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탱크 막아선 '죽음의 행진'엔 홍남순 있었다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 2021-05-13 14:53
[광주정신] ④ 전남 화순 빈농의 아들, 독재와 사투 벌인 '큰 변호사'

[홍남순 변호사]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중심에는 홍남순 변호사(1912 - 2006)가 있다. 평소 소탈하고 자애로운 동네 할아버지 같은 그가 선두에서 신군부에 맞서 싸웠다. 2004년 <홍남순 평전>이 나왔을 때 박형규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는 그를 “이 나라, 이 공동체 안에서 진실로 양심과 정의를 외친 이 시대의 의인(義人)”이라고 했다. 홍남순은 5‧18을 통해 광주정신의 원형질을 보여준 사람이다. 나흘 뒤면 5‧18 41주기. 5월 민주영령을 추모하고 그 정신을 다시 기린다.

1980년 그날,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광주에선 진압 군인들이 시위 중인 시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감행한다. 홍남순 부부는 예비검속을 일단 피하기 위해 19일 서울 아들네 집으로 가나, 광주가 고립된 걸 알고 곧바로 돌아온다. “죽더라도 광주에서 죽겠다”는 각오였다. 21일, 광주 금남로는 이미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아수라장이었다. 분노한 시민들도 각목과 쇠파이프, M1 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대치 속에서 계엄군은 일단 전남도청과 광주시내에서 물러나 시 외곽으로 철수한다.

26일 새벽, 도청상황실의 비상벨이 울린다.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워 상무대에서 금남로 도청으로 다시 올라오고 있다는 급한 전갈이었다. 홍남순과 김성용 신부 등 17명의 수습대책위원들은 몸으로라도 이를 막기로 했다. 도청에서 상무대 계엄사령부까지는 3㎞ 남짓. 이들은 4열 횡대로 선 후 서로 팔짱을 낀 채 상무대를 향해 걸었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
 

[1986년 9월 홍남순(앞줄 검은색 양복에 백발)은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회원, 광주시민들과 함께 금남로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시가지 행진을 했다]

탱크를 막아선 ‘죽음의 행진’

다행히 사살되지 않고 계엄사에 도착한 홍남순 일행은 계엄군 측과 4시간 넘게 회의를 했지만 군의 태도는 완강했다. “오늘 밤 안으로 무기를 회수하지 않으면 내일은 진격한다.” 하릴 없이 계엄분소를 나온 일행은 막막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김성용 신부를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내 광주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홍남순도 상경해 윤보선과 최규하, 호남 출신 퇴역장군 정래혁(95‧전 국방부장관) 등을 만나 “광주를 더 이상 죽이지 마라”고 호소하기로 했다.

홍남순은 서울행 기차를 타려고 광주 송정리역으로 가던 중 체포돼 광주시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간다. 그는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다. 수사관은 “간첩도 내 손에서 5일이면 끝난다. 너 오늘 내 손에 죽어봐라.”며 달려들었다. 각목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무릎을 꿇린 후 발로 밟는 고문은 가벼운 편에 속했다. 고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그는 이렇게 애걸했다. “이 나이(69)에 이 고문을 받고 어찌 살겠나. 차라리 나를 충장로 네거리에서 총으로 쏴 죽여라. 아무도 없는 지하실에서 맞아죽기는 싫다. 제발 죽여 달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차라리 총을 쏴서 나를 죽여라”
 
홍남순은 그해 12월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내란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김대중 내란음모 체계도’란 날조된 프레임에서 ‘전남조직책’으로 허위 명기된 탓이었다. 2심에서 징역 25년으로 감형되고, 81년 12월 성탄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지만 복권이 안 돼 변호사 일을 할 수 없었다. 생활고가 극심했다. 취미삼아 모은 도서나 골동품을 팔아야 했다. 당시 그에 대한 광주시민의 신망과 존경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인근 화순에 사는 친구 하나가 쌀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택시를 탔다. “광주시 궁동 15번지 은행나무집 홍남순 댁으로 가자”고 하니 택시기사가 “웬 쌀가마니냐?”고 물었다. “홍남순 변호사가 생계가 어렵다고 해서 농사 지은 쌀 좀 주려고 한다.”고 했다. 택시기사는 말없이 홍남순 집 앞에 쌀가마니를 직접 내려놓더니 “택시비는 받을 수 없다”며 그냥 갔다.​ 홍남순이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진 후 확인된 그의 통장 잔고가 100만원이 채 안 됐다.

19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2000년까지 4차례 보상이 이뤄졌다. 전국에서 5·18 관련자 4312명이 2283억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홍남순은 정부에 보상신청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가족들 사이에 보상 얘기가 나오면 “소신껏 참여한 일인데 무슨 보상이냐?”며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가족들 또한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봐 오히려 걱정했다고 한다.

끝까지 민주화 보상금 신청 안 해
 
1964년 한일협정반대운동은 홍남순이 재야 민주화운동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광주에서도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그가 부위원장으로 선임된다. 1967년엔 ‘6·8부정선거전면무효화’ 투쟁위원회 위원장, 1971년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대표로 추대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투쟁에 뛰어든다.

