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와이드 사설] 국가유산청, 저급한 심의와 폐쇄적 전문가 카르텔을 혁파하라

  • 증도가자 과학적 조사 결과 누락·왜곡과 부결 종용 의혹 규명해야… 기존 활자 101점의 심의 오류 바로잡고 책임 물어야

인류 문명은 새로운 진실과 기존 권위의 충돌 속에서 발전해 왔다. 갈릴레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이 그랬다. 새로운 증거 앞에서 기존의 판단을 고치는 것이 학문의 본령이다. 그러나 학문적 권위가 행정권력과 결합하면 진실을 밝히기보다 과거의 결정을 지키는 데 급급해지기 쉽다.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證道歌字)'를 둘러싼 국가유산청의 행정은 이러한 폐단을 여실히 드러낸다. 2010년 세상에 공개된 증도가자는 이듬해 보물 지정이 신청됐지만 2017년 문화재위원회에서 부결됐다. 이후 과학적 조사자료의 누락과 왜곡, 담당 공무원의 부결 종용 의혹이 잇따랐다. 감사와 국정감사까지 이어졌으나 16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 심의의 적정성과 책임 문제는 풀리지 않고 있다.
 
2019년 공개된 증도가자證道歌字 101점 사진연합뉴스
2019년 공개된 '증도가자'(證道歌字) 101점 [사진=연합뉴스]

증도가자가 1239년 이전에 제작돼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인쇄에 사용됐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1377년 간행된 『직지심체요절』보다 적어도 138년 앞선 금속활자의 실물 증거가 된다. 세계 인쇄문화사의 중요한 기록을 새롭게 밝힐 가능성이 있는 유물이다. 그 역사적 가치를 판단하는 국가기관의 심의에는 한 치의 편견이나 행정적 편의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

2017년 보물 지정 심의에서는 원 조사보고서에 기록된 활자본과 번각본의 크기 차이가 최종 보고 과정에서 누락되거나 다르게 설명됐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전문가의 추정적 판단인 '사료됨'이 확정적인 의미의 '확인됨'으로 바뀌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국가가 역사적 가치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기초자료의 정확성조차 확보하지 못했다면 심의 결과의 신뢰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후 감사 관련 분석에서는 통계청 자문 등을 반영할 경우 일부 활자의 식자가 가능하다는 결과가 제시됐다. 과거 조판 불가능 판단의 근거를 다시 따져야 할 이유다. 당시 조사자료가 어떤 경위로 변경됐으며 부결 결정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규명해야 한다. 출토 경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 역시 다른 전래 문화유산에 적용한 기준과 비교해 형평성을 살펴야 한다.

당시 담당 공무원의 발언은 심의의 공정성에 더욱 심각한 의문을 남긴다. 2017년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장으로 심의 간사를 맡았던 황권순은 회의에서 부결할 경우 문화재청의 수고를 덜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 국정감사에서 임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회의록을 근거로 이를 지적하자 허민 국가유산청장도 부적절했다는 취지로 답했다.

국가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해야 할 공무원이 행정 편의를 부결의 이유로 거론했다면 공직자의 본분을 저버린 처사다. 이후 기획조정관을 거쳐 자연유산국장에 오른 황권순이 당시 심의자료의 보고와 부결 결정에 어떤 역할을 했으며, 후속 검증 과정에는 어떻게 관여했는지 밝혀야 한다. 기존 판단을 유지하거나 재심의를 지연시키는 데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도 조사해야 한다.

당시 상근 전문위원이었던 정제규의 역할도 규명해야 한다. 정제규는 증도가자의 조판 가능성에 부정적인 판단을 내렸지만 이후 감사 관련 분석에서는 일부 활자의 식자가 가능하다는 결과가 제시됐다. 더욱이 과거 심의에 참여했던 정제규가 감사 후속 조치와 관련한 논의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의 과거 판단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에 그 판단에 관여했던 전문가가 참여한다면 검증의 독립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증도가자證道歌字 사진연합뉴스
증도가자(證道歌字) [사진=연합뉴스]

박문열 전 문화재위원장과 정제규의 학문적 관계를 비롯해 당시 심의 관계자들이 후속 검증에 미친 영향도 살펴야 한다. 국가유산위원회는 특정 교수들의 권위를 지켜주는 학술 친목단체가 아니다. 국민을 대신해 국가유산의 가치를 판단하는 공적 심의기구다. 특정 학맥과 인맥을 중심으로 심의권이 장기간 집중되고 관료조직이 그 권위를 뒷받침한다면 과학적 증거보다 기존 판단이 우선시될 위험이 커진다.

공무원은 위원회의 전문적 판단을 내세우고 위원회는 행정기관이 제공한 자료에 책임을 돌리는 관행도 끝내야 한다. 현행 「국가유산위원회 규정」은 해당 안건에 직접 관여한 위원이나 전문위원의 제척을 규정하고 있다. 과거 심의의 적정성을 다시 판단하는 과정부터 이해충돌을 차단해야 한다. 폐쇄적인 전문가 집단과 관료조직의 유착 가능성을 방치한 채 공정한 심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난 23일 국정감사에서 임오경·조계원 의원이 지적한 핵심도 이미 실시한 과학적 조사 결과가 2017년 심의 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문제였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새로운 심의위원 구성에 동의하고 기존 활자 101점에 대한 철저한 검증 방침을 밝혔다. 국가유산청은 2017년 조사보고서와 심의자료, 감사 결과를 대조해 당시 부결 판단에 이른 경위를 밝히고 관계자들의 책임을 규명해야 한다.

새로운 일괄공모를 추진하더라도 기존 조사자료의 누락과 왜곡 문제를 바로잡는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 과거 심의 관계자들의 이해충돌을 차단하고 독립적인 전문가들이 기존 활자 101점의 조사 결과를 검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조사에 앞서 이미 확보한 과학적 자료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잘못된 심의 과정을 바로잡는 것이 순서다.

국가유산청이 지켜야 할 가치는 진리·정의·자유다. 새로운 증거 앞에서 과거의 권위를 내려놓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며 자유로운 학문적 검증을 보장해야 한다. 국가유산위원회의 자리는 특정 전문가에게 보장된 종신직이 아니며 역사적 진실 또한 어느 학파의 전유물일 수 없다. 국가유산청은 폐쇄적 전문가 카르텔과 관료주의의 폐단을 혁파하고 역사적 진실에 봉사하는 기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역사는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책임져야 할 행정은 더 이상 기다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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