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안 하겠다"→"전쟁 못하게 막겠다"… 다카이치의 '한 글자'

  • 日총리 패전일 추도사에 사역형 '세(せ)' 추가

  • "전쟁 책임을 일본 밖으로 돌리는 것" 논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사진로이터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사진=로이터연합뉴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패전일 추도사에 더한 한 글자를 두고 일본에서 역사 인식 논란이 일고 있다. 역대 총리가 써온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겠다"에 사역을 뜻하는 '세(せ)'를 넣어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로 바꿨기 때문이다. 일본이 스스로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다른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겠다는 선언으로 바꿔, 전쟁의 주체를 일본 밖으로 옮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 일본에서는 매년 정부 주최 전국전몰자추도식이 열린다. 일왕 부부와 전몰자 유족 대표 등이 참석하는 이 행사에서 총리는 전쟁 희생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다짐하는 내용의 추도사를 발표한다. 이 추도사에 어떤 표현을 쓰느냐로 전쟁을 바라보는 총리의 역사 인식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본 언론은 해마다 그 내용을 주목한다.

취임 후 처음으로 이 자리에 선 다카이치 총리는 15일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전후 70년인 2015년 처음 쓴 뒤 스가 요시히데·기시다 후미오·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까지 이어온 문장은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겠다"였다.

'세' 한 글자를 둘러싸고 야당 의원들은 다카이치 총리가 전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쓰지모토 기요미 입헌민주당 참의원 의원은 16일 엑스(X·옛 트위터)에 "왜 총리 자신을 주어로 삼아 스스로의 의지와 결의를 명확히 밝히지 않느냐"고 썼다. 그는 과거 일본이 다른 나라에 떠밀려 전쟁에 나섰다는 시각에서 당시 일본 정부의 잘못된 정책 판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서투른 바꿔치기'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야마조에 다쿠 공산당 참의원 의원도 15일 엑스에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오히려 국민이 다카이치 총리와 같은 위정자에게 해야 할 말"이라고 비판했다.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도 한 글자가 바꿔놓은 의미에 주목했다. 나카키타 고지 주오대 교수(일본정치사)는 아사히신문에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이 부전(不戦)의 결의를 밝힌 것으로 읽힌다. 반면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는 다른 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2차 세계대전을 일본이 주도한 침략전쟁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떠밀려 벌인 전쟁으로 인식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방위력을 적극적으로 강화하겠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마이니치신문도 15일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대 교수(일본근현대사)의 말을 인용해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는 사역 표현에는 일본이 과거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라는 역사인식이 드러난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총리관저 관계자는 문구를 바꾼 데 대해 "더 강한 부전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누구에게 무엇을 되풀이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한 글자를 일본 헌법 전문의 정신과 연결한 비판도 제기됐다. 일본 헌법 전문은 "일본 국민은 정부의 행위에 의해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결의한다"고 규정한다. 전후 주권자가 된 국민이 정부가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다짐한 대목이다. 

아사히신문은 17일 총리들이 사용해온 "되풀이하지 않겠다"가 이러한 헌법 정신을 재확인하는 표현이었다며, 다카이치 총리가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를 일본에서 다른 나라로 옮긴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번에 '반성'과 '부전의 맹세'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들 표현은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추도사에 담은 뒤 자민당 출신 총리들도 이어왔지만, 아베 전 총리는 2013년부터 사용하지 않았다. 아베 전 총리는 종전 70년인 2015년 대신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문구를 넣었고 스가·기시다 전 총리도 이를 계승했다. 지난해 이시바 전 총리가 '반성'과 '부전의 맹세'를 13년 만에 되살렸지만, 다카이치 총리의 추도사에서 1년 만에 다시 빠졌다.

다카이치 총리는 아베 전 총리를 '정치적 스승'으로 여겨왔다. 그는 1995년 3월 국회에서 전쟁 책임과 역사교육을 두고 "나 자신은 당사자라고 할 수 없는 세대이므로 반성 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이후에도 언론 등을 통해 전쟁은 일본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치른 것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다카이치 총리와 가까운 자민당 의원은 아사히신문에 다카이치 총리가 평소 일본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식의 언급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며, 이번 추도사도 보수층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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