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이런 일이 벌어지는 시대가 다시 왔다.
그것도 3000년 전 이야기다. 트로이 전쟁도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이타카도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오디세우스도 한국의 영웅이 아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의 관객들이 3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한 남자가 바다를 떠돌다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오디세이》의 한국 흥행은 이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바라볼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적인 흥행 열풍 속에서 한국 관객의 반응도 뜨겁다. 특히 놀란 감독이 고집해온 IMAX 포맷으로 이 작품을 경험하려는 관객이 몰리면서 ‘무슨 영화를 보느냐’ 못지않게 ‘어디에서, 어떤 화면으로 보느냐’까지 영화 경험의 일부가 됐다.
왜 AI 시대의 인간이 3000년 전 이야기에 이토록 열광하는가. 그리고 세계에서도 가장 빠르게 디지털 문명을 받아들이고 AI 혁명의 한복판을 달리는 한국인은 왜 오디세우스의 귀향에 마음을 빼앗기는가.
답을 찾으려면 잠시 영화관을 떠나 인간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오디세이》는 모험영화이기 전에 돌아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돌아가는 존재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다. 10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 하지만 귀향에는 다시 10년이 걸린다. 바다가 막고 신들이 개입하며 괴물이 나타난다. 아름다운 여인들의 유혹이 기다리고 동료들은 하나둘 죽어간다.
그런데도 그는 간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다.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다.
이것이 《오디세이》가 3000년 동안 살아남은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힘이다. 인간은 떠나는 존재인 동시에 돌아가는 존재다. 젊어서는 학교와 직장을 찾아 집을 떠나고, 성공을 위해 고향을 떠나며, 때로는 더 넓은 세상을 찾아 나라를 떠난다.
그러나 이상하다. 멀리 갈수록 돌아갈 곳을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성공한 사람도 마지막에는 고향을 생각하고, 돈을 많이 번 사람도 가족을 찾는다.
인생은 어쩌면 거대한 오디세이다.
출발이 있고 모험이 있으며 성공과 실패가 있다. 사랑과 배신이 있고 유혹과 절망이 있으며, 그 모든 것의 마지막에는 귀향이라는 오래된 인간의 꿈이 기다린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한국인에게 ‘고향’은 특별하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 이 이야기가 유난히 강하게 울리는가.
한국인의 근현대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은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살아야 했던 민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와 연해주, 일본 등지로 흩어졌고,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람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산업화 시대에는 농촌의 젊은이들이 서울과 부산, 울산과 인천으로 향했다. 광부와 간호사는 독일로 갔고 노동자들은 중동으로 갔으며 이민자들은 미국과 캐나다, 남미와 호주로 떠났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고향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노래에는 유난히 고향이 많고 어머니가 많다. 떠남과 기다림과 귀향이 많다. 명절이면 수천만 명이 움직인다. 고속도로가 막혀도 가고 기차표를 구하기 어려워도 간다. 집으로 간다.
오디세우스가 10년의 전쟁을 마치고 다시 10년을 헤매면서도 이타카를 포기하지 않았던 마음을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고향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이다.
페넬로페가 없었다면 이타카도 없었다. 그러나 귀향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다. 돌아갈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오디세우스가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이타카에서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면 그의 10년 항해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는 페넬로페가 있었다.
남편은 10년 동안 전쟁터에 있었고 다시 10년 동안 바다를 떠돌았다. 왕이 사라진 이타카에는 권력과 재산을 노리는 구혼자들이 몰려들고 남편은 이미 죽었을 것이라며 새로운 선택을 강요한다.
그러나 페넬로페는 기다린다.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는 모험영화에서 사랑 이야기로 변한다. 젊어서 《오디세이》를 읽으면 키클롭스와 세이렌이 보인다. 키르케와 칼립소가 보이고 전쟁과 모험이 보인다. 나이가 들어 다시 읽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페넬로페가 보인다. 기다림이 보인다. 집이 보인다.
그리고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영웅을 만드는 것은 떠남보다 돌아옴이다. 인류의 영웅서사는 대개 정복을 이야기한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더 강한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영웅의 조건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조금 다르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새로운 제국이 아니다. 작은 섬 이타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위대함은 트로이를 무너뜨린 데에만 있지 않다. 돌아왔다는 데 있다.
세상에는 떠나는 용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돌아오는 용기도 필요하다. 성공하고도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권력을 얻고 자신을 잃는 사람이 있으며, 돈을 벌고 가족을 잃는 사람이 있다.
