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한국정치 증오와 분열의 벽… '정서적 올바름'으로 넘어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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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교수
입력 2023-02-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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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교수 ]



 
민주당의 원로인 유인태 전 국회사무총장이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념’ 발언을 소환했다.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 쇼’(1월 26일)에서다. 당이 강성 지지층에 줄곧 끌려 다니다가 정권을 빼앗겼는데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의 ‘양념’ 발언도 한몫을 했다는 거다. 윤 전 총장은 ‘양념’이 “문의 어록 중 제일 아팠던 부분”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4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지지자들이 상대 후보들에게 문자폭탄과 댓글테러를 가해 논란이 되자, “경쟁(경선)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했다. 왜곡, 과열된 팬덤 정치의 비민주성을 걱정하기보다는 ‘해프닝’ 정도로 여긴 것이다. 그 ‘양념’이 증오의 씨앗이 돼 우리 정치를 극심한 대립과 반목 속으로 몰아넣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文 정권 5년, 증오의 굿판이 된 정치
 
문 정권 5년 내내 정치판은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져 막말과 저주의 굿판이 됐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 국민을 “토착왜구”로 몰아도 대통령은 물론 책임 있는 여권 인사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증오는 정권이 바뀌면서 극단으로 치닫는 듯하다. 새 정권에 비판적인 일부 성직자들은 “해외순방 중인 대통령의 전용기가 추락해버렸으면 좋겠다”는 경악할 만한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이 지독한 증오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증오상업주의>(2013년)를 쓴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 ‘악마화’라는 말을 썼다. 신간 <퇴마정치>에서 민주당의 대선 패배는 “윤석열을 악마화 한 탓”이라고 했다. “윤석열을 미워하는 수준을 넘어 2년7개월간 계속 악마화 했고 이런 민주당의 자해(自害) 탓”에 졌다는 것이다.
 
증오가 넘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위험한 사회다. 증오는 이성을 마비시켜 합리적 소통과 결정을 어렵게 만든다. 증오는 증오를 먹고 자란다. 내가 상대를 증오하면 상대는 더한 증오로 되갚음 한다. 그 끝은 공멸(共滅)이다.
 
“견해가 다르면 결혼도 안 해”
 
문 정권의 마지막 총리였던 김부겸 전 의원은 “한국정치는 견해가 다르면 밥도 같이 안 먹고 결혼도 안 하겠다는 ‘정서적 내전상태.’에 있다”면서 “다음 단계는 ‘싹 쓸어 없앴으면 좋겠다.’는 사회심리 위에 등장했던 나치와 파시스트로, 우리는 그만큼 위험하다(위험한 상태에 있다)”고 했다.(1월 29일 ‘정치학교 반전’ 강연, 경향신문)
 
‘증오’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요인의 복합적 산물이어서 해소도, 치유도 어렵다. 우리만 해도 근대 이후 일제의 주권침탈, 식민체제, 전쟁과 분단,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압축 성장만큼 압축된 증오가 도처에 쌓여왔다. 불공정, 차별, 특권, 내로남불이 증오를 낳는 원인이라면 대한민국처럼 적합한 토양도 없다.
 
미국의 반(反)명예훼손연맹(ADL · Anti-Defamation League)은 증오가 심화되는 과정을 5단계로 나눈다. 증오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샐리 콘(Sally Kohn) 박사는 저서 <왜 반대편을 증오하는가>(The Opposite of Hate, 2018년, 에포케, 장선하 역)에서 이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증오의 피라미드’ 맨 아래쪽인 1단계는 ‘어떤 집단은 본래 우월하다’는 고정관념 등이 형성되는 단계다. 2단계는 왕따나 욕설 같은 편견을 바탕으로 행동과 말은 안 해도 은근히 이뤄지는 사회적 따돌림처럼 남에게 해를 입히는 단계다. 3단계는 취업이나 주택 정책, 혹은 정치적 시스템 안에서 제도적 형태의 차별이 일어나는 단계다. 4단계에선 테러나 증오범죄처럼 편견에 치우친 폭력이 발생하고, 맨 꼭대기인 5단계에선 대학살로 발전한다.
 
‘증오의 3단계’로 넘어가선 안 돼
 
우리는 이 중 2단계의 정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SNS를 통해 이뤄지는 상대에 대한 멸시와 조롱, 집회와 시위 등이 절정에 달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3단계는, 이민족(異民族)에 대한 노골적인 배척이나 채용 기피, 성(性)소수자에 대한 겁박 등이 벌어지는 단계다. 다행히 아직 3단계로 넘어가지는 않고 있다. 여러 가지 법적, 제도적 장치들, 예컨대 위헌심사제도나,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수위가 높아지는 증오의 파고 앞에서 방어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로울 때가 많다.
 
증오는 이른바 증오상업주의(hatred commercialism)에 의해 조장되는 경향이 있다. 증오상인들(hatred mongers)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해 ‘증오’를 만들어 판다는 것이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한의 대응을 그런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북은 남한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겨 체제의 결속과 김씨 왕조에 대한 충성을 확보해왔다. 한국의 두 거대 양당 체제에 대해서도 그런 비판이 나온 지 오래다.
 
