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호 칼럼] '메이드 인 차이나' 오점 지우는 화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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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호 IT과학부 부장
입력 2020-03-1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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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말은 종종 ‘저품질’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남의 것을 베끼는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어 온 중국기업이 많아서 ‘이미테이션(모조품)’이란 이미지도 덩달아 심어졌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0'에서 고동진 삼성전자 사장이 박정호 SK텔레콤 사장에게 출시 전인 '갤럭시 Z플립' 스마트폰을 꺼내 보였을 때도 박 사장의 첫 마디가 "중국이 따라 만들려면 얼마나 걸리나"였다. 고 사장은 "1년"이라고 대답했다.

중국제품은 저품질과 이미테이션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 가격 대비 성능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품질을 선보인 샤오미에 ‘대륙의 실수’라는 웃지 못할 별칭이 붙기도 했다.

‘메이드 인 재팬’이라는 말도 한때 '저품질'이라는 선입견에 시달렸던 시기가 있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 직후다. 당시 생산된 캐논 카메라가 그랬다. 독일제 고급 카메라 '라이카'가 대세였던 시대다. 캐논은 '메이드 인 재팬'이라는 싸구려 이미지 때문에 미국 진출에 애를 먹었다.

1949년 해외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직원이 캐논을 소개하면 “대포를 만드는 회사냐”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캐논이라는 회사명은 ‘대포(大砲)’라는 단어로 번역되기 일쑤였다. 어쩌다 캐논 카메라에 관심을 보인 바이어가 나타나면 “이 카메라가 독일제라면 팬케이크처럼 불티나게 팔리겠지만, '메이드 인 재팬'이라 힘들겠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차라리 제품에서 캐논이라는 브랜드를 지워버리는 것은 어떤가”라는 굴욕적인 제안을 받기도 했다. 캐논이 뉴욕에 지점을 설립하기까지 6년이 걸렸다.

 

캐논은 1955년 뉴욕지점을 개설했다. [사진=캐논 제공]


전쟁 중에 꽃을 피운 일본 카메라 산업은 군수 물자로 편입돼 패전 후 민간 생산이 허용되기까지 독일제 카메라의 분해‧조립이 원천기술의 토대였다. 라이카를 분해해 건져낸 부품을 똑같이 만들어 조립했다. 

그랬던 일본 카메라가 생산 대수와 생산 금액에서 독일을 따라잡은 시점이 1962년이다. 전후 17년 만에 독일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요인은 자체 기술의 발전과 가격 경쟁력에 있었다. 정부의 수출진흥정책도 한몫했다. 민·관의 합작이 일본을 세계 최고 수준의 카메라 대국으로 우뚝 서게 했다. 일본 국가자본주의의 첫 성과물이 카메라다.

독일 카메라의 기술 수준을 거의 따라잡았던 1960년. 미타라이 다케시(御手洗毅) 캐논 사장은 독일(당시 서독) 쾰른에서 열린 세계 최대 사진‧기자재 전시회 '포토키나(Photokina)'에 참가해 "드디어 유럽이 캐논 카메라의 우수성을 인정했다. 이제 일제 카메라는 이미테이션이 아닌 독자 기술에 기반한 제품이라는 점이 입증됐다"고 선언했다. '메이드 인 재팬'이란 오점을 벗어던진 순간이다.

 
 

캐논이 패전 후에 처음 선보인 카메라(SII모델). 당시 일본에 주둔한 연합국최고사령부(GHQ) 병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사진=캐논 제공]


 
중국 정부도 ‘메이드 인 차이나’가 저품질이라는 선입견을 타파하기 위해 5년 전 ‘중국제조 2025’라는 정책을 내놨다. 중국기업의 세계 진출을 가속시키고, 부품과 기술의 해외 의존을 낮춰 선진 공업 국가를 만들겠다는 게 골자다. 중국기업들은 정부의 정책지원을 등에 업고 미국을 추격하려던 와중에 제재라는 돌발 악재를 만났다. 미국의 제재는 중국 최대 통신기업 화웨이를 정조준했다.

트럼프 정부는 동맹국이 구축 중인 5G 통신망에서 화웨이 장비를 배제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화웨이 장비에 백도어를 만들어 스파이 활동에 악용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었는데, 아직 관련 증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 압박은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지금까지 미국의 화웨이 장비 배제 요청을 따른 나라는 일본과 호주뿐이다. 유럽과 동남아에선 이미 화웨이 장비를 도입했거나 배제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나라가 많다. 특히 세계 최대 통신 시장인 유럽에서 화웨이 장비 도입이 급격히 늘고 있다. 화웨이가 5G 분야에서 전 세계 통신사와 체결한 91건의 계약 중 47건이 유럽이다.
 
 

1987년 화웨이를 창업한 런정페이 최고경영자(CEO)는 중국 인민해방군 엔지니어 출신이다. [사진=화웨이 제공] 

화웨이 장비를 선택한 사정은 나라마다 각기 다르지만, 경쟁업체인 노키아와 에릭슨에 비해 품질과 가격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특히 경기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유럽은 5G 투자 여력이 크지 않다. 경쟁업체보다 20~30% 저렴한, 가성비 좋은 화웨이 장비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화웨이의 5G 기술은 경쟁업체보다 한 발 앞서 있다. 5G 관련 특허도 가장 많다. 화웨이 장비는 이미 전 세계 65개 통신사의 기지국에 깔려 있다. 

통신 전문가는 "엄청난 양의 실제 장비가 현장에 깔려 노하우를 쌓고 있다는 점이 바로 경쟁업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한다. 화웨이는 심지어 지난해 5G 상용화를 시작한 중국 시장을 독점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국내에서 빨아들이고, 그 자금을 해외로 돌려 연구개발(R&D)에 투입하는 선순환도 일으키고 있다.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꿋꿋이 수주를 획득하고 있다. 화웨이를 대체할 선택지가 달리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5G 통신장비 시장을 선점한 화웨이를 두고 '대륙의 실수'라 야유하지 않는 것은 그 분야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구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5G 분야에서만큼은 '메이드 인 차이나'가 일등이라는 의미로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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