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Arrival)'에서 외계 비행체들이 세계 곳곳에 내려앉자 처음에 정보를 나누던 각국은 외계인의 말을 제각기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불신이 커지고 공동 통신망은 하나씩 끊어진다. 전쟁의 파국을 막은 것은 끊어진 대화를 다시 잇고 흩어진 정보를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다. 지금 인류가 인공지능(AI)을 앞에 두고 서 있는 자리가 그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AI는 인류의 미래와 더 먼 미래를 바꿀 기술이다. 어느 한 나라가 독점해서도 안 되고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런데 세계는 벌써 AI를 미국 것과 중국 것으로 가르며 선을 긋고 있다.
지난 7월 16일 중국 상하이에서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ICO) 설립협정 서명식이 열렸다. 러시아, 벨라루스, 세르비아, 브라질, 쿠바,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아시아 12개국과 아프리카 10개국 등 모두 29개국이 창립회원으로 서명했다. 한국과 일본, 주요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빠졌다. 지금은 9개국이 늘어 총 38개국이 회원이다. 중국이 제안했지만 형식상 유엔헌장의 목적을 따르는 독립적인 정부 간 국제기구를 표방한다. 주요 서방국이 빠졌다 해서 출범 자체를 중국 편 국가들의 행사로 축소할 일은 아니다.
설립협정은 AI의 국제협력과 세계적 거버넌스를 촉진하고, 기술이 유익하고 안전하며 공정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시진핑 주석은 이튿날 세계인공지능대회에서 AI 발전이 한 나라의 독주가 아니라 세계 협력의 교향곡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개발과 안전, 문명과 거버넌스를 함께 다루고 글로벌 사우스도 AI의 혜택을 누리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왕이 외교부장이 중국 대표로 서명한 협정도 공동협의·공동건설·공동향유(共商·共建·共享), 인간 중심, 인류 전체의 이익을 원칙으로 세웠다.
중국은 한국에 급이 높은 관료를 보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정부는 주중대사관 주재관을 파견하는 데 그쳤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과의 기술협력 등 '다른 측면'도 고려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한국에 WAICO 설립협정 서명이나 정식 가입을 공식 요구했다는 보도는 없지만 한국에 고위급 파견을 요청하면서 WAICO 가입을 요청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여하간 세계 최초의 AI 국제기구 출범식에서 기술의 흐름을 파악하고 우리 입장을 밝힐 기회에 미국 눈치를 보며 축소 대응했다면 외교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이재명 정부는 올해 초 중국 국빈방문 뒤 한·중 관계의 ‘전면 복원’을 말했고, 진영이 아닌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한·중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AI와 신산업을 양국 협력의 새 영역으로 넓히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런 정부가 시진핑이 직접 참석한 최대 AI 국제행사에 고위급 파견조차 꺼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은 미국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2015년 6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입했다. 박근혜 숭미정권도 필요하다면 살피지 않은 미국 눈치를 진짜 대한민국을 추구한다는 현 정부가 살피고 있다.
서방권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팍스 실리카(Pax Silica)가 있다. 한·미·일 등 25개 회원이 참여한 정부·민간 협의체다. AI만이 아니라 핵심광물, 에너지, 반도체, 데이터센터, 첨단제조, 인력까지 전 주기 공급망을 ‘신뢰할 수 있는 국가’끼리 묶으려 한다. 중국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중국 의존을 줄이고 공급망 밖으로 밀어내려는 성격이 강하다. 한국은 지난 6월 워싱턴에서 열린 제2차 팍스 실리카 서밋에 외무차관을 보냈다. 한국은 그때 ‘AI 기회 파트너십 공동성명(AI Opportunity Statement)'에 서명한 35개국 중 하나다.
인공지능 글로벌 파트너십(GPAI)도 있다. 프랑스와 캐나다가 제안해 2020년 출범했고 지금은 OECD와 통합된 협의체다. 인간 중심, 안전성, 신뢰성, 인권에 기반한 AI를 정책과 연구로 연결하며 44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은 창립회원이다. 중국은 없다. 하지만 GPAI가 WAICO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OECD 스스로 세계의 AI 거버넌스 구상들이 겹치거나 달라질 수 있으므로 폭넓은 참여가 필요하다고 밝힌다. 한국은 GPAI에서 규칙을 만들고, Pax Silica에서 실익을 챙기며, WAICO에서 중국과 글로벌 사우스의 시장, 인재, 기술망에 접속하면 된다.
