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영의 우.다.세] 손녀를 잃은 할머니, 친구를 잃은 소녀의 비밀 –영화 '물비늘'

  • 상실이 우리의 곁에 머물 때

▲ ‘다양성 영화’는 단순히 장르를 뜻하기보다 상업 중심의 주류 영화와는 다른 시선·형식·주제를 가진 영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양한 국적, 장르, 소수성 등을 포함하는 범주를 갖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며 외면했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마주하는 역할을 기대해본다. '우'리들의 '다'양한 '세'상을 위해.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진영화 물비늘 스틸컷
[사진=영화 '물비늘' 스틸컷]


헤드폰과 수경을 쓴 여성이 금속탐지기를 들고 강바닥을 더듬는다. 물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몸짓은 기이하면서도 절박하다. 손녀를 잃은 지 1년, 예분(김자영)은 여전히 강가를 떠나지 못한다. 장례식장에서 죽은 이의 몸을 정돈하고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염습사지만, 정작 자신의 손녀 수정(설시연)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래프팅 사고로 실종된 수정의 유해를 찾기 위해 매일 강을 찾는 예분의 시간은 그날에 멈춰 있다.

예분은 손녀의 흔적에만 매달리는 게 아니었다. 시신이라도 찾아야 죽음을 확인하고, 그래야 비로소 애도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 하지만 강은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는다. 물속을 뒤지고 강가를 헤매는 일이 반복될수록 수정이 돌아올 가능성은 희미해지지만, 수색을 멈추는 순간에는 그 가능성마저 자신의 손으로 포기해야하기 때문이다. 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더는 찾을 수 없다는 절망 사이에서 예분은 매일 같은 자리로 돌아온다.

예분이 더욱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유는 수정과 크게 다퉜던 기억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손녀에게 상처를 줬다는 후회는 시간이 흐른다고 옅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그날의 말과 행동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때 조금만 다르게 말했다면, 한 번만 더 마음을 헤아렸다면 결과도 달라졌을까.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 예분의 마음을 맴돈다.

수정의 친구 지윤(홍예서)도 그 사건 이후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촉망받던 수영선수인 지윤에게 물은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이제 물속은 미지의 세계와 같이 두렵기만 하다. 수정의 실종 이후 물속에서 수정으로 추정되는 실루엣을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물이 무서워진 지윤의 마음에도 죄책감이 크게 자리해있다. 할머니와 싸운 수정과 래프팅을 하던 날 수정이 구명조끼를 불편해하자 끈을 느슨하게 해줬던 기억 때문이다. 자신이 한 행동이 사고로 이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자꾸만 지윤을 죄책감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예분이 강에서 수정의 흔적을 찾는 동안 지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날을 되풀이한다.

같은 아픔, 다른 죄책감을 가진 두 사람이 동행하는 일이 생긴다. 수정의 기일에 예분을 찾아온 친구 옥임은 암 말기 환자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을 손녀 지윤을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예분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수정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인 지윤이 갖고 있는 그 날의 사건에 대한 진실이 마음이 걸리지만 어린 아이를 혼자 두기엔 예분의 마음이 걸린다. 두 사람은 결국 동행하기로 한다. 
 
사진영화 물비늘 스틸컷
[사진=영화 '물비늘' 스틸컷]

두 사람은 수정이라는 한 사람을 동시에 잃었지만 다른 감정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예분에게 지윤은 손녀와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고의 진실을 품고 있는 사람이며, 지윤 역시 예분 앞에서 마음껏 슬퍼할 수 없다. 자신의 죄책감을 털어놓게 되면 예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지윤의 침묵은 마냥 편하지 않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친구가 사망했을지 모른다는 공포 사이에 갇혀 자신에게 애도할 자격이 있는 지조자 의문을 가진다.

옥임이 떠나고 두 사람이 한집에 살게 되면서 서로를 향한 불편함은 일상의 작은 순간마다 드러난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이 받은 상처부터 떠올리게 되고, 침묵은 오해를 키운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며 두 사람은 조금씩 상대의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예분은 지윤이 감춰온 진실을 알게 되고, 지윤은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일을 털어놓는다. 

특히 ‘물비늘’은 수정의 혼백이 나타나는 장면 등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린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인지, 남겨진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모습을 마주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수정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두 사람이 더는 각자의 죄책감 속에만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예분과 지윤은 서로를 통해 수정의 부재를 다시 바라본다. 그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것은 상처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에게 남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물비늘’은 상실을 극복하는 일이 무엇인지 쉽게 그리지 않는다. 용서했다고 해서 후회가 사라지는 것도,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모든 고통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떠난 사람을 되돌릴 수 없고, 마지막 순간을 고쳐 쓸 수도 없다.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완전한 화해나 확실한 회복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청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내일도 슬픔은 찾아올 테지만 이제 그 슬픔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물 위에 반짝이는 물비늘은 손으로 움켜쥘 수 없고, 물결이 일면 이내 흩어진다. 사라진 사람의 흔적도 그렇다. 붙잡을 수 없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애도란 떠난 사람을 완전히 보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잃은 마음을 안고도 누군가의 곁에서 다시 살아갈 방법을 찾아가는 일인지 모른다.
 
사진영화 물비늘 스틸컷
[사진=영화 '물비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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