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칼럼] 광복절에 다시 생각하는 ‘보훈’의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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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 2019-08-1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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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광복절은 유난히 뜨거웠다. 아베 총리의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로 시작된 경제전쟁뿐 아니라 밀정 문제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인하는 서적에 대한 논란이 분위기를 달구었기 때문이다. 이런 열기는 광복절 행사를 15년 만에 독립기념관에서 개최하도록 하였고, 일본에 대하여 동아시아의 평화 번영을 위해 함께하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축사를 무게있게 만들었다. 과거의 역사가 미래 세대에게 잊혀져서도 안 되지만, 지나친 부담으로 작용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은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정치에서도 관철되어야 한다.

광복절이 돌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과거 역사에 대한 진솔한 성찰이 부족한 국가와 이웃하고 있다는 운명론적 불행감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권의 상실과 일제의 압제, 분단과 전쟁, 절대 빈곤, 군부 독재와 인권 유린의 어두운 그림자를 극복하고 100년 만에 나라다운 나라로 발전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세기 한국사는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키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투쟁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런 고통과 극복의 경험을 실질적인 역사적 교훈으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분들에 대한 예우를 정성껏 그리고 균형있게 하는 방안을 합의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보훈정책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이다.

한국의 보훈정책은 1949년 10월, 당시의 사회부 후생국을 사회국으로 개편하면서 군사원호과를 설치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전쟁과 함께 발생한 엄청난 전사자와 부상자에 대한 적절한 처우는 당시의 빈약한 정부재정으로는 불가능했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군사원호청이 설치되었고, 1962년 4월 원호처로 개편되었는데, 이의 주 업무는 상이군인에 대한 치료와 원호, 전몰군경 유족의 원호였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 대한 예우는 1967년 '독립유공자사업기금법' 제정과 함께 겨우 시작되었다.

‘원호’가 ‘보훈’이라는 용어로 바뀐 것은 1985년 국가보훈처 발족이 계기가 되었지만, 보훈의 개념과 범위에 관한 논의는 충분하였다고 할 수 없다. 원호의 중심이 나라를 지키는 ‘호국’에 있었다면, 보훈의 중심은 좀 더 넓은 맥락에서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과정에 기여한 사람들에 대한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예우에 기초해야 했는데, 냉전적 이념갈등은 이를 저해하는 근본적 원인이었다. 민주공화국의 원리에 충실한 보훈 정책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탈냉전·탈식민이라는 이행기 정의의 실현 이후에 가능한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보훈이란 무엇인가? 이에 응답하기 위한 진지한 토론은 2017년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로 군 출신이기는 하지만 여성이 보훈처장으로 부임하였고, 보훈 업무의 혁신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어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였다. 이의 중심에는 △호국 중심으로부터 독립과 민주를 균형 있게 아우르는 방안 △보훈단체들을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단체로 탈바꿈시키는 방안이 놓여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독립유공자의 범위에 북한 정권에 참여한 인사를 제외시키는 문제나 보훈단체의 각종 이권이나 특혜를 축소하는 문제 등 많은 논란도 있었지만, 짧은 시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보훈 업무의 혁신은 이제 시작이다. 독립유공자의 경우, 의열 중심에서 벗어나 좀 더 폭넓게 민족의 역량을 보존하거나 인권을 지키는 투쟁까지도 포괄해야 하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보훈단체를 만드는 것도 지난하지만 지속되어야 할 과제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대학 연구소들이 있지만, 식민주의의 문제를 포함하여 보훈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연구소 하나 없다는 것도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보훈처장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보훈업무의 혁신에 관한 논의와 구체적인 개혁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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