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스페셜-임시정부의 맏며느리 수당 정정화⑳] 臨政의 '고육지책' 이승만, 분열의 씨앗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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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입력 2018-04-19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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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미외교 전담기관 대표로 위촉… 최악의 惡手로

[1944년 워싱턴,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협찬회. 가운데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 네번째가 부인 프란체스카.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미국과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일본-청(淸)-러시아의 틈바구니에 낀 고종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선의의 중재자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임정 요인들은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하며,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한다”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29)을 몰랐다(이 밀약은 국무성 비밀문서로 보관되다가, 1924년 처음으로 알려졌다).
주지하다시피, 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국제적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였다. 하지만,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정부와 끈을 갖고 있지 못했다. 독립군은 고사하고, 국내 활동기간(1910.8~1912.4)에도 교회 일에만 매달렸던 이승만을 국무총리에 임명한 건 이 때문이었다. 이 당시 이승만은 윌슨의 제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승만은 매사가 자기중심적이었다. 임시정부 헌장(憲章)에도 없는 대통령 호칭을 자기 멋대로 사용해 각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임시의정원은 미국정부와 관계를 고려해 석 달 뒤 그를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했다), 구미위원부를 자신의 사조직처럼 운영했다. 결국,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요청한 사실이 탄로가 나 탄핵된다(1925.3.11). 그가 상해에서 임시정부 일을 보았던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든 탄핵되든, 미국은 한국 독립에 냉담했다. 민족자결주의는 유럽 중심의 구체제를 미국 주도 하에 재편하고, 러시아혁명의 여파를 최소화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인도와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대전 후에도 여전히 식민지로 남았다. 이런 터에 미국이 임시정부에 호의를 베풀 까닭이 없는 것이다.

 

[1943년 미국 워싱턴, 조선혁명당 미주총지부의 반일선전시위 모습. 사진=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미국 채널이 없던 임시정부의 고민
임시정부 역시 미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충칭에 자리를 잡고 중국정부와 관계가 안정되자, 임정은 미국정부에 주의를 돌렸다. 중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 미국이 지원한다면, 중국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은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또한 전후 처리에 있어서 미국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니만치, 해방에서 독립으로 가는 길에는 미국의 협조가 꼭 필요했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9개 미주한인단체 대표들이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가 결성됐다. 충칭의 임시정부는 이 조직을 대미외교를 전담할 임정의 공식기관(대표부)으로 승인했다. 문제는 대표자였다. 이승만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임정은 그가 미주(특히 하와이) 교포사회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대표로 위촉했다.
광복군 군자금 모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뒷날 임시정부 최악의 악수(惡手)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승만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극소수에게만 주미외교위원부의 문을 열어주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나 워싱턴에서 미국 국무부와 접촉하던 김용중, 한길수 등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승만의 미국 지인들은 십중팔구가 교회 관련 인사들로, 미국 내에서도 극우에 가까운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루스벨트는, 뉴딜정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두철미한 리버럴. 1942년 1월, 이승만은 국무부를 최초로 방문해, 코델 헐 국무장관의 특별보좌관 알저 히스와 면담했다. 그는 루스벨트의 외교부문 오른팔로,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의 보좌관으로 배석했다.

# 교포사회 단합을 거부한 이승만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히스에게 임정 승인과 지원을 요청했다. 히스는 임정이 한국인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불가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일본 패망 후 미국정부가 주관하는 선거를 통해 한국의 지도자를 선출한다는 조건으로 임정 승인을 재차 요청하고, 이는 소련의 남진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계책이라고 설명했다.
히스는 굳은 표정으로 이승만의 발언을 가로막았다. 그는 합중국의 동맹국에 대한 비방을 듣고 있을 수 없으며, 한국의 미래는 일본 패망 뒤에 결정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히스는 전후 매카시 선풍이 불 때, 공산당원에게 국무부 비밀문서를 넘겨줬다는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다. 이런 이유로 이승만 지지자들은 히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만, 그것으로 독립운동 분열의 책임이 면해지는 건 아닐 게다.
1943년 여름, 루스벨트는 워싱턴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던 중국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 장제스 부인 쑹메이링의 오빠)에게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할 필요성을 물었다. 충칭에서는 모든 항일세력이 임정으로 모이는 중이었다. 이 사정을 모르지 않을 쑹쯔원이 이승만에게 김용중․한길수와 손을 잡으라고 권했으나, 이승만은 단칼에 거부했다.
카이로회담을 앞둔 시점이었다. 쑹쯔원은 루스벨트에게 ‘한인사회가 너무 분열되어 있어 지원의 의미가 없다’고 답한다. 이 대화가 끝내 카이로선언 제5항의 “in due course”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수당의 아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연재물에 등장하는 후동이는 그의 아명이다)이 쓴 바에 따르면, 김용중은 처음부터 임정을 지지했으며, 한길수도 임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대체 왜 이 두 사람을 거부했을까. 그가 지지한 건 오직 그 자신만이었다는 것일까.
# 충칭의 통일정부
1944년이 되자 연합국의 승리는 이미 굳어지고 있었다. 1월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전선에서 대공세를 취했고, 6월에는 미영 연합군이 로마에 입성했다. 같은 달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을 선두로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한 게 8월 25일이었다. 나치 독일이 손을 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본 또한 태평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잃었다. 다만 일본군은 독일군과 달리 중국을 볼모로 삼으려는 계획인지, 대륙에서 대공세로 나왔다. 몇 차례 공격에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창사를 수중에 넣었고, 우한과 광저우를 연결하는 철도를 장악하고는, 광시성과 구이저우성까지 쳐들어왔다.
연말이 다가오자, 사선을 뚫고 광복진영으로 넘어오는 동포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한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로부터 전해지는 고국의 소식은 끔찍했다. 만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들이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갔고, 수십만 동포들이 일본의 공장이나 탄광에서 혹사당했다.
임정 식구들은 치를 떨면서 각오를 가다듬었다. 일제의 패전이 임박했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해방을 맞아야 한다. 그해 4월, 임시정부는 드디어 중국에 있는 망명세력 전체가 가담한 통일정부로 개편됐다. 백범이 주석, 우사가 부주석, 약산이 군무부장으로 입각했다. 광복군은 언제 조국 땅을 밟을 것인가.
(이승만-알저 히스-쑹쯔원 대목은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의 회고록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 p174~177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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