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 필자의 마음도 그렇다. 정리가 안되고 이상하다. 정확하게 취향 저격을 당한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 때문에도 더 그렇다.고범석 “내가 머릿속이 정리가 안돼. 그냥 내 마음이 이상해서 그래.”
‘곡성’은 인간의 생과 사를 한가한 낚시질 한번으로 가르는 악의 무차별한 업을 다뤘다. 무자비한 무차별성으로 파괴되는 인간들을 대면한 관객들은 이후 철학, 종교, 심리 등 다방면에 걸친 영화적 의미를 찾아내고 발굴하고 곱씹곤 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도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찝찝함이 10년이 지나도 여전했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충만한 영화였다. 그런데 ‘곡성’ 이후에 공개된 영화 ‘호프’는 난처할 정도로 이야기로는 텅 비어있다. 우리가 곱씹을 이야기가 거의 없다. ‘추격자’, ‘황해’, ‘곡성’ 등 이야기든, 액션이든, 감정의 진폭이든 꽉 채워져 있다고 생각한 영화들을 만든 나홍진 감독의 신작이라 더 당혹스럽다.
텅 빈 이야기 대신에 ‘호프’는 액션이 그 자리를 대부분 채웠다. 스태프들을 ‘갈아서’ 만들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실제보다 더 실제같은 현장의 소품·세트·미술에 얹어진 압도적인 액션신이 체감상 영화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텅 빈 이야기와 꽉 찬 액션, 이 극단의 두 요소로 인해 영화 ‘호프’의 네티즌 평점은 대략 평균인 6점대를 기록하고 있다. 점수별 비율이 최상단과 최하단에 집중된 결과로, 보기 드문 현상이다.
극호와 극불호가 엇갈리는 역대급 후기 잔치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것으로 알려진 영화 ‘호프’가 개봉하자마자 관련 커뮤니티와 SNS는 후기의 말 잔치가 열렸다.칸 영화제 공개 때부터 말이 많았던 CG의 어색함과 외계인의 캐릭터 디자인, 혹은 외계인 사이의 대화 장면은 불호의 포인트로서 대표적으로 지적된 부분들이다. 전후 사정을 거의 알려주지 않은 채 영화의 끝부분에 찔끔 알려주는 외계인끼리의 대화 내용은 이 영화의 맥락에 대해 희미한 뉘앙스만 줄 뿐이다. 훌륭한 액션을 어쨌든 실컷 만끽하다 마지막에 수십개의 물음표를 머릿속에 가득 띄운 채 극장을 나와야 했던 관객들의 탄식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반면 초반의 초토화된 호포마을에서 첫 번째 외계인을 만나고 결국 잡아내는 초반 한시간과 인근 숲에서 사냥꾼 무리가 또다른 외계인 무리와 만나 전투를 치르는 중간 부분, 그리고 후반에 고성기(조인성)와 고범석(황정민), 임성애(정호연) 등이 마베이요(마이클 패스벤더)와 벌이는 국도에서의 추격전, 이렇게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액션 시퀀스는 국내외를 통틀어서도 보기 드물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훌륭한 액션 장면들이다.
한국 특유의 정서가 듬뿍 담긴 장소에서 최고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외계인의 존재를 표현한 디지털 이미지가 입혀지고, 홍경표 촬영감독의 놀라운 영상이 더해지면서 ‘호프’의 액션신만큼은 성찬이 이어지고 있다.