멀리 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잊은 사람도 있다. 현대인의 비극이다.
키르케와 칼립소, 인간을 붙잡는 유혹. 오디세우스의 항해를 가로막는 것은 괴물과 폭풍만이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이 있다. 유혹이다.
키르케가 있고 칼립소가 있다. 특히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자신의 섬에 붙잡아두려 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에서 오디세우스에게 불멸과 영원한 젊음까지 제안한다. 늙지 않을 수 있다. 죽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인간의 삶을 선택한다. 필멸의 존재인 페넬로페와 자신이 태어난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오디세이》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철학적 질문 가운데 하나다.
영원히 사는 것과 인간답게 사는 것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오디세우스는 인간을 선택한다.
늙는 것을 받아들이고 죽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다가 언젠가 죽는 인간의 운명을 신의 영원성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3000년 전 호메로스가 던진 이 질문이 AI 시대에 다시 살아난다.
인류는 지금 새로운 칼립소를 만나고 있다. AI와 첨단기술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엄청난 능력을 준다. 기억을 확장하고 지식을 불러오며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린다. 생명과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려 하고 뇌과학과 로봇기술은 인간의 신체적·지적 능력을 확장하려 한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야 한다.
오래 사는 것이 인간의 목표인가. 많이 아는 것이 인간의 완성인가. 강해지는 것이 행복인가. AI가 대부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칼립소의 섬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곳에 영원히 머물면 이타카로 돌아갈 수 없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기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인간이 기술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타난다.
놀란은 1970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런던과 미국 시카고를 오가며 보냈다. 두 나라, 두 문화 사이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소년 놀란에게 영화는 일찍 찾아왔다. 일곱 살 무렵 아버지의 슈퍼8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타워즈》를 본 뒤 장난감으로 영화를 찍던 소년은 훗날 세계 영화산업에서 가장 거대한 화면을 고집하는 감독이 됐다.
특히 시카고에서의 영화관 경험은 흥미롭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대형 스크린 영화를 접했고, 거대한 화면이 인간에게 주는 압도적인 체험을 일찍 경험했다. 훗날 IMAX와 대형 필름 포맷을 자신의 영화언어로 끌어들인 감독의 뿌리를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소년 시절 바라보던 거대한 화면이 훗날 그의 영화 세계가 됐다.《다크 나이트》에서 시작된 IMAX에 대한 집념은 《인터스텔라》와 《덩케르크》 《테넷》 《오펜하이머》를 거치며 더욱 강해졌고 마침내 《오디세이》에서 새로운 단계에 도달했다.
그래서 오늘 서울 용산의 관객들이 IMAX 좌석 한 장을 구하기 위해 예매 전쟁을 벌이는 장면에는 묘한 시간의 순환이 있다. 시카고에서 거대한 영화 화면에 매료됐던 한 소년이 반세기 뒤 서울의 관객들을 거대한 화면 앞으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자란 소년. 놀란의 또 다른 성장 배경도 흥미롭다. 그는 청소년기에 영국의 명문 기숙학교인 헤일리베리에서 공부했다. 영국 성공회 전통과도 역사적으로 연결돼 있지만, 놀란 자신이 성장 과정에서 가톨릭적 교육환경과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되는 대목도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신중해야 한다. 놀란의 영화세계를 특정 종교의 교리로 설명하거나 그를 신앙적 감독이라고 규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은 분명하다. 죄와 책임. 희생과 구원. 시간과 영원. 죽음과 존재.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다.
《인터스텔라》에서는 사랑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설 수 있는가를 물었고, 《오펜하이머》에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에 대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를 물었다. 《인셉션》에서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묻고, 《덩케르크》에서는 죽음 앞의 인간과 공동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디세이》에서는 다시 묻는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 질문들은 종교만의 질문은 아니다. 철학과 문학, 예술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온 인간의 근원적 질문이다. 그러나 신과 인간, 죄와 구원,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성장환경이 그의 상상력에 하나의 문화적 토양이 됐다고 읽어보는 것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놀란이 종교를 설교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가 인간의 근원을 묻는다는 사실이다.
놀란은 왜 ‘진짜’를 고집하는가. 놀란은 디지털 기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실제 공간과 실제 물체, 실제 빛과 필름을 고집해왔다. 《오디세이》에서도 실제 바다와 배, 거대한 자연환경 속으로 배우와 카메라를 밀어 넣었다.
