관원 윤신달·유한우 등도 불가하다고 건의했다. 심지어 이성계 자신이 1394년 8월 11일 직접 모악을 답사했고 동행한 신하 중 하륜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반대해 모악을 포기했다.
이성계는 1394년 8월 12일 개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백악산(白岳山·342m) 남쪽 고려의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자세히 살핀 뒤 여러 신하에게 묻고 다시 한양을 천도 후보지로 낙점했다. 그는 1394년 9월 1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담당 관리를 임명했다. 10월 갑오(25일)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을 고쳐서 판사(判事)·윤(尹)·소윤(少尹)·판관(判官)·참군(參軍)을 두었다<세종지리지 148권>.
천도 후보지에 대한 ‘풍수 논쟁’에 이어 왕궁의 주산(主山)에 대한 ‘풍수 논쟁’도 치열하게 전개된다. 불교적 풍수관과 유교적 왕도론이 한양의 궁궐 배치를 두고 충돌했다. 주로 무학과 정도전 간 ‘주산 논쟁’이다.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 야사(野史)와 구전(口傳)으로 전해져온다.
이 ‘주산 논쟁’은 조선 중기 서경덕의 제자로 당대 문장가였던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처음 등장한다. ‘오산설림초고’에 따르면 “무학이 왕사가 되자 바로 한양을 신도읍지로 점쳐 말하기를 ‘인왕산(仁王山·338m)을 진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그 터가 동향이므로 정도전이 이에 난색을 표하며 반대하자 무학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 후 자신의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우리역사넷>. 이는 ‘연려실기술’ 등에도 나온다. ‘주산 논쟁’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 ‘경복궁 배치 구상 비교’ 표와 같다.
‘주산 논쟁’에서 ‘정도전안’이 채택된 것은 ‘주례(周禮)’의 ‘남면론’과 함께 백악산 남쪽 아래 땅이 북극성의 기운을 받는 ‘자미원국(紫微垣局)’이라는 정도전의 논리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산 인수봉이 북극성을 통해 받은 하늘 궁궐 자미원의 기운이 삼각산-보현봉-형제봉-백악산으로 힘차게 뻗어 내려와 경복궁에서 땅의 궁궐 자미원국을 조성했다고 보는 견해다. 정도전은 또한 경복궁을 주산으로 삼아야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사신도에 부합한다고도 주장했다. 게다가 하륜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논리로 정도전의 주장을 지원해 백악산을 경복궁의 주산으로 삼았다. 왕궁 앞에 물이 많아야 국가 재정이 풍부한데 중랑천 물은 적고 한강 물은 많다는 논리다.
정도전은 뒤늦게 풍수지리를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국 고유의 전통풍수지리서로 알려진 ‘유리자통서(琉璃子通書)’를 이은 ‘삼의록(三議錄)’의 도참(圖讖)이론을 체계화한 ‘발복추산법’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한국 전통 풍수학은 주산에서 혈(穴)까지 이어지는 내룡을 음·양으로 분석하고, 사신사(四神砂) 배치를 고려해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따라서 정도전은 무학대사와 ‘주산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 무학대사도 도선의 ‘옥룡자금두경(玉龍子金蠹經)’에 정통한 풍수이론가였다.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 핵심은 인왕산 아래 동향인 ‘유좌묘향(酉坐卯向)’에 대궐터를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안산(案山)으로 북촌능선-종묘능선에 이어 낙산-배봉산-용마산이라는 3개 산이 겹겹이 펼쳐지게 된다. 이는 갈수록 국력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무학은 인왕산에서 동쪽으로 멀리 보이는 용마산(龍馬山·348m)이 ‘일자문성(一字文星)’이어서 의미가 크다고 봤다. ‘일자문성’은 산의 능선이 가로로 곧고 평평하게 뻗은 지형으로 천자도 나올 수 있는 길지의 요소다. 국왕이 용마를 타고 대륙으로 진출한다는 의미도 있다.
반면 정도전의 ‘백악산 주산론’의 약점은 관악산(冠岳山·632m)이다. 관악산은 화산(火山)으로 불기운이 강해 경복궁에 화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백악산 뒤 보현봉이 살봉인 규봉(窺峯)이 되고, 창의문을 넘어오는 북서풍의 살기가 해를 끼칠 수 있다. 많은 풍수적 비보(裨補)가 필요하다. 좌청룡인 낙산이 우백호인 인왕산보다 약하다는 점도 왕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 1·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여인천하,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 등이 그 단적인 사례들이다. 안산도 정확하지 않다. 남산이 안산 자리에서 비켜 있다. 이에 무학은 차선책으로 남산을 정확한 안산으로 삼고 남동향인 ‘해좌사향(亥坐巳向)’에 터를 잡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하륜의 가세 등 중론에 밀렸다고 한다.
아울러 정도전이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고자 했던 배경은 무학과 유사하나 관점이 달랐다. 무학은 용마산의 일자문성을 주목했으나 정도전은 백악산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조선이 고조선의 적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권1에 단군 왕검이 조선을 건국하며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긴 대목이 나온다.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궁(弓) 혹은 방(方)이라고 한다. 홀산(忽山)이라고도 하며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 후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삼국유사 권제1>
김두규 전 우석대 교수는 ‘국운풍수’에서 정도전의 영토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중국을 제패하여 천자국이 된 변방민족으로 거란(요), 여진족(금), 몽고족(원)이 있었음’을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훈련을 엄격하게 전국적으로 실행케 하였다. 고조선의 옛 땅 요동을 수복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이어 고조선의 주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조 이래 많은 학자들이 요녕성 북진(北鎭)시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고조선의 주산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는 뜻인 의무려산은 흰 바위로 되어 있어 백악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명산이다.”
조선을 국호로 지은 정도전은 ‘고조선의 후예가 바로 조선’이란 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주산이 백악산인 점을 고려해 조선 왕궁(경복궁)의 주산을 면악(面岳)에서 백악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고조선의 주산이 의무려산’이란 내용은 허목, 홍대용, 장지연 등도 주장했다. ‘백악산 주산론’은 나름 역사의식이 있는 주장이다.
백악산 정상에는 ‘白岳山’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대한민국 명승 (구)제67호는 ‘서울 백악산 일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땅히 북악산도 백악산으로 이름을 바꿔야 한다. 또한 정부서울청사와 외교부청사가 동향인 점을 감안해 용마산이 보이는 방향에 고층 빌딩을 규제해야 한다. 그래야 민족정기가 살아나고 국운이 크게 상승한다.
△경남대 대학원 정치학박사 △세계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 △스포츠월드 편집국장 △세계일보 겸 스포츠월드 사장 △중소기업신문 회장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 △(현)미국 캐롤라인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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