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일부 장면과 전개에 관한 설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장편 신작 '호프'를 둘러싼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156분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액션과 재기발랄한 유머를 두고 "극장에서 경험해야 할 영화"라는 호평이 나온다. 반대편에서는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지 않고 1편만으로는 충분히 마무리되지 않는다며 답답함을 호소한다. 개봉 이후 평론가와 관객 사이에서 이어지는 논쟁은 이 영화의 장점과 단점이 사실상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직 '호프'를 볼지 말지 망설이는 관객을 위해 추천 요소와 비추천 요소를 정리했다.
▲ 이야기를 이해하기보다 장면을 경험하고 싶다면
'호프'는 장면의 힘으로 관객을 밀어붙이는 작품이다. 나홍진 감독도 "'곡성'이 대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였다면 '호프'는 액션과 비주얼, 사운드를 통해 이야기를 느끼게 하려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영화의 강점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보다 '이번 장면을 어떻게 돌파할까'에 있다. 괴생명체와 맞닥뜨린 인물들은 호포항의 좁은 골목과 집, 차량, 담벼락을 오가며 쫓고 쫓긴다. 간판이 부서지고 주택이 풍비박산 나는 동안 마을은 배경을 넘어 전투의 도구가 된다. 인물들은 골목 사이로 몸을 숨기고, 건물을 방패 삼아 움직이며, 차량을 타고 괴물과 거리를 좁힌다.
이때의 현장감은 일인칭 슈팅게임을 즐기는 경험으로 절정에 달한다. 무엇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카메라는 인물과 함께 달리고, 숨고, 방향을 꺾는다. 넓은 전경으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 위험에 휘말린 사람의 시야를 따라가기 때문에 관객도 사건의 중심에 들어간 듯한 압박을 받는다.
호포항은 나홍진 감독의 전작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숲속 추격에서는 '곡성'의 광활하면서도 불길한 산세가 떠오르고, 골목을 질주하는 장면에서는 '추격자'에서 하정우를 뒤쫓던 김윤석의 다급함이 겹친다. 괴생명체가 마을 사이를 가로지르는 규모감은 '진격의 거인' 실사판을 보는 듯한 인상도 남긴다.
공간마다 서로 다른 장르적 기억을 불러낸다는 점은 '호프'의 확실한 볼거리다.
▲ 가장 긴박한 순간 펼쳐지는 개그
'호프'의 또 다른 강점은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뒤 엉뚱한 방식으로 무너뜨리는 유머다.
보통의 액션영화라면 괴물을 쓰러뜨린 순간 승리의 감정을 오래 끌고 간다. '호프'는 인물들이 환호하려는 찰나 성기(조인성)가 차에서 맥없이 떨어져 피를 흘리게 만든다. 관객이 안도할 시간을 예상하는 순간, 영화는 전혀 다른 충격으로 장면을 뒤집는다.
범석(황정민)이 괴생명체를 추격하면서도 주민과 만담을 주고받고, 오인 사격을 벌이거나, 반대로 괴생명체에게 쫓기며 번번이 미끄러지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목숨이 오가는 추격인데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포와 우스움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한다. 가장 박진감 넘쳐야 할 때 허무한 사고가 벌어지고, 감정을 고조시킨 뒤 별것 아니라는 듯 맥을 빼는 방식이다.
해술(임현식)이 과거 괴물을 목격한 일을 길게 늘어놓는 장면은 이 영화의 취향을 가르는 시험지와 같다. 본론과 무관해 보이는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상황은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이를 '뇌절 개그'로 받아들이면 영화의 리듬을 즐길 수 있지만, 이야기가 빨리 진전되기를 바라는 관객에게는 불필요하게 긴 장면이 된다.
▲ 156분간 지루할 틈은 거의 없다
러닝타임은 2시간 36분에 달하지만 영화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마을의 이상징후를 조사하던 이야기는 숲속 사냥으로 넘어가고, 괴물영화는 자동차 추격전과 총격전으로 변하며, 후반에는 우주적 규모의 SF로 확장된다.
여기에 음악과 사운드가 긴장감을 계속 끌어올린다. 인물이 움직이기 전부터 불길한 소리가 먼저 위험을 알리고, 추격이 시작되면 박자와 음량을 높여 장면의 속도를 밀어붙인다. 이야기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해도 청각과 시각의 자극만으로 따라갈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하나의 잘 정돈된 이야기를 보기보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장면마다 다른 자극을 경험하고 싶은 관객이라면 '호프'를 추천할 만하다. 특히 화면과 소리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큰 상영관일수록 장점이 뚜렷해진다.
▲ 이야기의 얼개를 중요하게 본다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문제는 각각의 장면이 강한 만큼, 그 장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이야기가 느슨하다는 것이다.
