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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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11-1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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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북에서 남파된 6지대를 무주에서 격파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이 지휘하는 철주부대의 다음 작전지역은 무주(茂朱)였다. 차일혁이 무주지역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무주로 갔을 때, 무주는 연일 계속되는 빨치산들의 기습으로 치안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치안이 불안했다. 무주는 북한에서 공비들을 남파시킬 때, 그들이 주로 이용하고 있는 남파(南派)루트인 태백산맥 줄기인 육십령(六十嶺)에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와 충청도의 빨치산을 연결하는 루트와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또한 남한지역 빨치산총사령관 격인 이현상(李鉉相)의 고향인 금산(錦山)과도 인접해 있었다. 6·25 이전에도 이현상이 무주 근처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무주경찰서를 습격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리산(智異山)과 덕유산을 연결하는 무주는 하루라도 평온한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무주의 각 경찰지서(支署)는 거의 매일같이 빨치산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설천면(雪川面)이 심했다. 설천지서는 빨치산들에게 완전히 유린되기까지 했다. 설천국민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던 날, 빨치산들이 작정을 하고 설천을 기습해서, 운동회에 참석했던 지역의 우익인사들을 ‘인민재판’을 열어 즉석에서 총살해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대낮에 벌어진 사건이라 주민들의 충격이 컸다.

차일혁은 빨치산들의 준동이 유난히 심한 설천에 부대본부를 설치하고, 설천지서 주임 김계동 경사의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 계획을 구상했다. 설천지서 주임의 정보에 의하면, 그 당시 무주에는 이현상 부대가 있었다. 차일혁이 토벌할 상대는 바로 이현상 부대였다. 차일혁 부대가 무주로 출동할 무렵, 이현상 부대는 인접 충청북도 영동(永同)을 습격하여 영동군 학산면(鶴山面) 학산국민학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 이미 충북 도경의 최찬택 보안과장이 지휘하는 충북도경부대와 교전(交戰)해 충북 도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까지 했다.

차일혁은 작전목적상 예하부대를 나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서 충북 관내에까지 들어가 매복(埋伏)하도록 했다. 차일혁은 이현상 부대가 영동을 습격하고 반드시 인접해 있는 설천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이현상 부대가 설천으로 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될 길목인 그곳에 부대를 매복시켰다. 차일혁의 예상은 적중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빨치산들이 나제통문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기세당당하게 경찰로부터 노획한 쓰리쿼터를 앞세우고 있었다. 차에는 노획한 많은 장비들이 실려 있었다. 그들은 차일혁의 부대가 설천에 주둔하게 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외견상 완전히 정규군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고, 대낮임에도 버젓이 병력이동을 감행하고 있었다. 그런 빨치산을 보고 차일혁은 빨치산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북한 정규군인 ‘인민군’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이들은 영동을 습격하고 기세를 몰아 단숨에 설천을 삼키려는 듯했다.

잠복하고 있던 차일혁 부대는 빨치산이 계곡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려 중화기 공격을 퍼부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빨치산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차일혁의 작전참모를 지냈던 신임 이병선(李炳善) 18전투경찰대대장은 백전노장(百戰老將) 답게 원숙한 작전을 구상하여, 사살 82명, 무기 노획 80정이라는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차일혁 부대는 도경계(道境界)를 넘어 충북으로까지 들어가 작전을 했기 때문에 전과를 내세울 수 있는 형편이 못됐다. 오히려 충북도경의 최찬택 과장에게 도 경계를 넘은 사실에 대해 사과를 하고 부대본부가 있는 설천국민학교로 돌아와야 했다.

전투가 끝나고 확인해 보니 나제통문에서 교전한 빨치산들은 이현상 부대와는 계통이 다른 6지대였다. 6지대는 남한에서 모집된 의용군들이 북한에서 재훈련을 받고, 8월 15일 김일성의 지령으로 남파된 자들이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판문점에서 휴전협상을 틈타 후방교란과 주보급로를 공격하기 위해 남파됐다. 6지대는 이현상 부대와 선을 이으려고 태백산맥을 타고 남하했으나 충북과 경북 도계에서 국군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다.

