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는 단연 '르노'다. 잠시 테슬라, 샤오미, BYD 등 화려한 전기차 브랜드에 밀려 고전 중이지만 르노는 1898년 태어난 업계 원로로, 푸조·메르세데스 벤츠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성차 기업 중 하나다.
브랜드 창립자인 루이 르노는 본인이 만든 자동차를 파리 몽마르트 언덕으로 직접 끌고 가 마을 사람들을 단숨에 매혹시킨 '데모 마케팅'의 원조다. 어린 시절부터 기계광이자 천재 엔지니어로 불린 그는 '기술의 대중화'를 외치며 르노를 창업해, 세계 최초로 전륜구동 해치백 양산, 소형 해치백, 현대적 개념의 탱크 개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루이 르노는 "최고의 기술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이 누릴 때 의미가 있다"는 어록을 남겼다. 한평생 기술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과오로 말년에는 감옥에서 비참하게 생애를 마쳤다. 그의 사후 르노 역시 국가에 편입되면서 사기업이 최초로 국영 기업이 되는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역설적이지만 창립자의 경영 철학은 국유화 된 르노를 이끌던 피에르 드레퓌스 회장에 의해 부활한다. 드레퓌스 회장은 "자동차는 누구나 입는 청바지 같아야 한다"는 청바지 경영론을 내세웠다. 자동차는 '시민의 발' 역할을 해야 하며, 누구나 부담 없이 편하게 탈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파리지앵의 상징이자 실용주의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르노의 히스토리를 정리했다.
◆데모 마케팅의 원조가 된 몽마르트의 청년 사업가
르노그룹 창립자인 루이 르노는 128년 전 데모 마케팅의 개념을 처음 선보였다. 스무 살이던 1989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에 자신이 직접 개발한 '직접구동변속기'를 탑재한 자동차를 몰고 파리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는 시연을 보였다고 한다. 변속기를 탑재한 차량이 험한 급경사를 힘차게 오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12대를 주문했고, 이에 영감을 받은 르노는 두 형과 함께 1899년 정식으로 회사를 창립한다.
르노의 상징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로장주다. 설립 초기에는 형제들의 이니셜을 딴 자동차 모양, 1차 대전 때는 최초로 개발한 탱크 모양 등의 로고를 사용했다. 그러다 1925년 자동차 전면에 달린 클랙션에 영감을 받아 공기 구멍이 뚫린 형태의 다이아몬드 모양을 채택했다.
르노는 자동차 역사에 수많은 최초의 행적을 남겼다. 1898년에는 현대 변속기의 기초를 만들었고, 1900년에는 현대적인 개념의 승용차 차체를 선보였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용 전차 설계의 원형으로 알려진 회전식 포탑을 탑재한 전차를 개발하기도 했다. F1에 터보엔진을 도입해 모터스포츠의 흐름을 바꾸고, 1984년 세계 최초로 미니밴을 출시하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이끈 것도 르노다.
르노의 나치 협력 역사를 두고는 아직 논쟁이 많다. 루이 르노는 회사를 지키고 노동자들의 실직을 막기 위해서라고 항변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44년 감옥에서 의문사를 한 뒤 르노 그룹의 소유권은 프랑스 정부로 넘어갔다.
◆소형차에서 미니밴까지..'파리지앵 삶' 파고든 국민차
국영 기업으로 전환된 르노는 "전 국민에게 저렴하고 튼튼한 차를 보급하겠다"는 목표로 대중차 개발에 역량을 쏟는다. '르노의 역사=소형차의 성공 스토리'로 요약된다. 1940년대 출시한 르노 4CV는 콤팩트한 크기로 전후 프랑스 최초로 100만대 판매를 돌파했으며, 1960년 출시된 최초의 전륜구동 해치백 르노4는 '공무원의 발'로 불리며 약 30년간 800만대 이상 팔렸다. 이후 출시된 르노5, 트윙고, 클리오 등도 각 시대를 대표하는 프랑스 국민차로 큰 사랑을 받았다.
르노는 세계 최초의 미니밴 개념인 '에스파스'를 출시해 유럽 가정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기도 했다. 많은 사람과 짐을 실을 수 있게 설계된 미니밴은 주말 레저 수요에 적극 대응하며 현대적 개념의 목적기반모빌리티(PV) 시초를 닦았다.
르노그룹은 일본 닛산과 제휴를 맺으며 새로운 부흥기를 맞는다. 1990년대 말 르노는 닛산 지분 36.8%를 약 54억 달러에 취득하며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자동차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업 간 결합' 사례로, 기업을 흡수 통합하는 방식과 달리 각자의 브랜드와 기업 문화를 유지하는 동맹 방식 협력이다.
르노와 닛산의 동맹 이후 르노그룹은 글로벌 1~2위를 다투는 거대 자동차 연합체로 성장했고, 이는 르노코리아의 위탁 생산 물량 증가로도 이어진다. 르노코리아는 북미 수출용 SUV인 '닛산 로그'의 위탁 생산과 함께 SM5, SM7, SM3 등 'SM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으로 단기간에 부산 대표 기업으로 성장했다.
◆유럽의 테슬라 꿈꾼다...전기차 기술 대중화
르노는 전기차 시장에서도 '기술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차량의 주행 성능을 결정하는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 전환에 가장 적극적인 브랜드로, 그룹의 중장기 플랜인 '퓨처레디(futuREady)'를 통해 글로벌 모빌리티 대전환기를 준비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전략이 구글과의 기술 동맹이다. 독자 운영체제(OS)를 개발하는 대신 구글과 협력해 세계 최초로 안드로이드 기반 자동차 OS를 구축하고 있다. 또 차량 내 흩어져 있는 개별 AI 기능을 하나의 에이전트로 조율하는 AI 오케스트레이터 기술도 개발 중이다.
전기차 분야에서는 800V 고전압 아키텍처를 바탕으로, 1회 충전 시 최대 750km(WLTP 기준) 주행거리 신차를 개발 중이다. 고성능 모델과 대중화 모델의 '투트랙 배터리' 전략을 추진 중인데, 이 과정에서 르노코리아의 부산 공장은 중대형(D·E 세그먼트) 프리미엄 자동차의 핵심 수출 전진 기지 역할을 할 예정이다. SDV 차량은 2027년, 전기차 양산은 2028년이 목표다.
미래차 기술 선도를 위해 오픈 이노베이션도 적극 확대 중이다. 자체 기술과 외부 파트너들의 역량을 결합해 혁신 주기를 2년 이내로 단축하고, 미래차 신차 출시 시기를 단축시킨다는 계획이다. SDV 부품 생태계와 이차전지 기술력을 갖춘 한국은 뛰어난 파트너다. 니콜라 파리 르노코리아 사장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기반으로 국내 주요 기업들은 물론, 우수한 역량을 갖춘 스타트업들과의 파트너 관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혁신적인 협력 생태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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