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만은 찾고 일본은 없었다
황 CEO는 지난달 대만에서 웨이저자 TSMC 회장을 비롯한 주요 기업인들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고, 이달 초에는 한국을 찾아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등을 잇달아 만났다.
닛케이는 이러한 행보가 현재 AI 산업의 권력 지형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TSMC는 엔비디아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축을 맡고 있으며, 네이버와 LG, 현대차 등은 AI 활용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한국과 대만 기업들을 단순 공급업체가 아닌 전략적 파트너로 끌어올리며 AI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은 반도체 소재·장비 분야의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AI 생태계 중심부에서는 존재감이 크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닛케이는 최근 일본을 찾는 글로벌 AI 기업들 역시 공동 개발 파트너보다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할 시장으로 일본을 바라보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이 AI 기술을 개발·수출하는 국가가 아니라 AI 서비스를 구매하는 국가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왜 일본은 불안한가
일본 경제계가 AI 경쟁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과거 정보기술(IT) 산업 주도권을 잇따라 놓친 경험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은 1980년대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며 미국을 위협할 정도의 기술 강국이었다. 그러나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이 본격화된 이후 산업의 중심이 하드웨어에서 플랫폼으로 이동하면서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소니와 파나소닉, 샤프, NEC, 후지쓰 등 일본 전자업체들은 한때 세계 시장을 주도했지만 스마트폰 시대에는 애플과 삼성전자에 밀렸고, 인터넷 플랫폼 시장에서는 구글과 아마존, 메타 등에 주도권을 내줬다.
클라우드 분야 역시 아마존웹서비스(AWS), 마이크로소프트 애저(Azure), 구글 클라우드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면서 일본 기업들은 존재감을 확보하지 못했다. 현재 일본 기업과 정부 기관 상당수도 해외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디지털 적자'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생성형 AI 경쟁이 미국 기업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일본 내 위기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오픈AI, 구글, 앤스로픽, xAI 등 주요 AI 기업 상당수가 미국에 집중돼 있으며, AI 반도체 역시 엔비디아가 사실상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소재와 제조장비 분야에서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AI 모델과 플랫폼, 데이터센터 생태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제한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언론은 AI 시대 일본의 과제가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 자체보다 글로벌 AI 생태계 안에서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새로운 AI 생태계에 얼마나 깊이 참여하느냐가 향후 일본 경제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일본 경제계 일각에서는 최근 "반도체는 만들지만 AI는 남이 만든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AI 시대의 부가가치가 칩 제조보다 AI 모델과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과거 제조업 중심의 성공 공식을 반복해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일본이 완전히 경쟁에서 밀려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Rapidus)를 중심으로 첨단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고 있으며, 소프트뱅크와 AI 스타트업 사카나AI 등을 중심으로 AI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결국 일본의 과제는 반도체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가 아니라 AI 시대 핵심 생태계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느냐다. 닛케이가 젠슨 황의 방한·방대만 행보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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