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획] 연애도 '리스크 관리' 시대… '현실판 하트시그널' 가보니

  • 자만추' 가고 '방어적 현실주의' 왔다… 미혼율 폭증 속 '설계된 로맨스'의 이면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에서 참가자들이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에서 참가자들이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그런 감정이 결혼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처음엔 망설였는데, 막상 와보니 방송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에요. 벌써 두 분께 ‘시그널’ 보냈습니다.”

마치 인기 연애프로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들이 어느 4월 오후, 서울 삼성동의 한 라운지 파티 현장에서 들려온다. 

수십 명의 남녀가 오가는 자리에서 한 커플은 그날 밤 단 몇 마디 대화로 관계의 방향을 정했다. 30대 중반의 전문직 임 모 씨와 30대 후반의 대기업 책임연구원 김 모 씨다. 바쁜 일정 탓에 데이팅 앱이나 가벼운 모임을 꺼리던 두 사람은 와인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일상을 나누다 서로의 삶의 태도에 매료됐다. 이들은 ‘2차’도 없이 다음 날 곧바로 식사 약속을 잡았고, 그 만남은 1년째 이어지고 있다. 

“검증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깨달았다”고  이 현커(현실 커플)는 고백한다.

‘자연스러운 만남’이 전설 속 이야기가 되어버린 시대, 대한민국 청춘들의 연애 전선이 스크린 밖 오프라인 광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미혼율 변화 출처국가데이터처
남성과 여성의 미혼율 변화 [출처=국가데이터처]

30대 남성 10명 중 7명은 미혼… “기다릴 여유가 없다” 

이들이 ‘설계된 만남’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배경에는 압도적인 통계 수치가 자리 잡고 있다. 국가데이터처 인구추동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30~34세 미혼율은 남성 74.7%, 여성 58%에 달한다. 35~39세 역시 남성 46.8%, 여성 29.9%로 높았으며, 40~44세 남성 미혼율도 30.1%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애와 결혼은 단순히 ‘늦어지는’ 단계를 넘어 관계 형성 자체가 구조적으로 어려워진 ‘장벽’이 됐다. 현장에서 만난 참가자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상대를 만날 확률이 로또 당첨만큼 희박해진 상황에서, 마냥 우연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입을 모았다.

내향적인 참가자도 예외는 아니다. 스스로를 ‘극 I’라고 밝힌 공기업 남성 박 씨는 운영진의 연결로 프리랜서 아나운서 최 씨와 대화를 시작해 연인이 됐다. 그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평생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에서 참가자들이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에서 참가자들이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참가자 이(36) 씨는 이곳을 찾은 이유를 ‘신뢰’와 ‘자연스러움’으로 설명했다. 그녀는 과거 결혼정보회사(결정사)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결정사는 앉아서 한 시간 동안 자기소개를 하는데, 마치 면접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상대의 조건을 평가하게 되고, ‘이 사람보다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내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기대치만 높아져 관계에 집중하기 어려웠죠.” 

그녀는 결정사의 경우 일주일에 많게는 일곱 번까지 소개팅이 잡히기도 한다며, 이런 구조가 사람을 관계가 아닌 ‘비교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반면 이곳에서는 기본적인 조건 검증 위에 실제 만나며 느끼는 ‘감각’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 씨는 “한 번 꾸미고 나와서 20명을 보면 내가 진짜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지 깨닫게 된다”며 “성과를 만들어온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의 지적인 깊이에서 ‘이 사람은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고 덧붙였다.

특히 로테이션 방식은 심리적 부담을 낮춘다. “일대일 소개팅은 질문을 받으면 계속 답해야 해서 부담스럽지만, 여기서는 불편한 질문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길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결정사는 만남이 ‘숙제’처럼 느껴졌다면, 여기는 사람을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자리라 오히려 더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다”는 소회도 밝혔다.
 
채널A 연애 리얼리티 ‘하트시그널5’의 한 장면 와인바에서 출연자들이 미묘한 호감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패널이 분석하는 방식은 ‘관찰’과 ‘해석’을 핵심 장치로 삼는 프로그램 포맷을 보여준다 출처티빙 오피셜 인스타그램
채널A 연애 리얼리티 ‘하트시그널5’의 한 장면. 한 여성 출연자가 와인바에서 대화를 나누며 호감의 ‘시그널’을 탐색하고 있다. [출처=티빙 오피셜 인스타그램]

TV 속 ‘시그널’을 현실로… 미디어가 만든 연애의 각본

영등포의 한 루프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졌다. 블랙 앤 화이트 드레스코드를 맞춘 40여 명의 남녀가 와인잔을 들고 대화를 나눈다. 참가자 LDJ(35) 씨는 이곳을 “현실판 하트시그널”이라 표현했다. 그는 “사석에서 만나기 어려운 훌륭한 직업군이 모여 만족도가 높다”며 10점 만점을 줬다. 

