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보' 출입금지 검찰, '나는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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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논설고문
입력 2019-11-0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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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6월 16~21일 르 모니퇴르 위니베르셀 1면 [사진=구글이미지]

[사진=구글 이미지]

[김세원의 천방지축] 

1789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지 4개월 뒤인 1789년 11월 24일 '르 모니퇴르 위니베르셀(le Moniteur Universel)'이라는 일간지가 창간됐다. 르 모니퇴르는 혁명과정에서 시민들을 옹호함으로써 프랑스 최고의 유력지 반열에 오른다. 그런데 1799년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자 이번에는 적극적인 나폴레옹 지지로 돌아선다. 나폴레옹은 권좌에 오르자마자 언론 탄압에 나서 쿠데타 직전 73개였던 파리의 신문은 1800년에는 13개로 줄더니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른 뒤에는 4개만 남았다. 르 모니퇴르는 노골적으로 나폴레옹을 찬양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다 1814년 3월 다국적 연합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된 후에는 복고된 부르봉 왕조의 충견으로 돌변해 나폴레옹에 대해 독설을 퍼부었다.

1815년 2월 26일 유배 중이던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하여 3월 20일 파리에 입성할 때까지 사태 전개 과정에서 보인 르 모니퇴르의 1면 머리기사의 헤드라인 변천사는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조소(嘲笑)의 표본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까이 올수록 바뀌는 르 모니퇴르의 1면 헤드라인은 점입가경이다.

"3월 9일자: 식인귀 소굴(엘바섬)에서 탈출→10일자: 코르시카 산(産) 오우거(Corsican Ogre·도깨비), 프랑스 남부 생 장 뒤 루즈(saint jean du luz)에 상륙→11일자: 호랑이 카르푸 항구에 나타나다 →12일자: 괴물 그르노블(Grenoble)에서 야영→13일자: 폭군 리옹(Lyon) 도착→18일자: 찬탈자 수도 100㎞ 지점에 출현→19일자: 보나파르트 북으로 진격 중, 파리 입성은 절대 불가→20일자: 나폴레옹 내일 파리 도착 예정→21일자: 황제 나폴레옹 지금 퐁텐블로궁에 도착→3월 22일자: 황제 폐하 어제 파리 튈르리궁에 환궁하시다"
나폴레옹은 파리에 입성한 뒤 르 모니퇴르를 프랑스 정부의 공식적인 기관지로 만들었다. 후에 관보로 흡수된 르 모니퇴르는 1901년 6월 30일 결국 폐간된다.

1898년 1월 13일 파리의 일간 신문 ‘로로르(L’Aurore·여명)‘ 1면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제목의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실렸다. 편지를 쓴 이는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였다.
졸라는 이 편지를 통해 당시 독일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투옥됐던 유대인 참모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이며 프랑스 군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차별받는 유대인 장교에게 누명을 씌웠음을 격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1894년 프랑스 육군 정보국이 주불 독일대사관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 무관이었고 발신인이 익명인 이 편지의 내용은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 명세서였다. 드레퓌스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스파이로 지목돼 곧바로 체포되었다. 당시 반(反) 유대인 정서 일색이었던 프랑스 신문들은 유대인 장교의 반역죄를 심판해 사형을 언도하라고 압박했다. 1894년 12월 군사법정은 범죄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채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드레퓌스는 1895년 2월 남미 기아나의 적도 해안에 있는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졸라의 편지가 실리기 이틀 전, 뒤늦게 진짜 간첩임이 밝혀진 에스테라지 소령이 무죄 석방되고, 반대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며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임을 밝히는 물증까지 내놓았던 피카르 중령이 투옥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격분이 졸라가 편지를 쓰게 된 동기였다.

처음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으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로로르’지의 발행인이었던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로 바꿀 것을 권했다. 졸라의 편지 덕분에 ‘로로르’는 몇 시간 만에 30만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아나톨 프랑스, 에밀 뒤르켐, 마르셀 프루스트, 클로드 모네 같은 학자와 작가, 예술가 등 프랑스의 지식인들이 잇따라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했다. 드레퓌스 재심 운동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편지는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퍼져 있던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졸라는 당대 최고 인기 작가였지만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뒤 여론의 뭇매를 맞아 프랑스 언론에 글을 쓸 수 없게 됐다. 중죄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박탈당했다. 졸라는 런던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이듬해 6월 귀국했으나 3년 뒤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했다.

프랑스 사회는 양분되었다. 양심세력과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졌으나 결국 진실이 승리했다. 드레퓌스는 졸라의 편지가 보도된 지 6년, 체포된 지 10년 만인 1904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1906년 육군에 복직하였다. 1908년 졸라의 유해는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르 모니퇴르’와 ‘로로르’는 시대를 뛰어넘어 권력과 언론과의 관계 설정과 관련된 양극단적 사례로 자주 회자되고 있다. ‘르 모니퇴르’는 권력에 굴종하는 언론의 상징으로, ‘로로르’는 권력에 맞서 본연의 사명을 다한 언론의 전범(典範)으로 인용된다.

지난 10월 30일 법무부는 피의사실과 수사상황 등 형사사건 내용의 공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형사사건 공개금지에 관한 규정’이란 총 35개 조의 훈령을 제정하고 12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핵심은 세 가지,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검사나 수사관들이 기자와 개별 접촉을 할 수 없고 △오보를 낸 언론사의 기자들은 브리핑 참석 및 검찰청사 출입을 할 수 없으며 △공개소환은 물론 압수수색과 체포, 구속 등 수사과정에 대한 촬영도 불허한다는 것이다. 이번 훈령 제정은 법원 판결을 거쳐 확정되지 않은 내용이 검찰수사 단계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알려져 피의자 인권을 훼손하는 일을 없애자는 취지다. 취지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나폴레옹 시대를 방불케 한다.

검찰의 특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검찰을 감시할 수 있는 언론의 접근을 막으려는 의도는 도통 알 수가 없다. ‘오보(誤報)’라는, 그야말로 모호하고 자의적인 잣대로 정부가 언론인을 선별하여 출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의 극치를 달린다. 검찰이 소환되는 사람을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포토라인에 세워 망신을 주는 악습은 마땅히 사라져야 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다. 이전 정부의 적폐 수사에선 소환되는 인사들을 줄줄이 포토라인에 세우고 언론이 수사상황을 생중계하듯 보도하게 함으로써 온갖 인격 살인을 저질러 놓고서는 왜 하필 조국 교수와 가족 수사를 앞두고 이런 훈령을 제정했느냐는 거다. 법무부의 훈령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참에 시민단체가 ‘로로르상’과 ‘르 모니퇴르상’을 제정하여 줄 것을 제안한다. 법무부 훈령의 ‘엄폐막’ 뒤에 가려진 집권세력에 대한 수사를 용기있게 보도하는 언론사에는 ‘로로르상’을, 200만명이 모였다는 주최측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서초동 촛불집회를 톱 뉴스로 편성 보도한 모 언론사에는 ‘르 모니퇴르’상을 각각 주었으면 좋겠다. <논설고문·건국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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