호포항에서 범석과 성애(정호연)가 겪는 사건과 성기를 비롯한 주민들이 숲에서 벌이는 사냥은 오랫동안 따로 진행된다. 두 공간 모두 개별적인 긴장감은 뛰어나지만, 서로 다른 영화 두 편을 번갈아 보여주는 듯한 단절감도 생긴다.
후반부에 두 이야기가 만났다고 해서 앞서 벌어진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정리되는 것도 아니다. 외계 생명체가 왜 지구에 왔는지,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 사건이 어떤 더 큰 상황의 일부인지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나홍진 감독은 외계인의 대사를 한동안 자막 없이 제시하고 마지막에야 의미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관객의 관점 변화를 유도했다고 밝혔다. 인간의 입장에서 외계인을 위협으로 바라보던 관객이 뒤늦게 이들의 사정을 이해하게 만들려는 구성이었다.
다만 외계인 가족의 관계와 사정이 충분히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후반부에 관점을 옮기라고 요구받는 관객은 감정보다 설명의 공백을 먼저 느낄 수 있다.
▲ 속편이 있어도 1편은 하나의 영화여야 한다
'호프'는 후속편을 염두에 둔 작품이다. 나홍진 감독은 외계인 캐릭터를 중심으로 우주에서 이어지는 속편 이야기를 이미 집필했다고 밝혔다.
다만 속편의 존재가 1편의 미완결성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연속된 세계관을 다루는 영화라도 한 편 안에서 최소한의 갈등과 질문은 마무리돼야 한다. 다음 작품을 위한 단서를 남기는 것과 현재 작품의 핵심 설명을 다음 편으로 미루는 것은 다르다.
'호프'는 후자의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156분을 보고도 한 편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만족보다 길고 거대한 서막을 봤다는 기분이 들 수 있다. '곡성'처럼 영화가 끝난 뒤 상징과 의미를 되짚는 재미를 기대했다면, 모호함의 성질이 다르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곡성'의 의문은 영화 안에서 제시된 단서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지만, '호프'의 의문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 영화가 정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다. 해석할 재료가 많은 것과 설명이 보류된 것은 같은 종류의 모호함이 아니다.
▲ 마이클 패스벤더는 왜 필요했을까
화려한 캐스팅을 기대한 관객도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비롯한 해외 배우들은 외계 생명체를 연기한다. 하지만 이들의 얼굴과 신체는 CG 캐릭터 뒤에 가려져 있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타노스처럼 배우의 표정 근육과 감정이 디지털 캐릭터에 생생하게 남는 방식을 기대했다면 차이가 크다. '호프'의 외계인은 낯선 생명체의 이질감을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마이클 패스벤더 특유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은 제한적이고, 담담한 눈빛과 말투만 일부 남는다.
외계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표현했다면 어색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배우를 기용한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드러났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배우의 이름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관객에게는 기대와 실제 활용 사이의 간극이 크게 느껴질 수 있다.
CG도 호불호 요소다. 괴생명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액션 장면에서는 속도와 카메라 움직임이 어색함을 가린다. 반면 외계인을 가까이에서 오래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실제 공간과 디지털 캐릭터가 완전히 섞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칸 상영 이후 국내 개봉 전까지 CG를 추가로 보완했지만, 나홍진 감독 역시 완성 과정이 오래 걸렸다고 설명했다.
▲ 직접적인 대사와 분노 일색의 인물들
일부 대사는 영화가 보여준 상황을 다시 말로 설명하는 데 그친다. 성애가 "아무리 괴물이어도 이럴 수는 없는 거예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윤리를 직관적으로 드러내는 말이지만, 어떤 관객에게는 인물이 갑자기 고리타분한 메시지를 낭독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인물들의 감정이 대체로 분노와 고함에 집중됐다는 비판도 나올 만하다. 범석은 욕을 하고, 성기는 흥분하며, 주민들은 괴물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각자가 왜 그런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전사와 관계 묘사는 최소화돼 있다. 덕분에 액션의 속도는 유지되지만, 156분의 긴 영화에 비해 인물의 내면은 얇게 느껴진다.
▲ 그래서 누구에게 추천할까
'호프'는 잘 정돈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강렬한 순간의 연속을 선사한다.
호포항의 골목과 숲을 가르는 추격, 서스펜스를 웃음으로 이완하는 완급 조절, 인물과 함께 뛰어다니는 듯한 액션, 큰 화면과 사운드가 주는 황홀감을 원한다면 극장에서 볼 이유가 충분하다. 장면 단위의 쾌감만 놓고 보면 최근 한국 상업영화에서 보기 어려웠던 규모와 속도감이다.
반대로 이야기의 인과관계, 인물의 감정선, 외계인의 목적, 한 편 안에서 완성되는 결말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신중하게 선택하는 편이 좋다. '곡성'의 상징과 해석을 기대하고 들어갈수록 실망이 커질 수도 있다.
'호프'를 볼 것인지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가르는 문제가 아니다. 영화를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로 보는지, 156분간 이어지는 시네마틱 체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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