8월 14일 로이터 특종 보도에 따르면 미 국무부는 지난 6월 ‘AI 기회 파트너십 공동성명’에 서명한 35개국에 보낼 서한 초안을 작성했다. 서한은 미국 주도의 Pax Silica와 중국 주도의 WAICO에 동시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라 한다. 현재 두 조직 공통 회원국인 희토류 부국 카자흐스탄을 겨냥해 압력을 가하면서 앞으로 AI 미·중 대결을 본격화하겠다는 신호다. 비구속적인 협력체를 강제적 수단으로 사용해 회원국들을 옥죄겠다는 의도다.
중국의 AI 기술은 가볍게 볼 수 없다. DeepSeek는 미국의 최신 칩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조건에서도 효율적인 학습과 공개형 모델로 세계의 예상을 흔들었다. 문샷AI가 만든 Kimi도 장문 처리와 코딩, AI가 여러 단계를 수행하는 에이전트 기능에서 빠르게 격차를 좁히고 있다. 최근 공개한 Kimi K3는 매개변수가 많은 대형 모델이라는 사실보다 엄청난 성능을 가진 모델을 세계의 기업과 연구자들이 직접 내려받아 운영하고 개조할 수 있도록 공개했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을 넘어섰다고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중국은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다.
이런 중국을 협력 대상에서 빼고 한국이 AI 초격차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국 시장에 물건을 더 파는 차원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협력할 공간은 무궁무진하다. 공동연구, 공개형 모델의 활용과 검증, 한국어와 아시아 언어 데이터, 제조 AI, 의료·기후·재난 분야 등이 그것이다. 중국의 검열과 데이터 보안 문제는 따져야 하지만 미국 기업의 독점과 데이터 반출 문제도 같은 잣대로 따져야 한다. 위험을 검증하고 보안장치를 두어야 한다고 무조건 문을 닫을 일은 아니다. AI 강국이 되려면 좋은 기술과 인재와 함께 좋은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인류는 경쟁을 협력으로 바꾸어 기술의 지평을 넓힌 경험이 있다. 미국의 우주정거장 프리덤과 러시아의 미르-2 계획은 각자 비용과 재정난에 부딪혔지만 두 계획의 자산을 합쳐 1998년 국제우주정거장(ISS)이 만들어졌다. 핵융합 실험로(ITER)도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1985년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데서 출발해 2007년 정식 출범했다.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로 겨루던 시절에도 미래 에너지 연구만큼은 인류 공동의 과제로 남겨둔 것이다. AI 안전과 기후·질병 연구도 어느 순간 이런 거대과학의 규모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냉전과 국내 산업 보호가 겹치면서 NTSC, PAL, SECAM이라는 서로 맞지 않는 아날로그 TV 표준이 갈라졌고, 제조업체와 방송사는 지역마다 다른 장비와 변환체계를 갖춰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국제전기통신연합이 1982년 BT.601이라는 공통 디지털 규격을 마련하기 전까지 일이었다. 위성항법은 공존의 방식이다. 미국의 GPS, 러시아의 글로나스, 유럽의 갈릴레오, 중국의 베이더우는 각자 독립성을 유지한다. 어느 나라든 안보와 기반시설을 단 하나의 외국 시스템에 맡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각국의 시스템은 수신기 한 대로 여러 위성군의 신호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호환성과 공존을 확대해 왔다.
AI도 이런 길을 갈 수 있다. 각자의 모델과 반도체는 개발하되 핵·생물·사이버 위험, 기후와 감염병, 재난예측, 저개발국 지원에서는 정보를 나누고 공동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아울러 AI 모델 자체는 경쟁시키되 접속규격, 안전성 시험, 생성물 표시, 사고보고 방식은 공동화할 수 있다. 인류가 AI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당장 대립을 그만두고 서로 얼싸안자는 식으로 세계평화주의적인 인류애를 호소하는 것이 지나친 낭만이겠지만 과거 우리가 냉전과 열전의 환경에서도 ISS, ITER, TV, 위성항법 분야에서 보인 협력의 정신은 되살려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외교의 지평을 넓혀나가야 한다. 한·중 관계의 전면 복원과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말하면서 중국과의 AI 협력에는 몸을 사리는 태도는 설득력이 없다. 또 한·미 동맹과 기술협력이 중국과 협력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한국은 AI 선진국으로 가야 한다. ‘양다리’를 걸치지 말라는 미국의 서한이 실제로 발송된다 해도 불구속적인 협의체를 강제조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냉정한 논리로 반박해야 한다. 영화 '컨택트'에서 인류를 구한 것은 불신 속에서도 다시 통신했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진영논리가 설 곳은 없다.
필자 소개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지금은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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