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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거울]1948년과 2018년, 남북정상회담 70년 데자뷔

이상국 T&P 대표입력 : 2018-04-15 17:10수정 : 2018-04-15 17:27
2018년 4월17일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주최 학술회의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김구 일행(1948.4.19), 오른쪽은 아들 김신, 왼쪽은 비서 선우진.]



역사는 흘러간 과거의 기록을 넘어서서,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격동기인 1948년에 있었던 대대적인 남북협상(4월19일)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4월27일)을 미러링한다. 그 사이에 있었던 70년이란 시간은 무엇이었는지, 남북간의 소통과 결합의 의욕은, 그간 어떻게 변주되어 왔는지 궁금해 해본 적이 있는가. 분단의 역사를 고단하게 헤엄쳐온 우리는 물줄기처럼 이어진 '통일의 희망'을 진지하게 돌아볼 겨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1948년 그날을 타임슬립(time slip)해본다.

# 1948년 4월 남북협상, 김구와 김일성의 만남

1947년말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정치적 균열이 커졌다. 김구는 단독정부를 결사반대했고,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면서 중도파를 규합한 김규식과 뜻을 같이 한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기획하고 있었고, 김구와 김규식이 이를 반대하며 남북한 통합정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상황이었다. 

1948년 1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했다. 총선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김구는 유엔위원단과의 회담자리에서 남북협상 방안과, 3단계 방안(미소 모두 철군-남북요인회담-총선 정부수립)을 제시했으나 결실을 내지 못했다. 그는 남한 단독정부 반대를 역설하는 대국민 호소문을 내고 이어서 북쪽에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그런데 3월25일 문득 북에서 응답이 왔다. 김일성과 김두봉이 성명서를 통해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 대표자 연석회의를 갖자"고 발표한 것이다.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성명서의 명의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란 긴 이름이었다. 이것은 사실상의 의회인 최고인민회의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최고인민회의가 갖춰졌다는 의미는 남북 통합정부에 대한 논의의 여지가 이미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성명서 이후 3월30일 북쪽의 9개 정당과 단체 이름으로, 남쪽의 한국독립당 등 모든 정당 사회단체에게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하는 편지가 날아든다.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으로 회담의 물꼬가 트이자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정당 사회단체 모두가 참여를 천명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김구 어록)

4월19일 평양의 모란봉극장. 남한 41개 단체, 북한 15개 단체의 695명이 연석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박헌영, 백남운,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좌우익 명망가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 21일에 김일성이 '북조선 정세보고'를 브리핑했고, 백남운과 박헌영이 '남조선 정세보고'를 발표했다. 23일 남북 대표자들은 남과 북의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투쟁을 벌일 것을 약속했고, 미국과 소련의 양국군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군해줄 것을 요구했다. 연석회의 요청서를 미소 양국에 함께 보내기로 했다. 

남북이 소통의 물길이 트이자 활발한 '연석회의 실행방안 논의'가 이뤄졌다. 남북 15일 지도자 협의회는 독재정권 배격, 총선거 실시, 전쟁방지방안 마련 등이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15인 협의회에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홍명희 김붕준 이극로 엄항섭(이상 우익), 허헌 박헌영 백남운(이상 좌익)을 비롯해 북측의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주영하 등 핵심인물이 총망라됐다. 또 4김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과 양김회담(김규식 김일성)도 열렸다. 이 회의에서 남한에 대한 전기송출 문제와 연백 댐의 개방이 합의되었으나 김일성은 회담이 끝나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끊어버린 바 있다.

연석회의 때 남측 장건상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겨레는 공산주의를 갖고는 살 수 없다. 우리가 근로인민당 운동을 하는 것은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념으로 평화롭게 살자는 데 있다. " 이 발언을 문제삼아 당시 북조선에서는 장건상을 보름간 억류했다. 그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친분이 있던 홍명희와 김두봉의 덕택이었다. 또 여운홍은 남로당의 박헌영이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주장하며 남측의 단독총선 참여자를 반동분자라고 욕하자, "우린 남측으로 다시 돌아갈 사람들이다. 어구 수정이라도 하라"고 항의를 하기도 했다. 회담 이후 조소앙은 "이번 방북길은 완전히 실패였다. 우리가 모욕당하고 들러리를 섰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구 또한 남북협상이 북측에 이용당한 것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북의 2차협상 제안을 거절한다. 즉, 김일성이 남한의 5.10 총선거를 빌미로 북쪽에서도 선거를 치뤄 단독정부를 수립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김구는 이것은 또다른 민족분열일 뿐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6월29일 북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이 시기-지역-수단방법에서 차이가 있을지언정 반조각 국토 위에 국가를 세우려는 의도는 똑 같다"고 주장하며, 향후 분열한 남북이 전쟁의 길로 나아갈 것임을 예측했다. 2년 뒤에 벌어질 한국전쟁을 정확히 예언한 것이다. 1949년 6월26일 김구는 불의의 총을 맞고 서거했고, 1950년 6월26일 남북은 전쟁을 시작했다. 그해 11월15일엔 김규식마저 북에 납치되어 서거한다.

