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서울에서 이어지는 시간이다. 강남에서 자동차를 타고 한두 시간이면 닿는다. 정치와 경제, 언론과 기업의 중심에서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이 아직 서울과 인연을 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거리다.
다른 하나는 자연의 시간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고, 용문산 자락을 따라 계절이 오간다. 봄이면 산에 꽃이 피고, 여름이면 논이 푸르며, 가을이면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겨울이면 산과 마을이 함께 침묵한다.
용문산과 천년 고찰 용문사가 있고, 지평의 들판과 작은 마을들이 이어진다. 골프장이 있고 산책길이 있으며,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힐링 공간도 있다.
그리고 그 길목에 대길식당이 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 용문로 857.
거창한 간판을 내건 고급 한정식집이 아니다. 이름난 셰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물과 전, 생선과 된장찌개 같은 우리 밥상의 익숙한 음식들이 올라오는 소박한 한정식집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음식만큼 흥미로운 것이 있다. 사람이다.
대길식당에는 언제부터인가 서울의 높은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언론인과 정치인, 전직 국회의원과 고위 공직자, 기업인과 금융인, 정보기술 전문가들이 찾아온다. 한때 대한민국을 움직이던 사람들이 이제는 용문산 아래 작은 밥집에서 마주 앉는다.
그래서 대길식당은 식당이면서 사랑방이다.그리고 은퇴한 오피니언 리더들의 작은 ‘인생 2막 학교’이기도 하다.
◆계급장을 떼고 밥상에 앉다
이곳 사람들의 중심에는 언론계 원로 양휘부 전 한국프로골프협회 회장이 있다.
KBS 기자로 언론인의 길을 시작해 정치부 기자와 보도제작국장을 거쳤고, 방송위원회 상임위원과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을 지냈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장을 거쳐 제17대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회장까지 맡았다.
방송과 광고, 케이블TV와 골프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력에는 대한민국 현대 미디어 산업의 한 시대가 들어 있다.
이제 그의 생활 무대 가운데 하나는 서울의 방송국도, 협회 회장실도 아니다. 양평의 산과 들이다.
오랜 세월 사람과 조직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삶의 기준도 달라진다. 회의시간보다 해 뜨는 시간이 중요해지고, 조직의 인사보다 계절의 변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대길식당에 앉으면 전직 사장도, 전직 회장도 결국 밥 한 그릇을 앞에 놓은 한 사람이다.
그것이 이 집의 매력이다. 대길식당 밥상에는 계급장이 없다.
또 한 사람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금융감독위원장과 금융감독원장을 거쳐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한국 금융·경제정책사의 대표적 관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금리와 환율, 금융시장과 경제위기를 고민하던 사람이 인생 후반에는 배우자와 함께 자연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숫자는 거대하다. 성장률, 금리, 환율, 국가채무, 외환보유액….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다른 숫자가 중요해진다. 오늘 몇 걸음을 걸었는가. 배우자와 몇 끼를 함께 먹었는가. 친구와 몇 번 웃었는가. 자녀와 얼마나 따뜻한 말을 나누었는가.
결국 국가의 경제를 걱정했던 사람도 한 가정의 남편이고 아버지다. 인생의 마지막 결산표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산이 더 많이 남는다.
정치도 세월 앞에서는 한 장의 이력서다. 김석준 전 국회의원도 이 일대에서 만날 수 있는 반가운 얼굴 가운데 하나다.
대구를 정치적 기반으로 국회에 들어갔고 교수와 전문가의 길을 거쳐 정치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현역 시절에는 국가 정책과 지역 발전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겠지만, 이제는 대길식당 같은 소박한 공간과 주변의 휴식처를 찾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자연스럽다.
장영달 전 국회의원의 삶은 또 다르다. 그의 청춘에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민주화를 요구하다 투옥됐고, 이후 정치에 들어가 네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다. 감옥과 국회. 한 인간의 생애에 이처럼 극적인 두 공간이 함께 들어 있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은퇴하면 그 치열했던 정치적 대립도 조금씩 멀어진다. 여당도 야당도 밥을 먹는다. 보수도 진보도 늙는다. 권력을 가졌던 사람도 병원에 가고, 손주 이야기에 웃으며, 먼저 떠난 친구를 그리워한다. 은퇴에는 여야가 없다.
그것이 세월이 인간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엄정한 민주주의인지 모른다.
용문을 이야기하면서 용문사를 빼놓을 수 없다. 용문산 자락 깊숙이 자리 잡은 천년 고찰이다.
그곳에는 긴 세월을 견뎌 온 거대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수많은 왕조가 흥하고 쇠했으며 권력자가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 남았다. 용문사 은행나무 앞에 서면 인간의 권력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이 지역에서는 한때 충남도지사를 지내며 유력 정치인으로 주목받았다가 자신의 잘못으로 정치와 사회에서 큰 추락을 겪은 안희정 전 지사에 관한 이야기도 들린다. 그가 이 일대에서 지내며 새벽이면 용문사를 찾아 예불하고 지난 삶을 돌아본다는 이야기가 지역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할 수 있지만, 잘못에 대한 법적·사회적 책임과 별개로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의 삶을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는 결국 자기 몫이기 때문이다.
용문사는 누구의 과거를 지워 주는 곳도 아니고 누구에게 면죄부를 주는 곳도 아니다.다만 인간이 홀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산사의 새벽은 그래서 깊다.
직함도 없다. 박수도 없다. 권력도 없다. 한 인간만 남는다.
◆골프 한 라운드, 사우나 한 번도 인생이다
용문과 지평의 매력은 대길식당 하나에 머물지 않는다.
