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로 향하는 K-머니] 한일 경협 훈풍에 슈퍼 엔저까지…韓기업 대일 투자 역대급 활황

  • 삼성·SK 등 첨단 패키징·AI 인프라 집결……'기술동맹'으로 체질 전환

  • 정치적 리스크 해소·국제 공조 탄력…기업 63% "한일 경협 필요"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오른쪽과 고바야시 켄 일본상의 회장이 지난 8월 열린 제15회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오른쪽)과 고바야시 겐 일본상의 회장이 지난 8월 열린 '제15회 한일상공회의소 회장단 회의'에서 공동성명서에 서명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대한상공회의소]


국내 주요 기업들이 일본을 연구·생산 거점으로 삼고 투자 보폭을 넓히고 있다. 판매 법인을 세우는 데 그쳤던 진출 방식이 반도체 소부장 생태계와 원천기술을 직접 품으려는 전략으로 바뀌는 모습이다. 엔저와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한·일 공급망 공조가 맞물리면서 핵심 인프라 구축과 기술 선점을 겨냥한 대일 투자는 한층 속도를 낼 전망이다.

27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직접투자통계에 따르면 한국 기업이 일본에 새로 세운 법인은 2024년 318곳에서 2025년 386곳으로 늘었다. 올해 상반기에도 172곳이 문을 열었다. 누적 법인 수로는 중국·미국·베트남에 이어 네 번째로 많다. 

진출 양상도 달라지는 추세다. 그동안 대일 투자는 단순 판매 거점 확보가 주를 이뤘다.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누적 대일 투자액 70.6%가 '현지 시장 진출' 목적이었으며 제조업 비중은 14.7%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정보통신업 신규 법인이 2023년 45곳에서 2024년 60곳으로 늘어나는 등 업종이 다변화하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연구·생산 거점을 직접 구축하는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요코하마에 첨단 패키징 연구거점인 '어드밴스드 패키지 랩(APL)'을 전격 개소했다. 2024년부터 5년간 400억엔(약 3500억원)을 투입하고 내년까지 연구인력을 100명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여러 칩을 하나로 묶는 첨단 패키징은 인공지능(AI) 반도체 주도권 다툼에서 핵심 승부처로 꼽힌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6월 일본에 기가와트(GW)급 AI 데이터센터인 'AI 팩토리'를 짓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결합해 2028~2029년 가동하는 것이 목표다. 메모리 공급 부족이 이어지자 반도체 생산시설 후보지로 일본을 검토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일본을 "훌륭한 후보지"로 꼽으며 장비·소재 기업 집적도를 강점으로 들었다.

펀드 조성을 통한 원천기술 확보에도 나섰다. 포스코홀딩스를 비롯해 두산·현대차 등은 지난 8월 IMM인베스트먼트 재팬의 '한·일 퓨전펀드'에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해 핵융합 기업 교토퓨저니어링에 투자했다.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제조·사업 파트너가 필요한 일본 딥테크 기업에 한국 대기업의 생산 역량을 맞대는 구조다.

'슈퍼 엔저'라는 환율 호재까지 더해지며 대일 투자는 더욱 탄력을 받을 분위기다. 이달 원·엔 평균 재정환율은 100엔당 849원으로 2007년 12월(829.2원) 이후 18년 10개월 만에 가장 낮다. 기준 환율 적용 시 4000억원이 들던 400억엔 규모의 사업비가 엔저 효과로 3400억원 수준으로 줄면서 투자비 부담을 약 600억원 덜 수 있게 된 것이다.

엔저는 과거에도 한국 기업의 일본행을 부추겼다. 원·엔 환율이 800원대로 내려앉았던 2023년 일본 내 한국 신규 법인은 269곳으로 당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2024년에도 318곳으로 기록을 다시 경신했다. 다만 당시에는 법인 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체 투자 금액은 오히려 2022년 11억5000만 달러에서 2024년 6억4000만 달러로 반 토막 났다. 소규모 판매 법인 위주의 진출에 그쳤기 때문이다.

올해는 양상이 다르다. 원화 약세로 원·엔 환율이 100엔당 900원대에 머물며 엔화 부담이 오히려 컸던 상반기에만 26억7000만 달러(약 3조5375억원)에 이르는 투자가 몰렸다. 엔저 효과가 본격화하기 전부터 투자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이창민 한국외국어대 융합일본지역학부 교수는 "과거엔 국내 기업의 대일 투자가 소규모 유통 법인 위주라 질적 성장이 미흡했지만 지금은 일본의 소부장 기술과 한국의 뛰어난 제조·양산 능력을 결합하는 수평적 기술 동맹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가 보조금 지급 등 첨단 기업 유치에 적극 나서면서 대일 투자의 질 자체가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양국 간 경제협력 강화 기조도 기업들의 투자 부담을 낮추고 있다. 한·일 정상은 올해 잇따른 회담으로 반도체 등 첨단산업 공급망 협력을 확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한일상공회의소 역시 지난 8월 핵심광물 비축과 AI·반도체 협력 강화를 골자로 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경제계에서도 기대감이 높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 상위 1000대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 62.4%가 "한국 경제 성장을 위해 한·일 경제협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불필요하다는 응답은 3%에 그쳤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들이 단순히 일본 시장 하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한·미·일 공급망 블록화를 활용해 글로벌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경제 안보 차원의 움직임"이라며 "양국 간 정치적 리스크 해소와 환율에 따른 자금 부담 경감까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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