이것은 단순한 촬영 취향이 아니다. 그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파도가 있다. 바람이 있다. 바위와 모래가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자연 앞에 작은 인간 하나가 서 있다.
인간·문화·자연이다.
거대한 IMAX 화면이 역설적으로 인간의 작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작은 인간이 폭풍을 견디고 유혹을 이기며 끝까지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확대한다. 그래서 기술의 최첨단에서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게 한다. 그것이 놀란 영화의 힘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영화관은 왜 다시 붐비는가.
《오디세이》 열풍은 영화산업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숏폼과 스마트폰의 시대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영화관의 죽음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용산 IMAX의 표를 구하기 어렵다. 암표까지 등장한다.
왜인가.
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콘텐츠 자체보다 ‘경험’이 중요해진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과 거대한 스크린 앞에서 수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숨을 죽이며 지중해의 파도를 바라보는 것은 같은 영화이면서 전혀 다른 경험이다.
영화관은 현대의 작은 의식 공간이 된다. 어두운 공간에 사람들이 모인다. 불이 꺼진다. 그리고 3000년 전 이야기를 함께 듣는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유시인이 들려주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술은 달라졌다. 인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디어를 하는 사람이라면 《오디세이》를 또 다른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3000년 동안 살아남는 콘텐츠란 무엇인가.
속보가 아니다. 유행도 아니다. 알고리즘도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을 건드리는 이야기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검색엔진이 바뀌어도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AI가 발전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오디세이》는 살아 있다.
한국의 관객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지금까지 8백50만 명의 관객이 모두 같은 영화를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놀란을 보러 간다. 어떤 사람은 맷 데이먼을 보러 가고 어떤 사람은 IMAX의 압도적인 화면을 경험하러 간다. 어떤 사람은 트로이 목마와 키클롭스, 세이렌과 키르케, 칼립소를 만나러 간다.
젊은 관객은 모험을 볼 것이다. 중년은 사랑과 상실을 볼 것이다. 부모가 된 사람은 텔레마코스를 바라볼 것이고, 오랫동안 부부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페넬로페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또 다른 것이 보인다. 귀향이다. 인간은 같은 영화를 보면서 자기 인생을 본다.
좋은 예술은 하나의 정답을 주지 않는다. 거울을 준다.《오디세이》가 3000년을 살아남은 이유다.
이제 한국에서는 《오디세이》가 천만 관객을 넘어설 것인가에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천만이라는 숫자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왜 2026년의 한국인이 이 영화를 선택했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AI 혁명의 한복판이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직업이 흔들리고 산업이 재편되며 인간이 오랫동안 자신만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지식과 창작의 영역까지 AI가 들어오고 있다.
바로 그 순간 한국인은 3000년 전 인간을 만나고 있다. 기묘한 역설이다. 최첨단 IMAX 기술을 통해 가장 오래된 인간의 이야기를 본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결국 하나의 오디세이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노래한 지 거의 3000년이 흘렀다. 제국은 무너졌다. 종교와 사상이 바뀌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인간은 달에 갔다. 인터넷이 생겼고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과 대화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사람은 사랑한다. 기다린다. 떠난다. 길을 잃는다. 유혹받는다. 실패한다.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돌아간다.
그래서 《오디세이》는 고전이 아니다. 현재다.
오디세우스도 3000년 전에 죽은 영웅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안에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직장을 향해 집을 나선다. 누군가는 사업을 위해 외국으로 떠나고 누군가는 성공을 찾아 가족과 떨어져 산다. 누군가는 병원에서 삶과 싸우고 누군가는 실패한 자리에서 다시 출발한다.
모두 항해 중이다.
우리 모두에게 키클롭스가 있다. 우리 모두에게 세이렌이 있고 칼립소의 섬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돌아가야 할 이타카가 있다. 그곳은 고향일 수도 있다. 가족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잃어버린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인간이 어디에서 왔고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오래된 영성의 질문과도 만난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멀리 갔느냐만이 아니다.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가.
성공보다 중요한 질문이다. 돈보다 오래가는 질문이다. 권력보다 무거운 질문이다.
3000년 전 호메로스가 물었다. 2026년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시 묻는다. 그리고 지금 서울 용산의 IMAX 영화관에서 표 한 장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경쟁하며 그 질문을 만나고 있다. 천만 번째 한국 관객이 영화관에 들어가는 날에도 질문은 똑같을 것이다.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인간은 떠난다.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간다. 그 길에서 사랑하고 실패하고 싸우고 용서하고 늙어간다. 그 길고 험한 항해가 인생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오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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