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나메기' 이상향으로 돌아간 故백기완의 일생

문은주 기자 입력 : 2021-02-19 10:17
민중의 방패막이를 자처한 이 시대 '마지막 재야' 농민·통일·민주화운동의 불꽃 일으킨 씨알 사상 "산 자여 따르라" 89년만에 끝내 씨알의 나라로
이 땅의 '마지막 재야'이자 '행동하는 씨알'이었던 백기완 선생(1932-2021)이 2021년 2월 19일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씨알의 귀천(歸天)이다. 그의 89세 육신은 경기도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오롯이 묻혔다. 모두가 잘사는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꾸던 그가 '노나메기' 이상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보다 31세나 많아 할아버지로 불렸던 함석헌(1901-1989) 민주화 동지와 헤어진 지 32년 만에 그가 사는 '씨알의 하늘나라'에서 해후(邂逅)하게 됐다. 

"나는 아무것도 못 되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이다. 민중이다. 민중은 민초(民草)라니 풀 같은 것이다. 나는 풀이다."
 

18일 오후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사진=연합뉴스]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백기완 선생은 언제나 삭풍의 초원에 서 있었다. 민초이자 들풀이었기 때문이다. 이 땅의 소외된 자와 고단한 자의 소박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민초들에게 몰아치는 비바람과 폭풍을 막아주는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였던 그. 그는 지친 민중들의 신심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큰 어른'이자 좌절하는 민중들을 다시 전사로 나서게 만드는 '민중운동의 사상가'였다. 

이 땅에 ‘재야’라는 말을 처음 끄집어낸 것도 그였다. 자신이 70년대에 우연히 이 말을 제안하자 함석헌·장준하 선생이 “그거 말 된다"고 했단다. "나는 학력과 권력, 재산 아무것도 없었으니 손해 볼 것도 없는 그냥 사람"이라는 그의 '무지랭이'론이 재야의 기본정신인지도 모른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인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함께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인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던 그는 동양의 유토피아로 불리어온 '대동사회'로 귀일(歸一)했는지도 모른다. 

◆세월 앞에 스러진 이 시대 마지막 '재야'

백 선생의 두 발은 언제나 거리에 있었다. 소외된 자, 고단한 자의 불침번을 자처했다. 스스로를 '불쌈꾼'이라고도 했다. 비판이 필요할 때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진짜 진보는 주어진 판을 깨는 것"이라며 기꺼이 쓴소리를 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였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몇 평 안 되는 차가운 감옥에 갇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79년 YMCA 위장결혼식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잇따라 투옥되는 고초도 겪었다.
 

1987년 성문밖 교회에서 열린 서울노동조합운동 결성식에서 격려사 하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사진=연합뉴스]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 백 선생은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반은 죽은 몸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15촉 전구를 보고 있노라면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절망에 몸부림칠 때가 많았다. 극한 상황에서 자꾸만 약해지는 정신을 달구질하기 위해 '묏비나리' 시를 지어 주문처럼 외우고 또 외웠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고 전하고 싶었다.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이라는 이 시는 훗날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다시 태어났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는 따르라"라는 후렴구에는 슬픔과 결의가 켜켜이 배어들었다.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미얀마와 홍콩의 거리에서도 흘러나온 백기완의 민중가요다.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에서 태어난 백 선생이 민중운동에 눈을 뜬 것은 1950년대부터다. 직접 나무를 심어 푸른 강산을 만들었고 가난한 이웃의 밥술을 더했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을 계기로 통일민주화운동의 싹을 틔웠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민중의 적극적인 지지로 정치 활동에도 나섰다.
 

1987년 대선 후보 출마 당시 대학로 유세 모습 [사진=연합뉴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처음 치르는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재야운동권 대표자로 독자 입후보했다가 야권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면서 중도 사퇴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야운동권의 독자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직접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 머물며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말 그대로 '재야'를 몸소 실천한 셈이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20세기를 거쳐 최근까지도 왕성한 민중 활동을 했다. 60~80년대 반독재 운동에 이어 2000년대 들어와서도 늘 민중운동 현장에 서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다. 얼마 전 세월호 구조 실패와 관련해 무혐의가 나온 데 대해서도 한탄을 토해냈다. 2017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집회 등에도 자주 모습을 비쳤다. 그러나 시간과 세월은 더이상 한국 민주화 역사의 산증인인 백 선생의 편이 아니었다. 병마와 싸운 지 3년여 만에 마지막 재야가 스러져간 것이다.

