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가격만 잡는 정책, 품질도 소비자도 놓친다

김현아 산업2부 기자
[김현아 산업2부 기자]


2014년 1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물가 안정'을 명분으로 생활필수품 194개 품목의 가격을 고정했다. 직전해 두 차례에 걸쳐 1만3000개 품목의 가격을 동결한 데 이은 추가 조치였다. 통제된 품목의 가격은 몇 달간 변하지 않았지만, 시장엔 혼란이 찾아왔다. 일부 소비자들이 가격 통제를 틈타 매점매석에 나선 것이다. 

이 가운데 통제에서 해제된 다른 품목들은 한 달 새 가격이 2~3배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사과는 273%, 밀가루는 141%, 쇠고기 등심은 53%가 인상됐다. 정부의 가격 고정에도 불구하고, 물가는 오히려 더 요동친 셈이다.

정부가 생활물가에 개입하는 방식은 정치권에선 자주 쓰는 민생 카드다. 체감도가 높고,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면 장바구니부터 들여다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민생 회복을 기치로 내건 이재명 정부 역시 치킨, 라면, 계란 등 주요 먹거리 가격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물가와 민심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윤석열 정부 초기에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다. 2023년 6월 추경호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업들이 밀 가격 하락에 맞춰 적정하게 판매가를 내렸으면 좋겠다"고 언급했고, 이후 대형 식품업체들은 잇따라 가격 인하를 발표했다. 실제 인하 폭은 50~100원에 불과했지만 시장에는 '정부가 나서면 물가도 잡힌다'는 인식이 퍼졌다. 정책 효과보다는 상징 효과가 컸던 정부의 물가 개입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이란‑이스라엘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국제 해상 운임 급등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길어지며 식품 기업의 원가 부담은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 고환율·고유가·인건비 인상까지 겹쳐 기업 입장에선 가격을 억제할 여력이 점점 줄어드는 실정이다. 치킨 한 마리를 튀기는 데 들어가는 원육, 기름, 포장재, 전기료는 줄줄이 올랐고 유통마진을 줄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채 '보여주기식 물가 통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격을 직접 내리라는 지시는 정치적 명분은 줄 수 있지만, 구조적 개선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아르헨티나의 실패는 물가 자체보다 '시장 신뢰'를 무너뜨린 데서 출발했다. 값은 붙잡았지만 품질은 낮아졌고 생산은 줄었으며 결국 소비자 부담은 더 커졌다.

우리는 아르헨티나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기업들에게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대신 정부는 원자재 비축 확대, 수입선 다변화, 유통 구조 개선 같은 중장기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기업들도 그 틈을 타 불투명한 원가 구조나 과도한 마케팅 비용을 점검하는 내부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정부와 업계가 서로 '정치'가 아닌 '현실'을 중심으로 협력할 수 있을 때, 진짜 민생 안정이 가능해진다.

전쟁은 멀리 있지만 그 여파는 벌써 식탁 위까지 번지고 있다. 라면 한 봉지, 치킨 한 마리에 담긴 가격표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정책의 방향, 기업의 생존 전략, 소비자의 신뢰가 교차하는 민감한 지점이다. 그리고 그 교차점은 지금,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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