# 남북정상회담의 역사와 2018년 4월

70년전 4월 해방공간의 남북협상 이후, 씻지못할 고통을 안긴 전쟁이 있었고 양쪽은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달려왔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전후해 김일성이 남북정상회담을 희망했으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8년 8월15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이 용의가 있다고 회답한 적이 있었으나 성사 직전에 결렬된 바 있다. 노전대통령이 군부와 보수세력의 저항을 우려해 막판에 포기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에 의욕을 보였다. 1994년 7월25일 평양에서 만나는 일정까지 잡았으나 7월8일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바람에 무산됐다. 북한은 유고로 인한 정상회담 연기를 통보해 왔고 북한 조문을 둘러싼 남한 내의 갈등이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튼 것은 김대중 전대통령이다. 2000년 3월9일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이 있었고, 이후 김대중 전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이 있었다.  4월10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회담 개최와 일정을 발표한다. 당초엔 6월12일이었으나 북한에서 기술적인 이유로 하루 연기해 6월13일부터 15일까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다. 두 차례의 정식 회담을 거쳐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다. 

2차 정상회담은 2007년에 있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김만복 특사(당시 국정원장)를 북으로 보냈고 이 자리에서 정상회담을 합의했다. 원래는 여름인 8월28일이 개최일이었으나 북한의 수해로 10월로 연기된다. 10월 2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300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이끌고 휴전선을 넘어 육로로 북한을 방문했다. 두 차례의 회담이 있었고 10월4일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한다.  이 회담은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의미가 부각됐지만,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남북의 대치구도가 굳어져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은 바 있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북핵상황이 심각한 국면에 치닫던 시기에 긴급하게 조율된 화해무드로, 중요한 역사적 분기점을 예고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남북대화에 대한 투철한 소신이 일군 성과라는 지적도 있지만, 70년 전이나 혹은 1,2차 남북정상회담 때와는 다른, 한반도의 급변하는 역학관계가 빚어낸 시대적 소산으로 읽는 시각도 있다. 핵무기를 완성했다고 주장해온 북한과 이 핵심리스크를 제거하려는 미국간의 대치국면이 어떤 방식으로든 전환이 필요한 상황에 봉착했고, 중국의 경제와 국력 전반의 급성장이 새롭게 주변국과 글로벌의 역학구도를 변모시키고 있는 상황 또한 한반도 문제의 중대변수가 아닐 수 없게 됐다. 

북한이 70년전과는 다른 어떤 복안과 솔루션을 쥐고, 문재인대통령을 만나느냐도 중요한 포인트지만,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공동번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는 상호소통 역량이 어느 정도 성숙했느냐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핵미사일을 둘러싼 오래된 불신과 적대적 관점들이 이참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궈낼지도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신철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는 1948년 남북협상과 27일 남북정상회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8년 남북협상은 남측의 역량에 따라 북한 혁명 노선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회담이다. 협상의 성과는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빛이 바랬지만 그 이후에도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대화에 미온적이던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유도하고 합의안 채택까지 성공한 것은 확고해보이는 북한의 혁명전략이 남한의 역량과 노력에 따라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북한이 핵무기를 경제 협상에서의 우위선점과 체제유지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70년을 사이에 둔 두 개의 남북회담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여는 곳이 있다.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와 우사김규식연구회가 주최/주관(국가보훈처와 광복회 후원)하는 남북협상 70주년 기념 학술회의('1948년 남북협상과 한반도의 미래')다. 17일(화) 13시부터 17시까지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실(20층)에서 이신철 교수를 비롯해 이완범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상수 언론인, 박태균 서울대 교수가 발표를 할 예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분단과 통일의 한 기점을 이룰 역사의 거울을 만나는 자리임에 틀림없다. 학술회의에서 독립군의 자손인 김자동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과 김재경 우사김규식연구회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것도 감회가 깊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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