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있지만 시장이 없다'고 한다. 틀린 말이다. 시장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한국은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 위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는 법을 안다. 다만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 본 적은 드물다. 인공지능(AI)은 길이 없는 쪽의 기술이다. 공장 안의 미세한 불량, 물류 경로 중 눈에 보이지 않는 정체, 홀로 사는 노인의 약 복용 여부 등은 사람의 눈과 손이 닿지 못했던 것들이다. 닿지 못했으므로 문제라 불리지 않았고, 문제가 아니라서 돈이 되지 않았다. AI가 닿으면 달라진다. 잡히지 않던 것이 잡힌다. 잡히는 순간 그것은 문제가 되고, 문제가 되는 순간 시장이 열린다.
얼마 전 제조 분야 AI 기업 대표를 만났다. 정부 과제로 기술을 증명했고 현장에 적용 가능한 모델도 있었다. 막힌 곳은 그다음이었다. 이 기술이 필요한 공장을 찾는 일, 기술이 만드는 가치를 현장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 등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장에서 이런 기업을 셀 수 없이 본다. 기술은 있는데 시장 앞에서 멈춰 있는 기업들 말이다. 한국 인공지능 산업의 병목이 여기다.
이제는 기술을 만드는 정책에서 문제를 찾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이것을 미션 중심 혁신 정책이라 불렀다. '인공지능을 육성하겠다'와 '홀로 사는 노인의 응급 대응 시간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다른 정책이다. 전자는 기술에 돈을 붙이는 일이고, 후자는 문제에 기술을 붙이는 일이다. 미국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자율주행 경주 대회 하나로 산업 전체의 물꼬를 튼 것도, 유럽연합(EU)이 그린딜(Green Deal)이라는 목표 아래 기술과 자본의 줄을 세운 것도 같은 이치다. 문제가 또렷할수록 기술은 갈 곳을 알고, 기업은 이익을 예측할 수 있고, 돈은 움직인다.
이런 전환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목표를 수치로 제시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기업에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 반도체 후공정 불량, 농경지 수확량, 노인 응급 대응 등 산업 현장에서 뽑아낸 과제가 정책의 첫 줄이 되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할 힘이 있는 소수에게 수요를 줘야 한다. 고르게 나누면 아무도 크지 못한다.
둘째, 한번 선정된 기업은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지원은 과제 단위, 연 단위로 분절되어 기업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컴퓨팅 자원, 데이터, 실증, 자금, 해외 진출을 연계하고, 성과가 나오면 지원을 키우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미 이런 방식으로 성과를 창출하는 나라들이 있다. 프랑스는 French Tech Next40/120으로 해마다 스케일업 120곳을 골라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French Tech 2030으로 딥테크 육성까지 연계한다. 싱가포르는 Enterprise SG Scale-Up으로 누적 80여 개사를 집중 지원했고, 3년 만에 25억 싱가포르달러 규모의 신규 매출을 만들어냈다. 이스라엘은 국가 인공지능 프로그램 아래 전용 슈퍼컴퓨터를 구축하고, 혁신청이 기업에 연구 기반과 자금을 직접 지원한다. 방식은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하다. 될 기업을 고르고, 끝까지 밀어준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이 흐름을 현장에서 이어가려면 기업을 선별하는 눈과 단계마다 쓸 수 있는 정책 수단을 함께 갖춘 중소기업 전문기관이 필요하다.
결국 문제를 얼마나 정밀하게 정의하느냐가 시장의 크기를 정한다. 그 크기만큼 기술이 흐르고, 산업이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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