公敵 1호, 증오상인들(hatred mongers)
 
증오를 파는 건 결국 언론이라는 인식도 팽배하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맷 타이비(Matt Taibbi)는 저서 <증오주식회사>』(Hate Inc., 필로소픽, 2021년)에서 이를 시니컬하게 파헤친다. “…(기자들을) 우리(cage) 안에 전부 몰아넣는다. 이렇게 해서 안전하게 포획되면 우리는 스포츠팬들이 하는 방식대로 뉴스를 소비하도록 훈련받는다. 우리 팀은 응원하고 나머지 팀은 모두 증오한다.… 증오는 무지의 파트너이며, 미디어 종사자들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판매하는 전문가 됐다.”
 
증오는 SNS를 타고 빛보다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국내 유튜브 중 광고수익을 내는 채널수만 5만이 넘는다고 한다. ‘증오’는 익명성으로 무장한 채 ‘가짜 뉴스’에 얹혀서 확산되는 경우가 많다. 둘 다 파괴적이고 선동적이다. 미디어 소비자는 이중으로 피해를 보는 셈이다.
 
증오는 정치의 가십화(化)를 초래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상대를 증오하다보니 기사의 경중(輕重)은 제쳐두고, 반대편에게 망신을 줄 수 있는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것들만 찾느라 혈안이 된다. 침소봉대와 ‘기사 비틀기’는 일상이 됐다.
 
한국 신문의 정치면에서 ‘가십난’이 사라진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권위주의 시절, 언론자유의 위축 속에서 정치판의 짤막한 뒷얘기, 속칭 ‘가십’을 통해 정치 뉴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도 했지만, 정치의 경박화(輕薄化), 희화화, 저질화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있어 대다수 언론사가 이를 없앴다. 증오가 죽은 가십난을 되살려내고 있다. 정치와 정치기사의 퇴행이라고 할 만하다.
 
누가 죽은 가십난을 불러내나

‘정치’가 있어야 할 자리에 거대한 진영(陣營·block)이 도사리고 있다. 진영을 감싸고 도는 것은 끝 모를 증오다. 진영은 제 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주지만 그 대가로 상응하는 충성을 요구한다. ‘보호’와 ‘충성’을 맞바꾸는 셈이다. 충성심을 어떻게 보여줄 건가. 증오를 보여주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공천 시즌이면 돌출하는 일부 의원들의 막말과 기행(奇行)은 그래서 나온다.

증오의 정치가 한국사회를 더 갈라놓기 전에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어떤 모임에서도 정치 얘기는 안 하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안다. 친구들끼리는 물론 가족 간에도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필자는 설을 쇠러 고향에 갔다가 죽마고우 친구들끼리도 격렬한 언쟁 끝에 사이가 틀어져 돌아온 경우를 흔하게 봤다.
 
정치판이 깨끗해야 증오가 사라져
 
정치를 주제로 한 논쟁이야 어디에서나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는 전통적으로 정치를 도덕적 선악(善惡)의 문제로 포장해온 데다가, 실제로 현실 정치인들이 불법과 비리의 주범인 경우가 많아서 더 거칠고 위선적이다. 한국정치는 우선 정치판이 깨끗해져야 증오가 사라진다.
 
증오를 유발하는 모든 모순과 불합리를 없애야 하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우리의 근, 현대사부터 다시 써야 한다. 결국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끊임없이 소통하고 함께 민주적 합의와 협치의 전통을 세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도 여야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여기에다 나는 샐리 콘 박사가 말한 ‘정서적 올바름’(emotional correctness)을 하나 추가하고 싶다. ‘정서적 올바름’이야말로 증오를 완화시키는 실천 가능한 첫째 덕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쉽게 말하면 ‘편견이 섞인 언어적 표현을 쓰지 말자’는 거라면 “‘정서적 올바름’은 ‘극과 극으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서로 예의를 갖춰 대화하고, 상대와 공감하기 위해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초당적 정치개혁 모임에 거는 기대
 
콘 박사는 “입 밖으로 나오는 말뿐만 아니라 말을 할 때의 의도와 표현방법을 통해 상호존중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효과를 실감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한 수많은 악플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필요하면 가서 만났다.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온라인에서 내게 무례하게 굴었던 사람들이 알고 보니 평범한 보통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놀라우리 만큼 심오한 경험이었다.” 역시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것은 태도(attitude)다.
 
증오라는 거대 담론의 철옹성 앞에 작고 왜소해 보이겠지만 ‘증오 줄이기’의 첫걸음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침 여야 의원 121명이 참여하는 초당적인 정치개혁 모임이 출범했다. 전체 의원 40%에 해당하는, 전례가 없는 큰 규모다.
승자독식의 한국정치의 폐해를 바로잡는 게 목표라고 한다. ‘정서적 올바름’으로 내부규율을 삼아 부디 소기의 성과가 있기를 빈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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