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전 국회의원]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한 개정 상법(제382조의3) 시행 1년이 지났다. 법안은 이사가 회사와 주주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고, "총주주 이익 보호와 전체 주주의 공평한 대우"를 규정해 의미를 선명히 했다. 여기에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2차), 자사주 소각 의무화(3차)가 더해지면서 '주주가치'는 법적 책임과 공시·심사 영역의 엄격한 규율로 들어왔다.
이 조항의 시초는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1998년 상법 개정이다. 당시 대기업이 무분별한 과잉투자로 부실을 초래한 원인이 지배주주와 이사의 독단적 결정에 있다는 반성에서 도입되었다. 하지만 2004년 대법원은 "이사는 회사의 사무를 처리할 뿐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해 대상을 '회사'로 한정하고 입법 취지를 무력화했다. 이번 상법 개정은 이 판례를 극복하고 본래 취지를 되찾은 것이다.
시장의 반응은 여전히 엇갈린다. 한쪽은 "선언적 조항 하나로 경영이 달라지겠느냐"며 냉소하고 보수 법학계도 주주 명시가 상징적 손질일 뿐 강제력이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다른 쪽은 이사의 본질적 의무 법제화로 전근대적 거버넌스로의 회귀를 막았다고 본다. 1998년 충실의무 도입 당시의 논쟁이 되풀이되는 익숙한 풍경이다.
첫째는 올해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표 대결 대신 '협상과 합의'를 이끈 성숙한 선례다. 전자부품 기업 솔루엠과 얼라인파트너스 간의 포괄적 합의가 대표적이다. 솔루엠의 상환전환우선주(RCPS) 발행에 대해 얼라인은 신주발행무효 소송으로 대응했고, 결국 이사회 독립성 강화와 자본구조 개선에 합의했다. 최대주주의 RCPS 콜옵션 물량 50%를 임직원에 배분해 사익 편취 우려를 덜고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을 선언했다. RCPS 구조 조정, 독립이사 과반, 보상·승계 명료화처럼 주주권 침해 우려를 '구조 개선 패키지' 대안으로 유연하게 조율해 양측의 분쟁 비용을 줄이고 법 개정의 의미를 살렸다.
특히 임원 보수 공시에 총주주수익률(TSR)과 영업이익을 병기한 개편은 투자자에게 성과와 보수를 잇는 공통 언어를 선사했다. "보수를 낮추라"는 감정싸움 대신 "성과지표 및 주주수익률과의 정합성을 밝히라"는 합리적 정량 요구가 소통된 것이다. 이는 이사충실의무가 감시의무(내부통제), 보수 정당화(성과 연계), 자본 배분의 일관성으로 구체화되어 주주 이익과 이사회의 결정이 직결됨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나아가 지배주주(총수) 관련 의사결정에서 주주에 대한 이사의 책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단적 사례들이 나타나며 상법 개정의 실질적 효과가 입증되었다.
첫째, SK네트웍스 이사회가 유죄 판결을 받은 최 전 회장을 명예회장 및 고문으로 임명해 고액 보수를 주려다 철회한 사례다. 주주 반발에 독립 사외이사였던 이사회 의장이 이사들의 법적 리스크를 검토하려 로펌에 자문을 의뢰했다. "기여 없는 고액 고문료 지급은 주주 충실의무 위배와 배임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회신에 보수 미지급으로 결정을 변경했다. 과거의 거수기 추인 관행에 이사회가 법률을 무기로 독자적 제동을 건 전환점이다.
둘째, 이마트 정용진 회장의 스타벅스 사태와 등기이사 복귀다. 자회사 마케팅 참사에 정 회장이 사과하고 대표이사를 경질하자, "등기지위 없는 미등기 총수가 무슨 권한으로 인사를 주도하며 고액 보수를 받느냐"는 본질적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국 정 회장은 13년 만에 이마트 등기이사로 복귀해 법적 책임 영역 안으로 진입했다. 사과는 여론용 선언이지만 진짜 책임은 이사회라는 공적 기구 내에서 절차와 기록으로 지는 것임을 일깨웠다.
