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순간의 기분, 그날의 온도와 습도, 나의 경험은 종종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최씨네 리뷰'는 그렇게 필자의 시선과 경험을 녹여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편집자 주>
영화 '수능, 출제의 비밀'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칠판 한쪽의 디데이(D-day)가 하루하루 줄어드는 수험생에게도, 그 시간을 지나온 지 한참인 어른에게도 수능은 몸이 먼저 기억하는 하루다. 교문을 들어서던 아침의 찬 공기, 컴퓨터용 사인펜을 꽉 쥔 채 1교시 시험지를 기다리던 정적, 마지막 종이 울린 뒤 터져 나오던 한숨. 이날만을 위해 12년을 달려온 학생들과 그 곁에서 마음 졸이는 가족들이 있지만, 같은 하루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쏟는 이들도 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시험지를 만들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웃음으로 풀어낸 이용재 감독의 첫 연출작 '수능, 출제의 비밀'이 그 굳게 닫힌 방의 문을 연다.
행정 착오로 엉겁결에 국가기밀 구역인 '수능 출제 본부'에 갇히게 된 풋내기 국어 교사 맹보람(이선빈 분). 수능 출제라는 막중한 일에 비장한 각오로 임하지만, 쟁쟁한 교수들로 채워진 출제위원회 앞에서 이내 기세가 꺾이고 만다. 명문대 국어교육과 교수인 출제위원장 문주열(유재명 분)은 수능 국어 지문에 칸트를 싣겠다는 은밀한 약속과 제 이름을 남기려는 욕심을 감추고 있고, 대학 동기이자 오랜 라이벌인 검토위원장 박경태(김영민 분)는 국어 문제 출제팀의 지문 앞에서 빨간 펜을 바삐 놀린다. 두 사람이 매일같이 치고받는 사이 맹보람은 점점 위축된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문제없는 문제'를 만드는 것. 그러나 맹보람은 검토하던 지문 하나에서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고, 출제 마감을 앞두고 문주열은 사태를 무마하려 한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해치지 않아'의 각본가로 이름을 알린 이용재 감독은 '수능, 출제의 비밀'을 통해 다시 한번 관객들과 '좋은 어른'에 관한 고민을 나눈다. '수능 시험지의 탄생 과정'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겪는 어른들의 속사정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담고 있다. 수험생이 치르는 시험을 다루지만, 극 중 시험대에 오르는 건 오히려 어른들이다.
영화 '수능, 출제의 비밀'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베일에 싸인 수능 출제 본부를 스크린에 옮겼다. 제작진은 출제위원을 두 차례 지낸 전직 교수의 출제 일기 '수능시험은 누가 어떻게 출제하는가'를 고증의 바탕으로 삼았고 그 덕에 영화 속 출제 본부는 허구의 공간이면서도 그럴듯한 현실감을 얻는다.
출제 본부의 규칙을 하나하나 보여 주는 데도 공을 들인다. 입소와 동시에 이뤄지는 소지품 검사, 인터넷과 통신이 끊긴 채 감시 카메라 아래서 보내는 나날, 쓰레기 배출마저 통제되는 보안 구역. 낯선 규칙 속에서도 마감에 쫓기고 체면 싸움을 벌이는 인물들은 어느 직장에서나 본 듯 낯익다. 이용재 감독은 출제 본부를 기이함과 긴박함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짚었다. 영화는 그 압박을 무겁게 끌고 가는 대신 경쾌하게 비튼다. 허술한 구석을 하나둘 들키는 인물들과 예고 없이 터지는 돌발 상황을 따라가다 보면 철통 보안 뒤편의 일과를 어깨너머로 엿보는 기분이 든다.
한정된 공간의 소동극이 지루할 틈 없이 굴러가는 건 8할이 배우들의 공이다. 송윤숙 미술감독이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머니볼'을 참고해 구상했다는 작은 회의실에서 열 명이 부딪히는 구도는 마치 연극 무대를 연상케 한다. 좁은 공간이라는 제약, 그리고 많은 정보를 대사로 전달해야 하는 부담은 배우들의 차진 연기와 호흡으로 메워 낸다.
맹보람을 연기한 이선빈은 '관객의 눈'이 되어 처음 보는 출제 본부를 둘러보고 그곳의 규칙을 하나씩 익혀 가는 안내자 역할을 한다. 어리바리하고 눈치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밉지 않게' 그려 내며 맹보람이 가진 사명감과 올곧은 심지를 또렷하게 보여 준다.
유재명은 위엄과 허세 사이를 능청스레 오가며 출제위원장의 허영에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비호감으로 흐르기 쉬운 인물에 능청을 입혀 웃음과 씁쓸함을 한꺼번에 끌어낸 유재명의 공이 특히 크다. 문주열과 맞부딪히며 갈등을 팽팽하게 당기는 김영민의 연기는 보는 재미를 키우고, 전석호, 김경민, 황보라, 정수영, 이진희, 이중옥, 류경환 등 연기에 구멍이 없는 배우들은 매 장면 웃음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며 소동극에 리듬을 입힌다.
영화 '수능, 출제의 비밀'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영화는 소동극을 앞세워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함이 깔린 블랙코미디다. '수능'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아이들을 위한 마음과 교육자로서의 본분을 지운 채 제 이익을 좇는 어른들의 속내, 그 허영과 위선을 웃음 속에서 짚어낸다. 솔직한 진심으로 버티는 청년 교사와 그럴듯한 말로 타협을 권하는 기성세대의 대립은 세대 갈등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작은 규모의 소박한 영화로, 신선한 소재와 배우들의 호흡은 안정적이지만 판을 뒤집을 만한 반전이나 강렬한 한 방을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다소 '슴슴한 맛'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영화는 판을 키우기보다 회의실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부딪힘과 소동에 집중하는 쪽을 택했다. '착한 영화', '순한 맛' 블랙코미디인 만큼 갈등을 다소 손쉽게 봉합하는 부분도 약점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럼에도 극장을 나서는 길에는 '좋은 어른'에 대한 고민 하나쯤은 남는다. '수능, 출제의 비밀'은 판을 뒤집는 반전은 없어도 끝까지 웃음을 놓치지 않는 영화다. 수능을 앞둔 이에게도, 그 시간을 지나온 이에게도 부담 없이 즐길 만한 요소의 작품이다. 28일 극장 개봉. 러닝타임은 99분, 관람등급은 12세 이상 관람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