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AI 시대를 흔히 소프트웨어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챗GPT에 질문을 던지면 몇 초 만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프로그램을 만든다. 그래서 AI 경쟁이라고 하면 거대언어모델과 알고리즘, 데이터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기술은 이미 화면 밖으로 나오고 있다. 생성형 AI에서 에이전틱 AI로, 다시 로봇과 자율주행 같은 피지컬 AI로 빠르게 진화하는 중이다.
그러면서 뜻밖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AI가 디지털 세계를 넘어 현실세계로 내려올수록 오래된 학문인 물리학과 화학, 재료과학이 다시 중요해지고, 그것을 실제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만드는 공학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AI가 공학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학을 다시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AI는 겉으로는 비물질적인 지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물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AI를 움직이려면 반도체가 있어야 하고, 반도체를 움직이려면 전기가 필요하다. 연산을 하면 열이 발생하고, 그 열을 식혀야 한다. GPU와 메모리 사이에서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끊임없이 오가야 한다. 거대한 데이터센터를 짓고 전력망과 냉각시설을 연결해야 한다. AI의 밑바닥에는 알고리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칩과 전력, 물질과 에너지가 있다. AI 역시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AI가 부딪힌 세 개의 벽
바로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시작된다. 지금까지 AI 발전의 공식은 비교적 단순했다. 더 많은 데이터를 넣고, 더 큰 모델을 만들고, 더 많은 GPU를 투입하면 성능이 좋아졌다. 이른바 스케일링의 시대였다. 그러나 폭증하는 연산 수요를 물리적 하드웨어가 감당하는 과정에서 AI는 세 개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첫째는 열의 벽이다. 연산량이 늘어나면 전력소비와 발열도 함께 증가한다. 이제는 칩의 성능을 높이는 것만큼 발생한 열을 밖으로 빼내는 일이 중요해졌다. 데이터센터에서는 냉각 자체가 거대한 산업이 되고 있다.
둘째는 미세화의 벽이다. 반도체 회로가 원자 수십 개 수준까지 작아지면서 인간의 공학은 양자역학이라는 자연의 근본 법칙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회로를 작게 만드는 것만으로 성능을 끌어올리던 시대가 한계에 다가서고 있다.
셋째는 메모리와 데이터 이동의 벽이다. AI에서는 계산하는 일 못지않게 데이터를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 아무리 빠른 GPU가 있어도 필요한 데이터가 제때 도착하지 않으면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데이터를 옮기는 데 드는 에너지가 연산 자체보다 많은 경우도 적지 않다.
세 가지 벽은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AI의 다음 도약은 모델의 크기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초과학이 다시 무대 중앙으로 불려 나온다. 빛으로 계산할 수는 없는가. 실리콘을 대신하거나 보완할 새로운 물질은 없는가. 저장과 연산을 하나의 소자에서 처리할 수는 없는가. 인간의 뇌는 어떻게 그토록 적은 에너지로 복잡한 정보를 처리하는가.
이것이 ‘Science for AI’라는 새로운 질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AI가 과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곧 ‘AI for Science’를 이야기했다. AI로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고, 신약 후보를 찾고, 새로운 물질을 탐색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제는 질문을 뒤집어야 한다. 과학은 AI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과학과 AI 사이에 공학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를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기초과학이 새로운 원리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AI 기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빛을 이용한 새로운 계산 원리를 발견했다고 하자. 그것을 실제 컴퓨터에 쓰려면 빛을 발생시키고, 제어하고, 연결하는 소자가 필요하다. 재료과학자가 놀라운 신물질을 발견했다고 하자. 실험실의 작은 시료를 웨이퍼 위에 균일하게 구현하고 수십억 개의 소자로 연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간의 뇌가 약 20와트의 전력으로 놀라운 정보처리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20와트짜리 AI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뇌의 원리를 전자소자로 구현하고, 수많은 소자를 연결하고, 그 위에서 실제 AI가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일을 그 일을 하는 것이 공학이다.
과학이 "무엇이 가능한가"를 묻는다면, 공학은 "그 가능성을 어떻게 작동하게 만들 것인가"를 묻는다. 기술은 "어떤 시스템과 제품으로 구현할 것인가"를 묻고, 산업은 "어떻게 대량생산 해 사회 전체로 확산할 것인가"를 묻는다. 과학이 가능성을 열고, 공학이 그것을 작동하게 만들며, 기술이 제품과 시스템으로 구현하고, 산업이 사회 전체로 퍼뜨린다. 네 단계는 서로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슬이며, AI 시대에는 이 연결고리가 더욱 중요해진다.