셋째,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최태원 SK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각각 수백조원대 투자 계획을 직접 발표한 장면이다. 투자 규모는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의 74%에 달하는 1100조원의 천문학적 금액이었음에도, 공시에는 세부 추진 일정이나 이사회의 사전 결의 내용이 누락되었다. 최 회장이 추후 "이사회의 심의와 결의가 필요한 사안"이라 덧붙이며 확정된 것이 아님을 시사했지만. 이사회가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 회사의 중대한 의사결정이 총수의 독단적 선언이 아니라 이사회라는 공적 기구의 의사록과 절차로 남아야 함을 보여준 대목이다.
설비투자와 자금 조달 등 자본배치는 이사회의 핵심 권한이자 임무다. 미등기 회장인 대주주가 국가 행사에서 대규모 투자를 불쑥 발표하고 이사회가 사후 기계적으로 승인하던 전근대적 관행은 글로벌 투자자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이는 최근 주가 흐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 1년은 기존 관행의 저항 속에서도 이사회가 주주와 실질적 소통을 시작한 뜻깊은 전환점이었다. 최근 코스피의 흐름은 이러한 지배구조의 질적 개선 기대를 반영한다. 지수 상승을 단순히 반도체 호황에 의한 기업이익 급증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시장의 가격 결정 메커니즘을 오독한 결과다.
아무리 반도체 호황으로 큰 이익을 올려도 계열사 우회 지원이나 편법적 거래로 주주를 패싱한다면 시장은 기업가치를 높게 매기지 않는다. 상법 개정은 경영 성과가 지배주주가 아닌 '전체 주주'의 비례적 몫이라는 원칙을 명확히 규정하여, 거버넌스 리스크를 해소하고 시장 전체의 주가수익비율(PER)을 올리는 강력한 필요조건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법 개정 이후 당국의 대처는 보수적이고 느리다. 법 개정에 발맞춰 하위 감독 규정과 공시 시스템을 선제적이고 속도감 있게 정비해야 함에도, 걸핏하면 세세한 가이드라인을 남발해 시장을 틀어쥐려 한다.
시장의 치열한 메커니즘은 현장의 플레이어들이 가장 잘 안다. 미래의 비즈니스 사건들을 사전에 당국의 촘촘한 행정 지침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 당국은 원칙만 명료하게 제시하고, 사후에 책임 소재와 의무 이행을 엄격히 검증하는 사후 감독 체계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미국 등 선진시장의 장점은 당국, 사법부, 참여자의 한계가 획정되어 '자기책임' 원칙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참여자는 법 테두리 내에서 자유롭게 거래하고 책임은 스스로 진다. 당국은 개별 분쟁에 미시적인 정답을 내지 않고 규칙 하에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둔다. 분쟁 시 공평하고 신속하게 구제해 줄 사법 인프라의 투명한 정비, 이것이 국가의 본질적 책무다.
좋은 지배구조는 주주가 이사회를 향해 "그 사업을 하면 주주가 진짜 돈을 얼마나 버는가?"라고 대놓고 물을 수 있는 구조다. 가령 기업이 차세대 HBM 투자를 결의할 때, 성숙한 주주는 지극히 구체적인 숫자를 묻고 이사회는 다음 질문에 합리적 근거로 답해야 하는 것이다. "HBM 증설용 신규 자본 조달 구조에서 차입과 증자의 포트폴리오 비율은 어떠한가? 타인 및 자기자본을 포괄한 회사의 평균 자본비용은 몇 %인가? 투자의 예상 내부수익률(IRR)이 평균 자본비용을 유의미하게 추월해 주주가치를 증대시킨다는 객관적인 재무적 근거는 무엇인가?"
