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월, 나는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이었다. 쇼와(昭和) 일왕이 서거하자 일본 사회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TV를 켜면 어느 채널에서나 추모 방송이 이어졌고, 평소 즐겨보던 드라마와 예능, 만화 프로그램은 모두 사라졌다. 아이들은 볼거리를 잃었고, 어른들은 비디오 대여점으로 몰려갔다. 인기 영화 테이프를 빌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고, 그 풍경마저 뉴스가 됐다. 그때 어린 나는 처음 알았다. 일본에서 일왕은 단순한 국가원수가 아니라 국민의 일상과 사회 분위기까지 바꾸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37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다시 왕실 문제로 시끄럽다. 이번에는 일왕의 서거가 아니라 후계자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논의에서는 많은 일본 국민들이 기대했던 핵심 내용 하나가 아예 제외됐다. 현 나루히토 일왕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하는 문제다.
일본 정부가 최근 정리한 제도 개선안은 결혼한 여성 왕족이 혼인 뒤에도 왕실에 남아 공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전후 일반인이 된 옛 왕족 가문의 남성을 양자로 맞아 왕족으로 복귀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급격히 줄어드는 왕족 수를 유지하기 위한 대책이다.
하지만 여성 일왕을 허용하거나 아이코 공주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하는 문제는 이번 논의 대상에서 처음부터 제외됐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코 공주는 그대로 두면서 왜 수백 년 전에 왕실에서 갈라져 나간 옛 왕족부터 찾는 것인가."
한국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의문이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이해하려면 일본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단어를 구분해야 한다. 바로 '여성 일왕'과 '여계 계승'이다. 우리에게는 비슷한 말처럼 들리지만 일본에서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먼저 여성 일왕은 말 그대로 여성이 일왕이 되는 것이다. 아이코 공주가 즉위하면 여성 일왕이 된다. 사실 일본 역사에서 여성 일왕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일본에는 모두 8명의 여성 일왕이 있었고 재위 횟수는 10차례에 이른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여성 일왕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일본 보수 정치권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성 일왕이 아니라 여계 계승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계'는 왕위를 잇는 사람이 남성이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황실의 혈통이 누구를 통해 이어지느냐를 뜻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이코 공주가 훗날 일왕이 되고, 다시 아이코 공주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사람들은 "아들도 남자인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아들은 남성이지만 어머니인 아이코 공주를 통해 왕실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여계 계승'으로 분류된다. 반대로 여성이 일왕이 되더라도 이후 왕위를 같은 남계 혈통의 왕족이 잇는다면 일본에서는 여계 계승으로 보지 않는다.
즉 일본 보수층이 지키려는 것은 '남자만 일왕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아니다. 왕실의 혈통이 아버지 쪽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남계 계승 원칙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왜 일본 정부가 아이코 공주보다 옛 왕족 남성을 먼저 거론하는지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일본국민들 눈에는 현 일왕의 외동딸보다 수백 년 전 왕실에서 갈라져 나간 옛 왕족 남성을 더 우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 정치권은 개인보다 혈통의 연속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세계 왕실의 흐름도 일본과 다르다. 영국은 2013년 왕위계승법을 개정해 왕자와 공주를 구별하지 않고 먼저 태어난 자녀에게 왕위를 잇도록 했다. 스웨덴은 이미 1980년 세계 최초로 남녀 구별 없는 장자 상속제를 도입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도 같은 방향으로 제도를 바꿨다. 오늘날 유럽 왕실에서는 성별보다 출생 순서를 우선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 됐다.
국제사회의 시선도 비슷하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여러 차례 일본의 남성 중심 황위 계승 제도를 재검토할 것을 권고했다. 남녀평등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위 계승은 남녀평등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역사와 전통에 관한 문제이며 국제기구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최근에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며 분담금 일부 지급을 보류하는 강경한 태도까지 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학계에서도 현재의 남계 계승 원칙이 태초부터 절대불변의 전통이었다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 일왕은 실제 존재했고, 지금과 같은 엄격한 남계 중심 제도는 메이지 시대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더욱 강하게 제도화됐다는 연구도 적지 않다.
1989년 내가 경험한 일본은 쇼와 일왕의 서거 앞에서 방송을 멈추던 나라였다. 2026년의 일본은 아이코 공주를 차기 일왕으로 지지하는 국민이 다수가 된 나라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남계 계승 원칙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일왕은 바뀌어도 일왕을 둘러싼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번 왕실 논란은 단순히 다음 일왕을 누가 맡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통을 어디까지 지키고, 또 어디까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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