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을 하나씩 착실하게 실현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사명이라는 생각으로 1년간 달려왔다."
취임 1년을 맞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지난 21일 기자들과 만나 물가 상승률을 "G7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억제했다"고 강조했다. 대표 정책인 '책임 있는 적극재정'이 임금과 주가 상승, GDP 확대로 이어졌다고도 자평했다. 그러면서도 "성과를 충분히 체감하지 못하는 분이 많다는 점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식료품 소비세 2년 감세와 지원금을 담은 법안 통과를 호소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내세운 성과와 국민이 느끼는 현실의 차이는 지난 1년의 경제 지표와 시장, 외교 현장에서 드러나고 있다.
일본의 실질임금은 9년 반 만에 8개월 연속 증가했다. 다카이치 정권 출범 이후 월평균 증가율은 1.0%로, 장기 집권한 제2차 아베 정권(-0.9%)과 고이즈미 정권(-0.7%)의 첫 1년과 대조적이다. 올해 춘투(일본의 춘계 임금협상) 임금 인상률은 3년 연속 5%대였고, 2025년도 민간 설비투자는 128조엔으로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올봄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원유와 나프타의 공급 불안이 커지자 정부·여당 일각에서 에너지 절약 요청론이 나왔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경기를 식히고 싶지 않다"며 요청을 보류하고, 휘발유 보조금과 전기·가스 요금 지원 등으로 가격을 눌렀다.
물가 상승이 억제되면 임금에서 물가 상승분을 빼고 계산하는 실질임금도 그만큼 개선될 수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총리가 강조해 온 '가계의 여유'가 아직 정부가 떠받치는 '관제(官製)' 단계라고 진단했다. 내년 4월 시작될 소비세 감세까지 더하면 재정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시장은 금리와 환율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장기금리는 정권 출범 당시 1.6%대에서 9월 하순 한때 3.1%대로 올라 약 30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사히신문은 적극재정과 감세 재원에 대한 불안이 금리 급등의 배경이 됐다고 분석했다. 엔화 가치도 달러당 151엔대에서 7월 163엔대까지 떨어져 39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장기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과 기업 대출 금리, 정부의 국채 이자 부담을 키울 수 있다. 엔저는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에는 유리할 수 있지만, 원료와 에너지를 수입하는 기업과 가계의 비용을 높인다.
구마노 히데오 ABC경제연구소 대표 이코노미스트는 "대규모 재정 투입은 수요를 만들어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치솟는 장기금리를 누르기 위해 총리가 꺼낸 카드는 아베 전 총리 시절의 해법이었다. 일본은행(BOJ)이 국채를 대량으로 사들여 금리를 낮추는 방식이다.
아사히에 따르면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 5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금리 인상(0.75%→1.0%)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은 늘려 달라는 취지로 말했다. 단기금리는 올리더라도 장기금리 상승은 막겠다는 계산이었다고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일본은행은 응하지 않았다.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국채를 대량 매입해 돈을 풀었던 2013년과 달리, 지금은 물가와 엔저를 잡는 게 우선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국채 매입 축소를 이어갔고, 다카이치 정권 출범 후 9월까지 금리를 세 차례 올렸다.
제동은 미국에서도 걸렸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9월 초 나랏돈을 풀고 저금리를 유지해 경기를 띄우는 이른바 '리플레이션 정책'의 중단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9월 정상회담에서 엔저 우려를 나타냈다.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후 트럼프 대통령과 9차례나 협의하며 아베·고이즈미 정권보다 미국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미국 역시 국채 금리 상승에 따른 부담을 안고 있어 일본의 사정을 봐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자 다카이치 총리의 발언도 바뀌기 시작했다. 총리는 국회 소신표명 연설에서 '시장'이라는 단어를 다섯 차례나 꺼냈다. 7일에는 시장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면 세출·세입을 재검토하겠다고 했고, 이튿날 중의원 본회의에서는 "이른바 리플레 정책이 필요한 국면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 정부 관계자는 "말을 바꿔 가며 '시장을 신경 쓰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발언의 변화가 실제 정책 전환으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구마노 이코노미스트는 2040년도까지 민관 370조엔 이상 투자 계획을 들어 "총리의 리플레 부정은 시장을 달래려는 립서비스일 뿐, 실제로는 리플레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연말 예산안과 내년 7월 금리를 정하는 일본은행 심의위원 2명의 교체 인사에서 리플레 정책을 정말 접었는지 판가름 날 것으로 봤다.
총리의 가장 큰 자산은 지지율이다. 닛케이 조사에서 내각 지지율은 출범 당시 74%, 지금도 62%다. 자민당 지지율보다 21%포인트(9월 기준) 높아, 당보다 총리 개인에 대한 지지가 크다.
하지만 높은 지지율이 정책에 대한 호응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사히 조사에서 지지 이유 1위는 출범 직후엔 정책이었지만, 최근에는 '다른 내각보다 나아 보여서'로 바뀌었다. 대안이 없어 지지하는 경향이 커졌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닛케이도 당내에 뚜렷한 기반이 없는 총리가 지지율에 기대 당과 국회를 이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높은 지지율만으로 넘기 어려운 벽이 참의원이다. 자민당과 일본유신회의 연립 여당은 참의원에서 과반에 4석이 모자란다. 올해 예산안도 회계연도를 넘겨 4월 7일에야 참의원을 통과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가계 부담을 덜겠다며 내건 소비세 감세 법안도 야당의 협조 없이는 처리가 어렵다.
중국과의 관계는 더 꼬였다.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발언 이후 중국은 일본산 수산물 수입 중단과 대일 수출 규제, 여행·유학 자제령으로 맞섰다. 올해 1~8월 중국인 방일객은 전년 동기보다 56% 줄었다.
트럼프 대통령과는 9차례 머리를 맞댔지만, 시진핑 국가주석과는 취임 직후 한 번 만난 뒤 대화가 끊겼다. 미국과의 관계 강화에 집중하는 사이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하면서 외교적 부담이 커지는 모습이다.
약 50년간 자민당원으로 활동해 온 기후현의 한 기계 제조업체 경영자는 2월 총선 때 다카이치 총리의 연설을 맨 앞줄에서 들을 만큼 열성 지지자였지만 지금은 "조금 실망했다"고 말한다. 엔저로 몇억엔을 손해 봤고, 1~2주 걸리던 중국 통관도 한 달로 늘었다는 것이다. 다카이치 총리의 경제정책과 외교가 부메랑이 돼 지지자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사례다.
다카이치 총리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다. 시 주석과 마주 앉을 기회가 생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연말에는 감세 재원과 방위비를 함께 담아야 하는 예산 편성이 기다리고 있다. 1년을 달려온 다카이치 정권은 이제 그동안의 청구서를 치르면서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야 하는 2년 차를 맞는다.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내야 하는 2년 차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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