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칼럼] 대중 저항을 가볍게 여긴 대통령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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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 2019-09-19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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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마민주항쟁과 박정희에 대한 기억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그러니까 1979년 7월 1일, 카터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남북 교차승인에 관한 의견을 물었고, 박 대통령은 이에 동의하였다고 한다.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나 긴급조치 9호 해제를 둘러싸고 설전을 벌인 것과는 달리, 이 문제에서는 두 정상의 의견이 일치했던 것이다.

1979년은 미·중 수교와 이란혁명이라는 두 가지 세계사적 사건으로 시작된 해였다. 당시 한·미 간에는 안보문제와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미·중 수교에 따른 후속조치로 주한미군 철수와 남·북·미 3자 회담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이란혁명과 같은 사태가 한국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정치 자유화를 강력히 주문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강력한 검열 때문에 밖으로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재야로 불렸던 급진 민주주의자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였고, 야당의 온건 민주주의자들은 긴급조치 9호와 양심수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는데, 카터 대통령과 미국의 고위 인사들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인권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끝까지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지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한·미 정상회담이 끝난 후 넉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9월에 접어 들어 대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10월 초에 김영삼 신민당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하자, 유신체제에 대한 잠재적인 불만은 집단적인 저항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마민주항쟁이다. 부산과 마산에서 차례로 일어난 학생들의 저항은 시민들의 합세로 대규모 시위로 변했고, 박 대통령은 이를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막았다. 현장을 직접 목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당시의 상황을 폭풍전야와 같다고 느꼈다. 미국의 정보보고서도 항쟁이 정치적 불만에 경제적 박탈감이 더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그때 계엄령 대신 긴급조치 해제를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그의 불행은 자신의 자존심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1979년은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미·중 적대가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그는 이런 시대적 변화를 충분히 읽지 못했고, 대중들의 불만과 저항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 결과는 ‘대통령의 불행’이었다. 그의 후임 대통령들도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제외하면, 이런 불행을 반복했고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오래전에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이보다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동적 발전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동성 뒤에 잠재하고 있는 하나의 위험, 즉 관용의 문제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반복되는 대통령의 불행은 독선과 함께 상대방에 대한 관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를 규정하는 구조적 요인에는 미·중 관계가 자리한다. 적대적 국면에서 화해협력의 국면을 지나 치열한 경쟁의 국면에서 접어든 미·중 관계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나라가 한국이다. 정치군사적으로 미국에,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는 구조가 불가능해지고 있다.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는 머리를 맞대고 이런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토론해야 하는데, 배타적 불관용의 정치는 이런 기회를 국민들로부터 빼앗아가고 있다.

40년 만에 부마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10·26과 1980년의 소용돌이 때문에 잊혔던 부마민주항쟁의 기억이 제자리를 찾고 있어서 다행이다. 다만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집착으로 전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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