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봄은 왔으나 지금은 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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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4-1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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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봄의 기운이 도처에 널려 있던 4월 18일 토요일. 혼잡한 서울 도심을 뚫고 계동 현대사옥 현대중공업 서울사무소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주말 출근. 건물 주차장에는 이 날도 승용차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다양한 사정은 있겠지만 주말 출근자들은 기자와 마찬가지로 평일에 소화하지 못한 업무를 보충하고, 돌아오는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출근한 이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자실에서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인 지난 1981년 2월 25일자 서울신문에 기고한 ‘새 봄을 기다리며’가 생각나 꺼내 읽어봤다.

산업부 취재기자로 일하면서 이 글을 접한 뒤 매년 봄이면 반복해서 읽고 있는데, 해가 갈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글 하나는 꼭 쓰고 싶다”며 누구를 시키지 않고 아산이 직접 쓰고 고치는 작업을 반복해 만들었다는 이 글 속에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업인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 정서가 솔직하게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서면 봄은 간 곳 없이 사라진다. 비단 봄뿐이 아니고 모든 절기의 변화에 대하여 그 반사감각은 무디어지고 먼 어린 시절의 감상을 되씹는 일 밖에 없다. (중략) 오늘의 현실은 4·4분기제의 소득확대 추구를 위한 치열한 적자생존의 투쟁으로 채워지는 4계절 뿐이다. 기업인에게는 환희의 4계절이나 낭만적 4계절은 연분에 닿지 않고 대자연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는 심정에 다가서지 않아 멀고 먼 데에 있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중략) 나로서는 최선을 다하는 그 혼신의 집중과 정열과 전심전령을 소진하는 질주의 기나긴 행로만이 있었다. 기업의 대열에 서 있는 여러 기업동지들이 이와 같은 형편에 놓여있을 것이다. 절박하다고 할 만큼 각박한 경합사례들을 수없이 치러내면서 달리고 있다. 그러므로 봄이 와도 봄의 줄밖에 서서 혼미한 어둠에 몸을 적시고 있는 수가 많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 가운데에 내던져진 기업인들로서는 계절을 만끽하는 여유가 사치일 수밖에 없다.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뒤로 한 채 사무실이라는 ‘혼미한 어둠 속’에서 성공의 희망을 도모하고 있다. ‘놀 땐 놀고 일 할 땐 일 하자’며 선진국에 비해 터무니하게 긴 한국의 노동시간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야근 또는 철야근무에 주말과 휴일을 반납해가며 노력한 숨은 영웅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2015년 봄도 기업인들에게는 이렇게 일상의 하루로 지나가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올해 봄은 기업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어려운 위기의 시기라는 것이다. 힘든 상황은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접할 때마다 힘들다. 저성장 기조의 장기화에 따른 더딘 경기회복세로 시장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비용통제와 체제개편 등 마른수건 짜내기식으로 살아남은 기업들은 이제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자’는 선택과 집중에 초점을 맞춘 사업 구조개편에 모든 정력을 쏟고 있다. 이번에 실패하면 정말로 기업은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위기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

살아남기에도 빠듯한 지금.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들에게 고용과 투자확대를 압박하면서 부패척결이라는 명분으로 무차별적인 수사를 지속하고 있다. 사실상 공포정국이다. 이로인해 기업인들은 ‘혼미한 어둠’에 스스로 몸을 감춘 채 바짝 머리를 숙이고 있다. 봄은 왔지만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지금은 봄이 아니다.

‘기업의 단하에서 봄을 만끽하고 싶다. 경제단상에서 호기 있게 일하는 연출자들의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심정에 여유를 가지고 이 봄을 즐기리라’라는 아산의 기대, 기업인들의 소망은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지. 누구도 그 때를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서글픈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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