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50)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 부자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회고와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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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이한우 단국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전쟁을 일으켜 놓고 이란을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라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1965년 베트남전쟁 시기에 커티스 르메이 미 공군 참모총장은 북베트남을 폭격해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호언했다. 미국 대통령이 60년이나 지난 얘기를 지금 하고 있으니, 미국의 대외정책은 베트남전쟁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베트남전쟁에 대한 재평가는 전후에 계속 이뤄졌다. 미국인의 회고록도 셀 수 없이 발간됐다. 그 가운데 베트남전쟁 당시 미 국방장관으로서 이 전쟁을 수행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회고(In Retrospect)>가 잘 알려져 있다. 2022년에 그의 아들 크레이그 맥나마라(Craig McNamara)가 회고록을 내 눈길을 끈다. 그 책의 제목은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했기에(Because Our Fathers Lied)>이다. 여기에 맥나마라 가족이 겪은 ‘미국의 베트남전쟁’ 내용도 포함돼 있다. 맥나마라 부자는 베트남전쟁에 관하여 어떤 회고와 반성을 했는가? 아들 크레이그의 눈을 통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반성적 시각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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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맥나마라의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했기에” 책 표지]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베트남전쟁
 
크레이그의 아버지 로버트 맥나마라가 미 국방장관으로서 베트남전쟁의 주된 지휘자 역할을 하고 있던 시기에, 크레이그는 뉴햄프셔주 콩코드에 있는 세인트 폴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장로교회에 다녔지만, 크레이그는 퀘이커 신앙에 경도되어 있었다. 세인트 폴에 다니기 전에 퀘이커 학교인 시드웰 프렌즈 스쿨에 다녔기 때문일 것이다. 크레이그는 고등학교 때만 해도 베트남전쟁의 본질에 관하여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1964년에 일어난 통킹만 사건에 대해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통킹만 사건은 베트남 북부 통킹만에서 정보를 수집하던 미 구축함에 북베트남이 어뢰를 발사했던 사건이다. 존슨 대통령은 미 의회에 이를 과장되게 보고하여 의회로부터 통킹만 결의를 얻어내 베트남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다. 나중에 크레이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크레이그는 학교에서 “미사일 맥나마라”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가 럭비 선수로서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시 아버지 때문에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던 건 아니었으나 역설적 힌트를 담고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에서 낮은 성적을 기록했고 난독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10학년을 다시 다녀야 했다. 그와 함께 학교를 다니던 어느 학생의 아버지는 1950-60년대에 CIA의 유럽 지역 담당 최고위 인사 중 한 명이었는데 자살했다. 크레이그가 그 학생과 함께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아버지를 감싸고 있던 지속된 슬픔을 조금씩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크레이그는 세인트 폴에 다니는 동안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친구가 주도하는 반전 간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에게 베트남전쟁과 관련하여 아버지의 시각을 보여주는 정보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이를 보내주지 않았다. 이들 부자는 이후에도 베트남전쟁에 관하여 대화하지 않고 거리를 뒀고 주변 얘기만을 나눴다.

크레이그가 세인트 폴을 다니기 시작하던 1965년에 노만 모리슨이 국방부에서 분신했고 로저 라포트가 유엔 앞에서 분신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런 일들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크레이그와 그의 아버지 간에 큰 갈등은 없었지만, 그 아버지는 베트남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를 회피했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며 크레이그는 슬픔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 걸음, 침묵 속에서 야반도주하는 것 같은 슬픔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겉으로는 아버지를 지지했다. 하지만 그와 어머니는 위궤양에 걸렸다. 크레이그는 언론 등 외부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진실성을 얘기했지만, 그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진실함과 정직함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 일로 인해 가족들이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았어야 했다고 했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맥나마라의 시각은 왜 지속됐을까?
 
1968년 2월에 로버트 맥나마라는 국방장관직에서 사직하며 백악관에서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크레이그도 여기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자부심, 어색함, 놀라움, 불편함이 혼합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학교 기숙사 방에 미국 국기를 거꾸로 걸어 놓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소극적이나마 미국 정부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표시했다. 그의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가져온 여러 물건 중 베트콩 깃발을 벽에 붙여놓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회고에서 미국민들에게 이중적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크레이그는 그의 아버지가 다른 진실을 외면했고 아버지 자신에게 이중적이었다고 평가했다. 크레이그는 아버지가 회고록을 1995년에 출판한 후 자기 스스로 베트남전쟁에서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참전 군인들은 그가 진정한 전쟁의 대가를 이해하기 바란다고 했다. 로버트 맥나마라는 그의 <회고>에서 베트남전쟁에서 미국 정책결정자들이 과오를 범했다고 인정했으나, 그가 말하는 과오는 베트남전쟁 참전 자체가 아니라 전략상 과오였다. 그들은 전쟁을 숫자로 계량화하여 판단했기에 과오가 있었다고 했다. 맥나마라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에서도 전략상 과오를 언급했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의 부당함을 말하지는 않았다. 크레이그가 아버지에게 왜 그리 오랫동안 변함없이 베트남에 대한 생각을 고수하는지 물었는데, 그 아버지는 ‘충성심’이라고 답했다. 크레이그는 아버지의 충성심을 존 에프 케네디와 린든 존슨, 그리고 미국 체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해했다. 크레이그는 그의 아버지가 베트남에 사과하기를 바랐으나 그 아버지는 그럴 수 없었다.
 
 베트남전쟁이 주는 교훈
 
미국은 1960년대에 남베트남 방어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가 1970년대 초 국제정세의 변화로 정책을 수정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에 미국은 ‘베트남전의 베트남화’ 정책을 추구했고,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마침내 미국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며 종전한 후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한다. 북베트남의 공격이 있으면 지원하겠다고 남베트남에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의 국익에 따라 움직였다. 어떤 나라든 자국의 국익에 따르지 않는 국가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 국익이 참다운 국익인지 따져보고 정책결정자들의 행위에 대한 반성은 있어야 한다. 최근 미국의 이란 전쟁을 보며, 훗날 트럼프 대통령이나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했기에”의 다른 버전을 낼 자녀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필자 주요 약력
▷서강대 정치학박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대학원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 역임 ▷한국-베트남 현인그룹 위원 역임 ▷현 단국대 아시아중동학부 베트남학전공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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