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고전문학 산책] 죽을 만큼 힘들 때는 사마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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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입력 2018-06-07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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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사마천(司馬遷, B.C 145년∼?)이라는 중국 고대 역사가가 있었다. 그는 ‘사기’라는 걸출한 역사책을 썼다.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역사책을 그는 기전체(紀傳體)라는 인물 중심의 방식으로 서술해 역사 속 인물들이 눈앞에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놀랍게도 사마천이 사기에서 다룬 시기는 전설 속의 임금인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인 한무제까지 약 2600년에 달한다. 이 긴 시간의 역사가 한 역사가의 일관된 역사관으로 기록됐다는 사실은 경외감을 가지게 한다.

◆ 울분을 드러내 글을 쓰다

발분저서(發憤著書)는 ‘울분을 드러내 글을 쓰다’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자극돼 명작을 남긴다는 뜻으로 넓게 이해되는 말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게 된 동기는 바로 이 네 글자로 설명할 수 있다.

사기의 서문에 해당하는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사마천은 역대 명작들이 나오게 된 동기를 그 명작들의 저자가 살면서 겪었던 고난에서 찾고 있다.

즉 ‘시경’과 ‘서경’, ‘주역’, ‘춘추’, ‘이소’, ‘국어’, ‘병법’, ‘여람’ 등의 역대 명저들이 저자가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상태에서 내면의 울분이 창작의 동기가 돼 탄생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자병법’을 쓴 손빈(孫臏)은 발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서 이 책을 썼고, 좌구명(左丘明)은 시력을 잃고서야 역사책 ‘국어’를 썼다. 공자(孔子)도 자신의 정치주장을 선전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으나 곳곳에서 어려움을 당했다.

진(秦)나라와 채(蔡)나라에서는 식량이 떨어지고 포위당해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공자가 역사책 ‘춘추’를 쓴 것은 그런 어려움을 겪은 후였다. 사마천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사기를 완성하게 된 동기 역시 바로 끔찍한 고난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 이릉의 화

사마천은 38세에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을 이어 태사령(太史令, 중국의 고대 관직명)이 되어 42세 때 본격적으로 사기 집필에 들어간다. 그러다 48세 때 이릉(夷陵) 사건에 연루돼 태사령 직에서 파면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른바 ‘이릉의 화’라고 불리는 이 사건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이릉은 한(漢)나라 때 장수로 5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서 수만 군대에 맞서 용맹하게 싸우다 수적 열세로 인해 항복했다.

사람들은 이릉이 이씨 가문과 한나라 조정을 욕되게 했다고 비난했다. 사마천은 이릉의 상황이 부득이했음을 변호하다 당시 황제였던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감옥에 갇히게 된다.

당시 사마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법에 따라 사형을 당하는 것, 돈 50만 전을 내고 죽음을 피하는 것, 궁형을 당하는 것 중 한가지였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돈 오십만 전이 없었던 사마천이 선택한 길은 궁형을 당하더라도 살아남는 것이었다. 궁형은 성기 전체를 잘라내는 치욕적인 형벌이었다. 궁형을 당했을 때 사마천은 49세였다.

사마천이 명예로운 죽음 대신 이런 치욕적인 생존을 선택한 이유는 집필 중이던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목숨을 부지한 사마천은 사기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위대한 역사책을 탄생시켰다.

사기 곳곳에는 사마천의 울분이 스며 들어있으며, 생동감 있는 서술로 인해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 사마천 글 속의 굴원

사마천은 역사 속의 인물 굴원(屈原, 대략 B.C 340년 혹은 339∼B.C 278년)에게서 자신과의 동질성을 느꼈던 것 같다.

사마천은 사기의 ‘굴원열전(屈原列傳)’에서 굴원이 ‘이소(離騷)’라는 명작을 쓰게 된 것은 원망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굴원은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애국시인이다. 그는 주변 신하들의 시기로 모함을 당해 파직되어 유배됐다가 멱라강(汨羅江)에 투신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굴원은 초사 형식의 시가인 이소(離騷)에 충정, 애국, 비탄, 그리고 간신들의 말만 믿은 임금에 대한 울분을 쏟아냈다.

사마천은 이러한 굴원의 입장이 돼 어떻게 이소라는 작품이 탄생됐는지를 사기의 굴원열전에서 설명하고 있다.

“굴원은 왕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데 밝지 못하고 헐뜯고 아첨하는 말이 군주의 밝음을 가로막으며, 흉악하고 비뚤어진 말이 공정함을 해치고, 바르고 반듯한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근심스럽고 깊은 생각에서 이소를 지었다.”

역사책이지만 굴원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사마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신의를 지켰으나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으나 비방을 받은 굴원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로 이어지는 반문은 바로 사마천 자신의 황제 한무제(漢武帝)에 대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 박경리 시 속의 사마천

이 사마천을 뜻밖에도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2008)의 시에서 만났을 때 강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지음(知音)이라 했던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 말이다. 2000년 뒤 한국에서 사마천은 박경리라는 지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박경리는 ‘사마천’이라는 시에서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하지만 결국은 사마천을 통해 박경리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6·25 전쟁 때 남편을 잃고, 그 뒤 어린 아들을 잃고, 글을 쓰며 딸을 키웠던 그녀는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다.

이러한 박경리를 지탱해 준 것은 글쓰기였다. 사마천에게 사기의 집필이 살아야 하는 이유였듯이 박경리에게도 글쓰기가 곧 그녀의 삶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굴원과 사마천, 박경리 삶에서의 고난은 주옥같은 시로, 역사책으로, 소설로 승화됐다. 이는 사기 연구학자 김영수의 말을 빌리자면 ‘문화복수(文化復讐)’다.

즉 자신의 고난을 한 차원 승화시켜 시, 역사책, 소설 등에 투영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은 육체적, 정신적, 환경적인 것이 있다. 부족함 없이 완전무결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이 가난일 수도, 병일 수도, 부당한 형벌일 수도, 가족과의 생이별이나 사별일 수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일 수도 있다.

최근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에 방문했다가 이중섭이 아내에게 쓴 육필 편지를 볼 기회가 있었다.

이 편지에는 가난으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한국에 남아 전시회에 걸 그림을 그릴 때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었다.

그림을 완성해야 팔 수 있고, 팔아야 돈을 벌 수 있고, 돈이 있어야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절박함. 그 절박함이 아마 이중섭 명작들의 탄생 배경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이중섭 위로 굴원이, 사마천이, 박경리가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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