조금만 움직이면 지평의 들과 산을 배경으로 자리한 양평TPC가 있고, 양동 쪽에는 더스타 휴 골프 앤 리조트가 있다.
젊은 시절 골프가 비즈니스였다면 은퇴 후의 골프는 조금 달라진다. 몇 타를 쳤는지가 전부가 아니다. 누구와 걸었는지가 중요하다. 좋은 친구 세 사람과 네다섯 시간을 걷고, 산을 바라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운동이고 휴식이며 교류다.
골프를 마치고 대길식당에 와서 된장찌개와 나물 반찬을 놓고 늦은 점심을 먹어도 좋다.
반대로 대길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지평의 미리내힐빙클럽으로 향할 수도 있다. 월산저수지 인근 자연 속에서 족욕과 테라피를 즐기고 몸을 쉬게 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보면 용문과 지평에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길이 만들어진다.
용문산과 용문사에서 마음을 씻고, 골프장에서 몸을 움직이고, 대길식당에서 밥을 먹고, 미리내에서 다시 몸과 마음을 쉰다.
이 정도면 거창한 해외여행이 부럽지 않다. 힐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잘 먹고, 잘 걷고, 좋은 사람을 만나고, 때때로 혼자 있는 것.
그것이 힐링이다.
왜 은퇴한 공직자와 정치인, 기업인과 언론인들이 양평을 좋아할까. 이유는 단순하다. 서울과 가깝지만 서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서울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돌아오면 산과 강이 기다린다. 강남의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도 이곳에서는 텃밭을 바라본다. 매일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살던 사람도 산길에서는 혼자 걷는다.
서울에서는 명함이 사람을 설명한다. 양평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설명한다. 그 차이가 크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유례없이 빠르게 성장한 나라다. 그 과정에서 한 세대가 모든 것을 바쳤다.
산업화를 이끈 기업인들이 있었고, 국가 시스템을 만든 공직자들이 있었으며,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 언론과 방송을 만들고 정보통신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이제 70대와 80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의 은퇴 이후다. 평생 축적한 경험과 지혜를 어떻게 사회적 자산으로 남길 것인가. 은퇴한 장관과 국회의원, 기업인과 언론인이 골프만 치다 생을 마친다면 국가적으로도 아깝다. 그들의 경험은 대한민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문과 지평의 이런 작은 공동체가 의미가 있다. 대길식당 밥상에서 정치 이야기도 하고 경제 이야기도 하되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후배들에게 경험을 들려주면 된다. 젊은 창업자에게 실패 이야기를 해주고, 젊은 공직자에게 공직의 원칙을 이야기하고, 젊은 정치인에게 권력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를 알려주면 된다. 그것이 원로가 할 일이다.
◆잘 올라가는 것보다 잘 내려오는 것이 어렵다
한국 사회는 성공하는 방법을 많이 가르쳤다. 좋은 대학에 가는 법,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법, 국회의원이 되는 법, 장관이 되는 법, 기업을 키우는 법은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있다.
잘 내려오는 법이다. 권력에서 내려오고, 자리에서 내려오고, 명예에서 내려와 다시 평범한 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올라가는 것보다 어렵다. 잘 내려온 사람에게 은퇴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자유의 시작이다. 아침에 산을 걷는다. 좋은 사람과 골프를 친다. 오래된 친구와 밥을 먹는다.
아내와 차를 마신다. 책을 읽고 후배를 만난다.
그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도 인생이다.
다시 대길식당이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래서 좋다. 한 상에 올라오는 소박한 우리 음식처럼 이곳에서는 사람도 조금씩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전직 장관도 있고 전직 국회의원도 있다. 방송사를 이끌었던 사람도 있고 기업을 경영했던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밥상 앞에서는 모두 같은 사람이다. 숟가락 하나. 밥 한 공기. 된장찌개 한 그릇. 그리고 친구 몇 사람. 인생 후반부에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보다 더 잘 보여 주는 풍경도 드물다.
용문산이 있고 용문사가 있다. 지평의 들이 있고 골프장이 있다. 몸을 쉬게 할 힐링 공간이 있고 무엇보다 함께 늙어 갈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있다. 문화가 있다. 자연이 있다.
대길식당이라는 작은 지방 식당을 굳이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맛있는 식당이어서만은 아니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모이면 이야기가 생긴다. 이야기가 쌓이면 문화가 된다. 그 문화를 자연이 품으면 하나의 삶의 터전이 된다.
양평 용문과 지평이 지금 그렇게 변하고 있다.
서울에서 치열하게 인생 1막을 살아낸 사람들이 이곳으로 와 인생 2막을 시작한다. 권력을 내려놓고 사람을 얻는다. 명함을 내려놓고 자연을 얻는다.
속도를 내려놓고 시간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것을.
좋은 사람. 좋은 자연. 그리고 함께 먹는 따뜻한 밥 한 끼. 대길식당의 밥상은 오늘도 소박하다.
그러나 그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인생까지 소박했던 것은 아니다. 파란만장했던 대한민국 현대사를 지나온 사람들이 이제 용문산 아래에서 밥을 먹으며 함께 늙어 간다.
그 풍경이 아름답다. 인생 1막이 성취의 시간이었다면, 인생 2막은 성숙의 시간이어야 한다. 잘 올라갔다면 잘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잘 내려온 뒤에는 다시 잘 살아야 한다. 사람과 함께. 문화와 함께. 자연과 함께.
양평 용문의 대길식당에서 만난 것은 결국 음식이 아니라 그런 인생의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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