◆민중바라기의 뿌리는 '씨알사상'에 있었다

백 선생은 불쌈꾼이자 이야기꾼을 자처했다.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 민주화운동 관련 책자를 펴냈다.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는 백범사상연구소다. 백범의 말글을 모아 '백범어록' 등도 출간했다. 백범은 1898년 치하포 사건(황해도 치하포 지역에서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 당시 수감됐다가 탈옥했을 당시 백 선생의 조부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백범과의 교류는 백 선생의 마음속에 민중운동에 대한 의지를 뿌리내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15일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한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의 생전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립(30세)에 접어드는 무렵 만난 함석헌 선생과의 인연으로 그는 씨알사상의 전파자로 변신했다. 특히 함석헌과는 서른한 살의 나이 차가 무색할 정도로 끈끈한 씨알의 동지였다. 백 선생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영감님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늙은이로 오해받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봤다”라면서도 “아니, 나는 학벌·권력·재산 아무것도 없었으니 손해 볼 것도 없었지”라면서 재야의 정신을 실천했다. 

스스로를 민중(씨알)바라기라고 자처했던 그는, 함석헌의 스승이자 한국 근현대사의 영적, 정신적 근간을 이룬 다석 류영모(1890-1981)의 씨알에 대한 실천 윤리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살려냈다. 백기완은 함석헌을 통해 류영모의 사상을 접한 뒤 그것을 삶의 철학으로 담았다.

역사 주체인 씨알을 향한 그의 집념은 함께 일하며 함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노나메기' 사상으로 꽃을 피웠다. 노나메기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해서 같이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이 담겼다.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코란과 불경, 성경에 버금가는 민중사상이라는 자부도 가졌다. 그의 농민·통일·민주화운동을 이끄는 생각의 불꽃은 거기서 나왔다.

◆산 자에게 남겨진 숙제...못다이룬 염원 '노나메기'

불쌈꿈이자 이야기꾼으로 활동했던 백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관심을 두고 있던 순우리말 찾기 운동도 활발하게 이어왔다. '달동네'(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 '동아리'(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써클'의 대체어), '새내기'(대학이나 직장 등에 새로 갓 들어온 사람) 등이 백 선생의 노력으로 자리 잡은 우리말이다.
 

지난 2012년 1월 서울 갈월동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인권보호센터)에서 열린 고 박종철 열사 25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사진=연합뉴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백 선생이 순우리말로 지은 '갯비나리'라는 시는 2019년 창악음악극 '쪽빛의 노래'를 제작하는 데 일조했다. 국립국어원과 진행한 생전 인터뷰를 통해 백 선생은 "우리말의 심미성을 강조하기보다 우리말을 꼭 써야 하는 이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우리말은 곧 인류의 문화와 문명이어서 우리말이 사라지면 문화와 문명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민주화도, 한글 운동도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아쉬움 또한 컸을 것이다. 평생 염원했던 노나메기와 통일의 결실을 미처 보지 못한 탓이다. 백 선생의 유족은 조문을 온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생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상과 하얀색 손수건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상 속에서 백 선생은 이번 정부의 통일 정책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반도 문제의 평화로 가기 위한 노력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역사에 주체적인 줄기였고, 문재인 정부는 바로 이 땅의 민중들이 주도했던 한반도 평화 운동의 그 맥락 위에 섰다는 깨우침을 가지시길 바란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대학로 소나무길에서 고(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운구행렬이 지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극도의 공포 속에서 쥐어짜듯 태어난 시, 허공에 매달려도 끝끝내 땅에 떨어지지 않게 생명을 잡아맨 노래. 그 노래가 용기의 상징으로 솟고 다짐의 폭포를 이루어 이 땅에 있는 민중의 시공을 관통하고 있다. 

격동의 한반도 역사와 함께해온 백기완이 2월 19일 우리 곁을 떠나 '임'이 되었다. 경기도 마석 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그렇게 '임'이 '씨알'의 하늘나라'로 승천(昇天)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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