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원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경제계와 산업계에서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인디애나대학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대경제연구원 부사장, 현대자동차 기획총괄본부장 사장, 현대로템 대표이사 부회장, 삼천리 대표이사 사장,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산업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국가 경제와 기업 경영의 중심부를 걸어온 인물이다. 그의 이력만 놓고 보면 먹과 붓, 여백과 수묵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경제학은 숫자를 다루는 학문이고 기업 경영은 냉철한 판단과 전략의 세계다. 금융정책 또한 감성보다는 데이터와 논리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숫자로 계산할 수 없는 기억이 있고, 손익계산서에 기록할 수 없는 마음이 있으며, 어떤 통계표로도 측정할 수 없는 성찰이 존재한다. 정순원의 문인화는 바로 그 영역에서 출발한다.
현대자동차 기획총괄본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세계 자동차 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몸소 경험했다.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그가 강조한 것은 단기적 성과보다 장기적 축적이었다. 좋은 기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제품도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반복과 개선이 축적될 때 비로소 경쟁력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철학은 훗날 그의 그림 세계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먹 한 번 번진다고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붓 한 번 휘둘렀다고 작품이 탄생하는 것도 아니다. 수십 번의 덧칠과 지움, 시행착오와 인내가 쌓일 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태어난다. 그의 수묵추상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적층’과 ‘마멸’이라는 개념은 사실 기업 경영의 원리와도 닮아 있다. 기업이 성과를 쌓아가는 과정이라면 예술은 의미를 쌓아가는 과정이며, 기업이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며 경쟁력을 확보하듯 예술 역시 불필요한 것을 비워낼 때 깊이를 얻는다.
현대로템과 삼천리 대표이사를 거치며 그는 더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공장의 노동자와 연구소의 엔지니어, 현장의 영업사원과 해외 사업 파트너들, 수많은 고객과 이해관계자들이 그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산업의 본질이 결국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은 문인화가 추구하는 정신과도 다르지 않다. 문인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기술이 아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자연을 경외하며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정신의 예술이다. 그래서 정순원의 그림에는 화려함보다 사람 냄새가 난다. 갯벌에 정박한 배와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 바람을 견디는 나무와 넓은 여백 속의 풍경들이 그의 화면을 채운다. 그 대상들은 특별히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그 안에 삶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금융통화위원의 자리는 수많은 경제지표와 데이터를 분석하고 국가 경제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위치다. 그러나 경제학을 오래 연구한 사람일수록 숫자의 한계를 안다. 통계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국민들의 불안과 희망, 기업의 기대와 두려움, 미래를 향한 꿈과 절망은 숫자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정순원이 여러 자리에서 “경제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문인화 또한 같은 맥락에 서 있다. 그림은 그림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그것은 관람자의 기억과 경험이 들어와 머무는 공간이며, 작품이 말을 멈추는 자리에서 관람자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는 창이다.
이번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사계도》 연작은 이러한 철학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작품들이다. 조선 중기 문인 권호문의 「한거십팔곡」에서 영감을 받은 이 연작은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라는 자연의 순환을 인간의 생애와 연결한 존재론적 성찰이다. 봄은 시작이고, 여름은 성장이며, 가을은 성숙이다. 그리고 겨울은 비움과 정리의 시간이다. 그러나 겨울은 끝이 아니다. 다음 봄을 준비하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정순원의 삶 역시 그러했다. 경제학자로서의 봄이 있었고 기업인으로서의 여름이 있었으며 정책가로서의 가을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문인화가로서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인 《떨감》은 그래서 더욱 상징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콤한 홍시를 좋아하지만 정순원은 굳이 떨감을 선택했다.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완성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 겸손함은 그가 평생 유지해온 삶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기업 경영에서도 그는 늘 배움을 강조했고, 경제학에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으며, 예술에서도 스스로를 초심자로 규정한다. 정답을 얻는 사람보다 질문을 놓지 않는 사람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몸소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문인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인품과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붓끝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긴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순원의 그림은 기술보다 인생을 보여준다. 기교보다 시간을 보여주고, 성취보다 성숙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빨리 성공하기를 원한다. 빨리 결과를 얻고 빨리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감은 서리를 맞아야 단맛을 내고 나무는 겨울을 견뎌야 봄꽃을 피운다. 사람 역시 긴 시간을 통과해야 비로소 깊어진다.
정순원의 《떨감》은 바로 그 사실을 말해준다. 경제학자로 성공했고 기업인으로 성공했으며 정책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초심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고 74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용기 있는 도전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 이후 안주를 선택하지만 그는 다시 배움과 도전의 길을 택했다.
그래서 《떨감》은 그림 전시가 아니다. 한 인간이 어떻게 익어가는가를 보여주는 삶의 기록이다.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무엇으로 익어가고 있는가. 정순원의 그림 앞에 서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생의 진정한 성공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성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74세의 첫 개인전은 결코 끝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다. 경제학자에서 기업인으로, 기업인에서 정책가로, 정책가에서 문인화가로 이어진 그의 여정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의 떨감은 지금도 익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달콤한 시간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10일(수) 문을 연 '정순원의 수묵화 개인전'은 오는 18일(목)까지 인사동 무우수 갤러리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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