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회담이 갈수록 '김정은 꽃놀이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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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19-10-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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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북한의 핵보다 방사포(放射砲 · 다연장 로켓포)가 더 위협적이라고들 한다. 핵은 쉽게 못쓸 거라고 보면, 실제로는 대표적 장사정포(長射程砲)인 방사포가 더 무섭다는 거다. 육군 장성 출신의 전문가에게 팩트 체크를 요청했더니 그가 대뜸 물었다. “북한이 방사포를 총동원해 서울에 10만발을 당장 쏟아붓는다면 우리 측 사상자는 몇 명이나 될까?” 1만, 아니면 10만? 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1백명 내외”라고. 에이, 설마? 그의 설명이 이러했다.

북한이 방사포를 끄집어내는 데 6~7분 걸리므로 조기경보가 가능하고, 방사포는 수류탄처럼 파편으로 사람을 살상(殺傷)하는데 서울은 지하시설과 고층빌딩이 많아 쉽게 몸을 숨길 수 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핵은? “시뮬레이션을 해봤더니 북이 용산에 나가사키급(TNT 20kt) 원폭 1발을 떨어뜨리면 열(熱)과 핵폭풍으로 87만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반경 10㎞ 안에선 100만이 방사능으로 죽어, 도합 200만명의 사상자가 나더라”고 했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북·미 실무협상이 오는 5일로 잡혔다. 기대가 큰 만큼 우려도 크다. 돌이켜보면 승자는 언제나 김정은이었다. 그는 트럼프와의 세 차례 만남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과 맞상대를 할 ‘거물’로 국제사회에 각인됐고, 이를 통해 북 내부의 권력기반도 다졌다. 적대적 경쟁 상대인 한국엔 안보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한미동맹의 근간인 3대 연합훈련을 축소 또는 폐지시켰다. 그 과정에서 그가 양보하거나 잃은 것은 없다. 양보는커녕 핵무기는 고도화됐고, 중국과의 관계는 더 돈독해졌다. 전례 없는 성취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북핵의 비대칭적 위력이 슬슬 발휘되기 시작한 덕이다. 국제체제론의 관점에서 보면 미·중 냉전의 심화가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rogue state)에 운신의 폭을 넓혀준 점도 있다. 트럼프도 한몫했다. 북으로 하여금 통미봉남(通美封南)에 대한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이게 김정은의 ‘포부’를 키웠다. 트럼프는 북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을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우나, 이것이 북의 비핵화 논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흔적은 없다. 문재인 정부도 크게 기여했다. 한반도의 ‘운전자’ ‘중재자’를 자임하며 김정은의 든든한 조력자가 돼주었다.

이런 환경의 연장 속에서 북·미 협상이 재개되면 김정은으로선 또 꽃놀이패다. 주변을 둘러보라. 트럼프는 탄핵조사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한·미 동맹은 예전만 못하며, 한·일 안보협력은 붕괴 직전이다. 그뿐인가. 한국정부는 3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려서, 김정은이 연내, 또는 내년 총선 전에라도 서울에 올 수만 있다면 북·미 협상에서 어떤 합의가 나와도 환영할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판세를 못 읽을 김정은이 아니다.

그는 지난달 16일 북한 외무성 미주국장의 성명을 통해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의 제도와 안전을 불안하게 하고, 발전을 방해하는 위협과 장애물이 의심할 여지없이 제거될 때라야 비핵화 논의가 가능하다.” 무슨 말인가. 앞으로 핵문제만 다루는 회담은 안하겠다는 거다. 핵에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선택지는 줄어들고 궁지에 몰리기만 하더라, 그러니 앞으로는 다른 현안들도 함께 논의하겠다는 거다. 체제보장과 관련된 대북제재 완화, 주한미군 철수, 미국의 전략자산 전개 중단, 테러지원국 해제, 북·미 수교 문제까지도 모두 다루자는 것이다.

이런 현안들은 북한이 그동안 간단없이 거론해온 것들이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으니 핵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자는 얘기다. 북의 ‘새로운 계산법’이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도 “북의 체제보장은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폐기, 핵우산 제거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는 북의 계산법을 “대북제재 완화를 위한 협상의 지렛대”로 보았다.

북·미 실무협상에서 북의 완전한 비핵화 없이 체제보장을 해주게 되면 한미동맹만 형해화(形骸化)된다. 그런 조짐들이 벌써 보인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6일 “북한이 비핵화하면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면서 “모든 나라는 스스로를 방어할 주권을 갖는다”고 했다. 북의 자위권을 인정한 것이다. 자위권을 인정하면 비핵화 압박은 약해지고, 체제보장의 범위는 넓어진다. 북을 배려한 주한미군의 감축 또는 역할조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때문에 문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에서 트럼프에게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개최를 강권하다시피 한 것은 혼란스럽다. 문 대통령은 “3차 회담이 열리면 한반도와 비핵화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세계사적 대전환과 업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북·미 회담의 긍정적 기대효과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변 환경이 바뀌고, 북·미 회담이 우리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속단할 수 없는데도 회담만 권하는 게 적절한 대응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문 대통령이 북·미 회담에 집착하는 것은 회담의 성공이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연결되고, 이게 다시 북·미관계 개선을 추동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거라는 신념 때문이다. 이 신념이 중재자론과 평화경제론을 낳았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목격한 바와 같다. 돌아온 건 미국 측의 회의(懷疑)와 배신감, 북측의 조롱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생각을 바꾸거나, 최소한 완급이라도 조절하는 게 누가 봐도 합리적이다. 그런데도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 왜 그럴까. 혹여 자존심(고집) 때문일까. 아니면 외눈박이 주변 참모들에게 포위돼 있어서인가.

다음 달이면 집권 후반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진보정권이니까(적폐정권이 아니니까) 대북정책도 달라야 한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도 위선이다. 김정은에겐 평화경제를 얘기하면서 트럼프에겐 수조원의 무기 구매를 약속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벗어날 능력도, 담대함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자주’를 얘기하고, 중재자 운운하는 건 위선이다. 집권 후반기엔 보다 정직하게 현실과 마주했으면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북핵을 용인한 정권으로 남을 거고, 5000만 국민은 평생 원자폭탄을 머리에 이고 살게 될 것이다.
 

북한, 다시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김정은 지도 (서울=연합뉴스) 북한이 지난 9월 1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 지도 하에 초대형 방사포 시험사격을 다시 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11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김 위원장과 간부들의 현지 지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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