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남기고 극단적 선택한 정두언 전 의원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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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원 기자
입력 2019-07-1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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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원 전 의원. [사진=아주경제 DB]

정두언 전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 의원이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왕의 남자'로 불렸던 정 전 의원은 관료, 정치인에서 시사평론가, 일식집 사장으로 변신하며 여의도에서 '풍운아'로 불렸지만 결국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16일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정 전 의원은 이날 오후 4시 25분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인근 북한산 자락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에 경찰은 유서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정 전 의원이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경위 등을 파악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 전 의원의 정치 역정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을 끝으로 정치권으로 방향을 돌렸다.

지난 2000년 한나라당 대변인에 이어 2002∼2003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낸 정 전 의원은 지난 2004년 17대 총선부터 19대 총선까지 서울 서대문을에서 내리 당선됐다. 초선의 정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당에 아무런 뿌리가 없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대통령 만들기에 거의 유일하게 앞장섰다.

결국 2007년 말 정권 교체에 성공한 정 전 의원은 개국 공신으로서 '왕의 남자'로 우뚝 섰다. 대통령직 인수위 구성과 조각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하며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듯했지만, 권력의 암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인수위에서 밀려나온 정 전 의원은 2008년 6월 '만사형통'(모든 것은 형으로 통한다)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막강했던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과 그의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 당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을 겨냥해 '권력의 사유화' 발언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앞서 이미 그해 4월 제18대 총선에서 이 전 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 파동'의 선봉에 서면서 여권 전체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다.

정 전 의원이 최근까지 이 전 대통령을 '저격'하며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이때가 시작이다.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이 전 대통령을 둘러싼 '다스' 수사가 이뤄지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이 '내가 다스를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한 게 여론 악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이명박 정부의 개국 공신이었지만 정권 말기인 2012년에는 '저축은행 금품수수' 사건에 연루됐다. 급기야 이듬해에는 3선 의원 신분으로 법정 구속까지 이뤄져 구치소에서 꼬박 만 10개월을 살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두 정치 인생이 끝난 것으로 예상했지만 파기환송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극적으로 부활, '국회의 꽃'으로 불리는 상임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대문을에 다시 출마했지만 4선 달성에는 실패했다.

낙선 이후에도 종편 채널의 시사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때로는 패널로서 종횡무진했던 정 전 의원은 정치인이 아닌 방송인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정 전 의원은 또 국회의원 시절에는 4집 앨범까지 내 '가수 의원'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드라마 음악에도 도전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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