차일혁 부대는 기존의 빨치산들과 남하하는 6지대가 합류하려고 하는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출동할 때에는 이현상의 남부군단 산하의 57사단만이 있다고 판단하고 작전을 구상했던 차일혁은 새로이 작전을 구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전주에 예비대로 남겨두었던 36대대를 즉시 설천으로 오게 했다. 그리고 이현상 직속의 57사단과 남하하는 6지대가 합류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기 위해 차일혁은 먼저 6지대를 격파하기로 했다. 북한에서 훈련을 받고 남파된 6지대의 구성원들은 비록 사기가 왕성하다고는 하나, 아직 산악전에는 서투른 면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빨치산부대인 57사단은 6·25전쟁 이전부터 이현상과 유격활동을 함께 해온 여순 반란군의 잔당(殘黨)들이 주축이 되어 있는 부대로 경남·경북·전남지역을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는 ‘신출귀몰한 부대’로 알려졌다. 그래서 57사단을 일명(一名) 불꽃사단이라고 불렸다. 아직은 산악전에 서투른 6지대였지만, 일단 57사단과 합류한다면, 그 세력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은 57사단을 놓치더라도, 먼저 6지대부터 격멸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차일혁은 6지대를 토벌하기 위해 유인작전을 쓰기로 했다. 부대원 약 3백여 명을 투입하여 57사단을 포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해놓고, 6지대로 하여금 아군의 후미를 공격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차일혁이 지휘하는 17전투경찰대대와 18전투경찰대대는 설천면에 있는 무주구천동(九泉洞)의 삼공리, 안성면(安城面), 무풍면(茂豊面)에서 57사단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심곡리를 향해 병력을 배치하여 6지대를 유인할 계획이었다. 6지대가 차일혁 부대의 후미를 공격할 것에 대비해서 중화기는 모두 6지대가 공격해 올만한 지점을 향해 조준하도록 했다. 차일혁은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6지대는 완전히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차일혁은 심곡리에 있는 57사단을 포위하려는 듯한 부대 배치로 6지대를 기다렸지만, 적들은 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에 무풍면 은천리에 주둔한 경찰부대가 빨치산의 공격으로 오히려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은천리에서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던 무주경찰서 수비대 20명이 빨치산들의 공격으로 희생됐다. 빨치산들은 경찰이 쳐놓은 바리게이트까지 다가와서 수류탄을 던지며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경찰관들이 희생당했다.

차일혁이 수립한 6지대를 먼저 섬멸한 후 지리산으로 넘어가는 57사단을 섬멸하려던 계획은, 만약 6지대가 57사단과 합류하러 오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57사단 마저 놓쳐버릴 우려가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차일혁의 작전은 완전 실패나 마찬가지였다. 차일혁은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차일혁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차일혁이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마침내 차일혁이 쳐놓은 그물에 빨치산들이 걸려든 것이다. 때는 1951년 10월 2일 새벽 2시였다. 숫자를 알 수 없는 적들이 5미터 간격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차일혁은 적들이 중화기 집중사격권 내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적들은 덕유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적들은 덕유산 입구 부근으로 1개 소대병력을 전진 시킨 채, 더 이상 병력을 진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차일혁은 1개 소대병력을 그냥 통과하도록 했다. 실전경험이 많은 18전투경찰대대 1중대는 적들을 그냥 통과시켰다.

전장에서 적들을 눈앞에 보면서도 그냥 통과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전경험이 부족한 사람들일 경우 전장의 극심한 긴장으로 인해 숨이 막히는 듯해서 기침소리를 내기 일쑤다. 그래서 차일혁은 부하들에게 매복할 때에는 미리 소금을 준비하도록 했다. 기침이 나오려고 할 때 소금을 입에 넣으면 기침이 멎었다. 총도 방아쇠를 잡지 말고 가슴에 껴안도록 했다. 매복 중에 긴장하여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전장의 노하우는 차일혁이 독립군 활동을 할 때 배운 전투경험이었다. 사전 차일혁의 그런 지시가 없었다면, 대원들 중 기침을 하거나 방아쇠를 당겼을 지도 모른다. 차일혁의 사전 조치로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빨치산의 척후병 격인 1개 소대가 거칠봉 방향으로 그대로 나아가고 10여 분 뒤, 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들이 마침내 차일혁이 쳐놓은 화력의 집중사격권 내로 들어왔다. 그때까지의 초조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일혁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차일혁의 명령에 따라 신호탄과 조명탄이 터지면서 총공격이 시작됐다. 먼저 거칠봉 쪽으로 갔던 적 1개 소대는 감히 차일혁 부대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20여 분 간 계속된 차일혁 부대의 집중사격으로 적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일혁은 도주하는 적들은 쫒지 않았다. 57사단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57사단의 공격은 없었다. 차일혁 부대는 이날 6지대 유인작전에 성공하여 사살 61명, 생포 7명, 미국식 경기관총 1정, 소련식 경기관총 1정, 따발총 2정, 아카보 소총 28정, 권총 2정이라는 대전과를 거뒀다.

차일혁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도 발악하는 극렬한 빨치산들은 사살해 버리고, 부상이 가벼운 3명의 빨치산들을 심문했는데, 그 중 1명이 6지대의 중대장이었다. 생포한 3명의 빨치산은 전주로 호송하여 빨치산으로서가 아니라 북한군으로서 정식 포로 대우를 받도록 조치했다. 생포된 빨치산들의 평균 연령은 17세였다. 차일혁은 너무 어린 나이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린 것을 불쌍히 여겼다. 차일혁은 나이어린 빨치산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그들을 빨치산이 아닌 ‘인민군 포로’로 대우받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조치해줬다. 이로써 6지대의 주력은 차일혁 부대에 의해 완전히 분쇄됐다.

윤명운(尹明運) 도경국장 겸 경비사령관은 차일혁 부대의 작전성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윤 국장은 차일혁 부대의 전공을 치하하는 표창장과 위문품을 갖고, 설천국민학교를 직접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윤 국장은 현재 차일혁 부대와 대치하고 있는 57사단도 빠른 시일 내에 분쇄하라고 명령했다. 차일혁은 “섣불리 57사단이 있는 구천동 계곡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작전이며, 57사단을 포위하고 있는 만큼 조만간 결전(決戰)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차일혁의 말처럼 구천동의 빨치산 부대인 57사단과 차일혁이 지휘하는 철주부대와의 결전은 이제 불가피하게 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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