엄혹했던 군사독재 시절, 홍남순만큼 시국사건을 많이 맡은 변호사도 드물다. △국회의원 유옥우씨의 한-일 협정 반대 발언 사건 △시인 양성우씨의 ‘겨울공화국’ 시집 사건 △박석무 김남주 등의 국가보안법 사건 △송기숙 교수의 교육지표 사건 △‘함성지’ 사건 △고영근 목사 사건 △‘노예수첩’ 필화사건 △동아투위 사건 △김재규 사건 등이 모두 그에게로 왔다. 광주는 물론 전국 어디서든 권력에 희생된 사람들,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재판엔 그가 있었다.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고 이돈명 변호사(1922∽2011, 전 조선대 총장)는 “그는 법조문보다는 인간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양심과 정의로 변론했다”고 말했다. 송기숙 전 전남대 교수(86)는 “70년대에는 누구든 잡혀가면 생사가 불투명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는 공판정이 남편이나 자식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변호인석의 변호사들은 말 그대로 수호천사였다. 변론도 변론이지만 피고 편에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특히 홍남순 선생님이 계시면 더 그러했다”고 회고했다.
 
법조문 떠나 정의와 양심으로 변론

그는 김재준 목사, 이병린 전 대한변협회장,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 함석헌 씨알의 소리 발행인, 윤보선 전 대통령, 장준하 사상계 대표(무순) 등과 깊은 교분을 유지했다. 10살 연상인 윤보선과는 각별해서 서울에 갈 때면 꼭 문안인사를 올리곤 했다. 재야인사 중 홍남순의 집을 가장 많이 찾은 이는 함석헌이었다. 1975년 8월 홍남순은 장준하와 함께 무등산을 등반했는데 이튿날 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홍남순은 1912년 전남 화순군 도곡면 모산리에서 빈농의 아들(3남 1녀 중 장남)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2년간 조부 홍승규(洪承圭)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홍남순은 “그때 선비정신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능주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3년 수학한 후 25세 때인 1937년 일본 오사카 인근의 와카야마 시립상공학교에서 3년 동안 법률 공부를 하게 된다.

그는 1940년 고향을 떠난 지 7년 만에 귀국한다. 이듬해 해남등기소에 근무하면서 평생의 반려자 윤이정(1992년 별세)과 만나 결혼하고, 이어 화순등기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주경야독, 1948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한다. 41세 때 군 법무관 복무를 마친 후 광주지법 판사, 대전지법 강경지원장, 광주고법 판사를 지내고 1964년 변호사 개업을 한다. 1961년 5·16 군사정권으로부터 고향 화순에서 출마할 것을 종용받기도 하나 응하지 않는다. 그에게 박정희 군사정부는 순리가 아닌 역리(逆理)였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노자(老子)에 심취했고, 그 한 구절인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좋아했다. “최상의 선(善)은 물과 같다. 물은 모든 생활에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다. 모든 이들이 꺼리는 낮은 곳에 즐겨 있다”고 생전에 그는 말했다. 그래서일까. 말년에는 민주화운동 방식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고 급진 반미운동과 좌경화도 반대했다.

부패한 법조인, 양심수 변론 못해
 
홍남순은 생전에 사무실에 걸어놓은 경구, ‘시궁절내현’(時窮節乃見, 어려울 때 절개를 보인다. 궁할 때 그 사람의 절제된 삶을 알 수 있다.)을 평생 마음속에 두고 살았다. 송나라 재상이자 문장가인 문천상(文天祥)이 좌우명으로 삼은 글이다. 1998년 국내 한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홍남순은 말했다. “못살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살아야 죽음에 이를 때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역사 앞에 발을 뻗을 수가 있다.”

40년 넘게 홍남순과 함께 한 정광진 사무장은 “법조인이 부정부패하면 양심수 변론을 할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5·18 때 수사관들이 그의 사무실에서 수첩 한 권을 찾아냈다. 사무실의 수입과 지출을 적은 장부였다. 수사관들은 비리 사실을 캐내려고 이 수첩에 적힌 내용을 샅샅이 파헤쳤으나 어떤 꼬투리도 잡지 못했다. 수사관들조차 그의 청빈함에 탄복했다고 한다.

홍남순이 지적한 법조인의 부정부패에는 법관의 독립성 훼손과 정파성도 가장 큰 죄목으로 포함될 게 분명하다. 그의 말을 오늘에 맞게 바꾸면 이렇게 될 것 같다. “법조인이 독립성을 잃고, 정파적으로 휘둘리며, 심지어는 대놓고 거짓말까지 한다면 과연 누구를 재판하고 누구를 변론할 수 있겠는가”라고.

홍남순은 뇌출혈로 5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다 2006년 10월 14일 세상을 떴다. 장례는 그가 5‧18 당시 신군부로부터 지켜내려고 했던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광주시 민주시민장으로 치러졌고 5·18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홍남순(오른쪽)은 1975년 8 월 장준하('사상계' 발행인, 사진 중앙)와 박민기(전 국회의원)와 만나 무등산을 함께 등반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홍남순은 이튿날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날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사진=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leejaeho64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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