자본비용보다 낮은 수익을 올리는 사업에 주주들이 신뢰하여 제공한 자본을 투입하겠다는 이사회와 경영자는 애초부터 자질이 없으며 해임되거나 배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투자 정당성을 주주들에게 구체적인 재무적 숫자로 끝까지 납득시키는 문화, 이것이 향후 상법 개정 이후에 우리가 도달해야 할 핵심 과제이자 이정표다. 현행 공시 제도는 의사결정이 다 끝난 사후적 결과를 단순 공표하는 소극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대규모 투자를 결정할 때 바탕이 된 경영진의 미래 가정과 자본조달 대안 분석, 자본비용의 가정치까지 사전에 공시하는 것이 요구된다. 특히 공시제도에서 '자본비용'의 공시 의무화는 결정적인 밸류업 도구다. 주주가 공급한 자본의 진짜 비용을 이사회가 스스로 인정하고 시장에 매년 공시하기 시작할 때, 이사회는 자산 배분과 자사주 정책, 배당 계획을 정밀하게 설계할 수밖에 없다.
자본비용보다 낮은 수익을 올릴 사업에 자금을 쓰겠다는 경영진은 자질 부족이며 충실의무 위반이다. 투자 가치를 숫자로 소통하는 정밀함은 상법 개정 이후의 중요 과제다. 사후 결과만 공표하는 소극적 공시를 탈피해 대규모 투자의 전제인 경영진의 미래 전망, 자본조달 대안 분석, 투입될 자본비용까지 사전에 명확히 소통하도록 공시를 고도화해야 한다. 특히 '자기자본비용'의 공시 의무화는 강력한 밸류업 도구다. 주주가 기탁한 자본의 진짜 기회비용을 명확히 공시할 때, 이사회는 자산 배치, 자사주 소각, 배당 정책 등을 주주 눈높이에 맞춰 극도로 치밀하게 검토하고 설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본비용을 공시하면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실제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 것인지, 자본을 깔고 앉아 기회비용조차 못 맞추는 상태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난다. "그 회사의 조달 자본비용이 얼마냐"는 질문이 공시로 답해질 때, 대주주 위주의 의사결정에서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는 선진 패러다임으로의 진화가 완성된다.
공시와 디스커버리는 한 몸이다. 공시가 자율적 밝힘이라면 디스커버리는 은폐된 자료를 주주가 직접 대등하게 열어볼 민사상 사법 권리를 뜻한다. 이 제도가 강력한 이유는 소송과 동시에 이메일, 의사결정서 등 모든 증거가 상호 개시(開示)되며, 강력한 대면 증언녹취(Deposition) 과정에서 거짓을 고하거나 증거를 숨기면 원천 패소하기 때문이다.
당국은 기업 분쟁의 심판자로 나설 게 아니라, 주주와 기업이 대등한 증거개시(디스커버리) 권한을 지니고 법정에서 민사적으로 스스로 구제받을 수 있도록 규칙과 링을 정교하게 다듬어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필요조건인 상법 개정 위에 공시의무 강화와 디스커버리가 정비될 때, 소모적인 형사 배임 남발이 잦아들고 시장 내에서 규범적 합의를 형성하는 연성규범(Soft Law)이 자리 잡는다. 좋은 기업 지배구조는 단조롭고 차가운 강제 법 조문이 아니라, 이와 같은 정교한 공시와 검증의 상식이 차곡차곡 축적된 지배구조의 지층으로 완성된다.
상법 개정 1년은 대전환의 출발점이다. 충실의무라는 제도적 필요조건 위에 자본배치 분석, 공시제도 강화, 디스커버리 장치 도입이라는 충분조건이 결합해야만 완성형 밸류업이 실현된다. 나아가 상사 분쟁의 고도화된 전문 심리를 도울 대법관 증원과 전문 상사법원 설립이라는 장기 구상도 치열하게 상상해 본다. 상상하는 만큼 새로운 발전이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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