AI가 현실세계로 내려올수록 공학은 중요해진다
초기의 생성형 AI가 주로 화면 안에서 작동했다면, 다음 단계의 AI는 현실세계로 나오고 있다. 로봇이 공장에서 일하고, 자동차가 스스로 주변을 판단한다. AI가 전력망을 운영하고 데이터센터를 제어한다. 의료기기가 환자의 상태를 분석하고, 스마트공장이 생산공정을 스스로 최적화한다.
현실세계의 AI는 알고리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센서와 반도체, 모터와 배터리, 통신망과 전력망이 있어야 한다. 기계가 움직이다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도록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수십만 개의 부품과 소프트웨어가 동시에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바로 공학의 세계다. AI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공학의 중요성을 높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변화는 한국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최고 수준의 거대언어모델 경쟁에서 한국은 미국 빅테크에 뒤처져 있다. 그러나 AI의 경쟁 무대가 소프트웨어에서 반도체와 로봇, 자동차와 공장, 에너지와 데이터센터로 넓어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국에는 HBM과 첨단 제조공정을 갖춘 반도체가 있다. 배터리와 자동차, 로봇과 통신, 조선과 원전 산업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진짜 자산은 공장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소재와 부품과 장비를 연결하고, 수율을 높이고, 불량을 줄이고, 복잡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작동시켜 대량생산까지 끌고 가는 능력, 곧 수십 년간 제조현장에서 축적한 공학적 역량이다. AI 시대에는 이 역량을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
대학과 출연연, 기업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 기업의 역할도 새롭게 보인다.
대학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곳이어야 한다. 어떤 새로운 물질이 가능한가. 새로운 계산 원리는 없는가. 지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0년, 20년 뒤의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기업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제품으로 만들 것인가. 어떻게 가격을 낮출 것인가. 어떻게 수백만 개를 생산해 세계시장에 공급할 것인가.
그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성공 여부를 알 수 없는 기술에 기업이 10년을 투자하기는 어렵고, 대학 연구실이 거대한 실증시설을 운영하기도 어렵다. 그 긴 시간과 위험을 견디는 것이 KIST 같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존재 이유다. 출연연은 대학에서 발견된 과학적 가능성을 실제 기술로 만들어 보고, 대규모 장비로 실증하고, 기업이 쓸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출연연은 대학과 기업 사이의 단순한 중간기관이 아니라 과학과 공학, AI와 산업을 잇는 국가의 가교가 되어야 한다.
공학인의 역할도 달라진다
그러나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AI 시대의 공학인에게는 과거와 다른 자세가 요구된다.
자기 전공만 잘 알아서는 부족하다. 반도체 엔지니어도 AI를 이해해야 하고, AI 연구자도 에너지와 반도체를 알아야 한다. 기계공학자는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전기공학자는 물리학과 재료과학의 새로운 발견을 이해해야 한다. 공학인 스스로가 과학과 산업을 잇는 연결자가 되어야 한다.
책임도 더 커진다. AI와 로봇, 자율주행과 바이오 기술은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한다. 성능만 높이면 되는 시대가 아니다. 안전한가, 신뢰할 수 있는가, 에너지를 얼마나 쓰는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까지 따져야 한다. AI 시대 공학인의 질문은 "이것을 만들 수 있는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것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쓸 것인가"까지 나아가야 한다.
다시 공학의 시대다
산업혁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문명은 과학적 발견만으로 열리지 않았다. 전기, 자동차, 항공기, 반도체, 인터넷은 모두 과학의 가능성을 현실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바꾼 공학의 힘을 거쳐서야 문명을 바꾸었다. 증기기관은 아예 열역학이 정립되기 전에 먼저 등장해 거꾸로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다. 과학과 공학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밀어 올리는 관계다. AI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AI 혁명의 전반전이 알고리즘과 데이터, 컴퓨팅 파워의 경쟁이었다면, 후반전은 자연의 법칙과 현실세계를 상대로 한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열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 에너지를 어떻게 아낄 것인가.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AI를 로봇과 자동차와 공장에 어떻게 안전하게 결합할 것인가. AI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모두 공학의 질문이다.
한국에는 이 선순환을 만들어 낼 드문 조건이 갖춰져 있다. 근본 질문을 던지는 대학, 긴 연구와 실증을 감당할 출연연, 세계적인 제조기업과 산업현장이 한 나라 안에 모두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각각을 따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로 묶어 과학–공학–AI–산업이 맞물려 돌아가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AI의 다음 황금기는 모델의 크기가 아니라 과학적 질문의 깊이와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공학적 상상력에서 열릴 것이다. 그 시대의 공학인은 단순히 기술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과학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고, AI와 인간이 함께 살아갈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바야흐로 AI가 공학을 소환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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