필자를 당혹하게 만든 텅 빈 서사, 그 안을 액션신으로 가득 채운 500억 대작 ‘호프’는 어떻게 봐야 할까. 나홍진 감독이 ‘곡성’ 이후 10년만에 이 영화를 내놓은 이유가 뭘까. 답이 나오지 않는 이 우문에 억지로라도 답을 내야겠다. 당혹해했을지언정 필자는 ‘호프’의 뼈를 깎듯 정밀하게 빚어낸 액션에 충분히 벅찼고, 그 누구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의 장편영화 4편에 담긴 '인간의 의지'
총 네 편의 장편영화를 내놓은 나홍진 감독의 영화들을 나름 헤아려보면 공통적인 면이 도드라지게 되는데, 그것을 필자는 멍청할 정도로 끈질긴 ‘인간의 의지’라고 표현하고 싶다.영화 ‘추격자’는 피해자가 살아 있을 확률이 제로에 가깝더라도 이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범인을 끝까지 추격하는 현직 포주, 전직 경찰인 엄중호(김윤석)의 까닭 모를 의지가 있다. 그토록 찾으려 했던 피해자는 ‘혹시’하는 희망이 무참히 잘려나가듯, 결국 그의 머리가 절단되어 엄중호의 의지를 비웃고 비극은 이어진다.
‘황해’ 속 죽음의 난장판은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을 몰살하다시피하며 겨우 진정이 되는데 아무도 막을 길 없는 연쇄적 살육의 원인은 어처구니 없게도 누군가의 치정에 얽힌 사소한 질투가 그 시초였다. 인간의 어리석음, 오해, 멍청한 분노는 다 끝장나는 이 서사의 끝을 막을 수가 없으나 그 속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이 난장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친다. 그리고 다 실패한다.
‘곡성’에서는 더 불가사의하고 도저히 가늠이 안되는 어떤 힘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는 인간을 그린다. 그 대단한 힘에 어떻게든 맞서려는 인물들의 투쟁이 눈물겹게 이어지나, 영화는 정해진 파멸을 향해 가차없이, 자비없이 도달한다. 막연히 ‘악’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그 힘에 대해 ‘곡성’은 뿔난 외지인의 애매한 말장난으로 모호하게 처리하여 확실한 정체를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했다.
그러더니 ‘호프’에서는 이제 인간을 괴롭히는 힘이 외계의 것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언제, 어디에서, 왜, 어떻게 지구로 왔는지도 모르는 외계생명체가 느닷없이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호포마을에서 한순간에 명을 달리한 주민들은 족히 수십 명에 달할 것이다. 맥없이 폐허의 일부를 차지한 이 시신들 사이를 비집고 두려움에 잔뜩 떨면서도 기어이 외계인을 향해 다가가는 인간의 저 멍청한 의지.
나홍진 감독이 그리는 지구인의 의지, 어디까지 갈까
욕설로 뒤덮인 영화의 액션은 그 인간의 끈질기고 어리석은 의지를 불사신 같은 지구인의 신체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늠도 되지 않는 외계의 거대한 위력 앞에 어떻게든 맞서는 지구인의 몸이 바로 영화 ‘호프’를 이루는 대부분이다.이쯤 되면 그동안 인간의 맹목적 의지를 조롱하기도 하고 희화화하기도 하며, 때로는 안쓰럽게 여겼던 나홍진 감독의 시각이 영화 ‘호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그 의지를 우러러보는 것으로 바뀐 것처럼 느껴진다. 지구인의 외계인을 향한 저항을 이토록 성심성의껏 꽉 채워 보여준 뜻은 인간에 대한 약간의 '경의'가 급기야 포함된 결과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초대형 외계의 함선이 대기를 뚫고 지표면에 닿아 폭발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범석과 성애는 다시 호포를 향해 달린다. 성애는 ‘마을 사람들을 다시 모아서 무기를 나눠주고 요새를 만들어 막겠다’는 참 기특한 의견을 내고 범석은 “그렇게 해”라고 대답하고 숨을 헐떡이며 달린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났으나 이 다음에 보여줄 인간의 의지는 거대한 힘에 맞서 어디까지 그 멍청함을 보여줄지 정말 궁금하다. 다음에 보여줄 나홍진 감독의 인간 존재에 대한 속마음은 어디까지 나아갔을지 그게 정말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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