고려대학교 미디어학과 신혜린 교수는 이를 단순한 비유 이상으로 해석한다. 신 교수는 “여러 후보를 동시에 관찰하고 케미를 비교하며 전략적으로 호감을 주고받는 구조는 프로그램 포맷과 상당히 닮아 있다”며, “연애 프로그램이 로맨스를 ‘해석해야 할 문제’로 연출하듯, 참가자들 역시 미디어의 평가 시선을 내면화해 상대를 읽고 판단한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연애 리얼리티는 일종의 ‘각본’ 기능까지 수행한다. 신 교수는 “요즘 세대는 ‘항상 누군가 보고 있다, 혹은 내가 나를 게시하고 보여준다’는 인식이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며, 참가자들이 여러 이성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시그널을 읽는 과정이 일정 부분 ‘퍼포먼스’의 성격을 띨 수 있다고 봤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에서 참가자들이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에서 참가자들이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신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방어적 현실주의(Defensive Realism)’로 설명한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실패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학벌, 직업, 경제력 등 현실적 조건을 따지는 것이 일종의 적응 전략이 되었다는 분석이다. “젊은 세대가 이런 기준의 모순을 모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전통적 기준으로 작동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안에서 효용을 최대화하려는 선택을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또한 신 교수는 로테이션 소개팅의 매력을 ‘감정 포트폴리오(Emotional Portfolio)’ 논리로 풀이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기대를 거는 리스크를 줄이고, 여러 가능성에 감정적 소모를 분산시키는 방식이다. 선택과 거절의 부담을 분산시킴으로써 관계 형성의 실패 가능성에서 오는 심리적 타격을 낮추는 장치인 셈이다.

이 모임을 운영하는 프리미엄 소셜클럽 ‘더그레이스클럽’은 철저한 인증과 선별을 원칙으로 한다. 신분증과 재직증명은 기본이며, 외모 역시 ‘중상 이상’이라는 사전 사진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참석자의 약 65%는 1990년대생이며,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과 삼성전자·현대차·카카오 등 대기업 종사자가 주를 이룬다.

운영진은 이를 “와서 실망할 가능성을 줄여 시간 낭비를 방지하는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나는 솔로’ 출연자만 6명가량이 거쳐 갈 정도로 ‘결혼 시장의 필수 코스’로 입소문이 났다. 닉네임 ‘Chic’을 사용하는 30대 남성 참가자는 “공부나 직장에 매진해온 사람들은 인연을 만들 기회가 적은데, 이런 모임이 막힌 인간관계를 뚫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의 참가자들이 로테이션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참가자들은 자유 교류와 이동을 반복하며 상대를 탐색한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지난 18일 서울 영등포에서 열린 더그레이스클럽 프리미엄 블랙파티의 참가자들이 로테이션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참가자들은 자유 교류와 이동을 반복하며 상대를 탐색한다. [사진=더그레이스클럽 제공]

흥미로운 점은 이 모임이 팬데믹 기간에도 비대면 방식으로 명맥을 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이용해 매칭이 성사된 경우에만 서로를 공개하는 ‘온라인 로테이션’ 형태로 운영됐다. 하지만 운영진은 “온라인으로는 분위기나 감정의 교류를 완전히 전달하기 어려웠다”며 “AI 시대가 올수록 오히려 사람의 체온을 직접 느끼는 만남의 가치가 더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방역 완화 이후 오프라인 신청은 폭발적으로 늘었으며, 특히 진지한 만남을 원하는 30대 여성의 신청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신 교수는 이러한 현상이 데이팅 앱에 대한 피로감과 대면 욕구가 맞물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형태는 오프라인이지만 작동 원리에는 플랫폼의 최적화 논리가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데이팅 앱의 알고리즘 대신 운영진의 선별과 조건 검증이 필터 역할을 맡고, 참가자들은 여전히 여러 후보를 비교하며 선택하는 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영등포의 밤 10시, 와인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는 이미 다음 약속을 잡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이성을 만나는 자리를 넘어, 미혼율 폭증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가장 똑똑하고도 치열한 ‘사교의 무대’가 되었다. 연애가 ‘운명’의 영역을 떠나 고도로 큐레이션된 ‘콘텐츠’이자 생존 전략으로 진화했음을, 라운지의 뜨거운 열기가 증명하고 있었다.
 
채널A 연애 리얼리티 ‘하트시그널5’의 한 장면 와인바에서 출연자들이 미묘한 호감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패널이 분석하는 방식은 ‘관찰’과 ‘해석’을 핵심 장치로 삼는 프로그램 포맷을 보여준다 출처티빙 오피셜 인스타그램
채널A 연애 리얼리티 ‘하트시그널5’의 한 장면. 와인바에서 출연자들이 미묘한 호감 신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패널이 분석하는 방식은 ‘관찰’과 ‘해석’을 핵심 장치로 삼는 프로그램 포맷을 보여준다. [출처=티빙 오피셜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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