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위기 여파, 日 실물 경제 흔들려

  • 욕실 납기 중단·세제 출시 연기

  • 엔저・항공유 상승으로 인바운드 관광 얼어붙어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유니클로 매장사진AFP연합뉴스
일본 도쿄에 있는 한 유니클로 매장[사진=AFP·연합뉴스]



중동 정세 악화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긴장 고조 영향이 일본 실물경제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15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원자재 수급 차질이 현실화되면서 주택 설비와 생활용품 등 일상 소비재 생산에도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주택 설비 업계에서는 생산 차질이 가시화됐다. 일본 최대 욕실용품 제조사인 토토(TOTO)가 수주 중단을 선언했고, 건자재 기업 릭실(LIXIL)은 14일 이후 접수분부터 유닛 욕실 제품의 납기를 '미정'으로 전환했다. 원유에서 추출되는 나프타 공급이 불안정해지면서 플라스틱 등 원재료 조달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파나소닉 하우징 솔루션도 욕실과 화장실 관련 일부 제품의 납기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생활용품 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세제, 비누 등을 만드는 라이온(LION)은 올여름 출시 예정이던 의류용 세제 신제품 출시를 연기했다. 계면활성제 등 원료 수급이 불안정해지자 기존 제품 공급 유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고바야시제약은 플라스틱 용기 조달 문제로 일부 제품 출하를 제한했고, 아스쿨(ASKUL)은 의료용 장갑 등 일부 품목에 구매 제한을 도입했다.

가격 상승도 이어지고 있다. 세키스이화학은 건자재 가격을 15% 이상 인상하기로 했고, 일본페인트와 간사이페인트는 신너 제품 가격을 50% 이상 올렸다. 가네카의 단열재 가격도 40% 상승했다.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기초 화학제품 공급이 줄어들면서 제조업 전반의 비용 상승을 넘어 '공급 불능' 사태로 번지는 모양새다.

외환시장에서는 엔화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14일 기준으로 엔화는 1유로당 환율이 187엔대까지 밀리며 유로 탄생 이후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웠으며, 호주달러 대비로도 1호주달러당 113엔대까지 상승해 1990년 이후 엔화 가치가 최저 수준에 근접했다. 달러 대비 환율 역시 1달러당 159엔대를 중심으로 움직이며 심리적 저지선인 160엔 돌파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환율 방어를 위한 엔화 매수 개입에 대한 경계감이 하단을 지지하고 있지만, 시장 전반에서는 여전히 엔화 매도·달러 매수 압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모습이다. 위안화 대비 엔화 가치 역시 13일 기준으로 1위안당 23.4엔을 돌파하며 2005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외환닷컴종합연구소의 칸다 타쿠야 선임 애널리스트는 "중동 정세 불안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엔화를 매수할 유인이 매우 부족하다"며 최근 시장 분위기를 전했다.

이러한 엔저와 중동발 항공유 폭등은 인바운드(방일 외국인) 관광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통상적인 엔저 환경은 외국인 관광객의 지출 부담을 낮춰 인바운드 관광에 호재로 작용하지만, 이번 중동 위기 국면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 경제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발생한 '나쁜 엔저'가 항공유 가격 폭등과 맞물려, 엔저가 주는 여행 비용 절감 효과를 완전히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제 항공유 가격은 한 달 만에 배럴당 200달러를 넘어서며 2.5배 급등했다. 달러 결제가 기본인 항공유 특성상, 기록적인 엔저는 일본 항공사들의 유류비 부담을 더욱 키웠고 이는 고스란히 유류 할증료 폭등으로 이어졌다. 현재 유럽발 일본행 직행편 요금은 예년보다 10만~20만 엔가량 치솟은 상태다. 여기에 중동 주요 거점 공항을 경유하는 항공편의 결항 사태까지 겹치면서 저렴한 일본 물가를 즐기려던 유럽 여행객들에게 항공권 가격은 거대한 장벽이 되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은 현장에서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 관광지인 기후현 히다 다카야마 지역에서는 유럽 관광객을 중심으로 약 4000명의 예약이 한꺼번에 취소됐다. 이는 해당 지역 한 달 평균 외국인 숙박객의 5%에 달하는 규모다.

위기가 전방위로 확산되자 다카이치 내각은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약 100억 달러 규모의 금융 지원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요미우리신문이 15일 보도했다. 일본에 물자를 공급하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미국 등 중동 이외의 지역에서 원유를 조달할 수 있도록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의 융자와 일본무역보험(NEXI)의 보증을 제공하겠다는 것. 아시아의 에너지 공급망이 무너지면 결국 일본의 의료 및 제조 현장이 멈춘다는 판단에서 나온 '공급망 상호 협력' 전략이라는 지적이다.

동시에 경제산업성은 석유·천연가스 기반 기초 화학제품과 합성 고무, 의약품 원료 등을 '특정 중요 물자'로 지정하는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고 닛케이가 보도했다. 올해부터 본격 시행될 이 조치를 통해 민간 기업이 국내에 제조 설비를 갖출 경우 정부 보조금과 저리 융자를 전폭 지원한다. 특정 용도에 국한됐던 경제 안보 지원 범위를 산업 전반의 기초 소재로 넓혀 중동 리스크와 해외 의존도로부터 '자립형 제조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다카이치노믹스의 강력한 의지가 실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중동발 충격은 단순한 에너지 가격 상승을 넘어 일본 제조업 기반과 공급망 전반을 흔드는 구조적 위기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원유의 약 90%를 중동에 의존하는 일본 경제의 특성상 나프타를 중심으로 한 기초 화학소재 공급 불안은 생산 차질과 가격 상승을 동시에 유발하며 산업 전반에 부담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 엔저와 항공유 급등이 겹치며 그동안 일본 경제를 지탱해온 인바운드 관광마저 위축되는 모습이다. 정부가 동남아 지원과 '특정 중요 물자' 지정 확대에 나선 것도 이러한 복합 위기에 대응해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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